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3)화 (23/220)

22화

지안이 중요한 초대장들과 일정을 적어 놓은 종이를 들고는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바로 결투와 관련된 소문들이 퍼지도록 조치해 놨습니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을 때 사교계에 등장하는 편이 좋겠네요. 말은 더 빨리 돌 테고 관심이 더욱 집중될 겁니다. 첫 파티는 어느 곳으로 정할까요? 역시 황제파에 힘을 실어 주심이…….”

나엘라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은 지안이 결국 종이를 접었다.

“나엘라 님…….”

나엘라는 요즘 굉장히 바빴다. 오전과 오후 세 시간씩 포츠사를 교육시켰고 바쁜 대공을 붙잡아 다섯 번의 대련까지 치러 냈다.

본격적으로 사교계도 돌아보며 주변 영지에 대한 처우를 확실히 해 놔야 했고, 슬슬 수도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준비도 해야 했다.

문제는 대공과 치렀던 다섯 번의 대련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두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던 나엘라가 벌떡 일어났다.

“대공 전하는 어디 있지?”

“오늘도 아침 일찍 영지 시찰을 나가셨습니다.”

나엘라는 다섯 번의 대련에서 다섯 번을 모두 졌다. 나엘라의 인생에 있어서 이기지 못한 적은 몇 없었다.

아버지는 애초에 나엘라에게 검을 겨누지 못해 대련 자체가 안 됐으며, 둘째 오라버니는 나엘라가 첫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날 바로 꺾었다.

첫째 오라버니는 영지에 올 때마다 나엘라와 대련해야 했는데 당시 그녀가 이기지 못한 이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끈질김에 질려 매번 도망치듯 수도로 돌아가던 단제는 나중에서야 티 안 나게 몇 번 져 주며 나엘라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융통성도 없고 나엘라의 끈질김도 잘 모르는 데다 티 안 나게 져 주는 방법 또한 잘 모르는 체드란은 결국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시찰을 나가지 않을 때는 저택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묘하게 보이지 않는 체드란 때문에 나엘라는 애가 탔다.

“분명 날 피하고 있는 거야.”

영지 시찰도 하루 이틀이지 영주가 이 정도로 오가면 영지민들도 질려 도망갈 판이었다.

“하녀장을 불러와.”

안주인의 책임을 다 해 본 적이 없으니 부를 일도 없던 하녀장을 체드란 때문에 처음 불렀다.

나엘라의 부름에 놀란 하녀장은 부른 지 얼마 안 되어 나타났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하녀장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고 자네와 하녀들에게 지시할 것이 있어서 불렀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녀장은 조금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그래. 대공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내게 보고하게. 무엇을 먹는지 어떤 차를 마시는지까지 세세하게 말이야.”

“예?”

황망한 하녀장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엘라는 아주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전하께 비법이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네. 타고난 신체 조건과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얻은 경험들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침실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다시 침실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모든 행동을 기록해서 전해 주게.”

하녀장은 요즘 사용인들이 떠들던 대공 부부의 대련을 떠올렸다.

대공비 전하의 검술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며 다채롭더라, 그럼에도 대공 전하께선 전혀 밀리지 않고 다 받아치시더라, 갑자기 달려든 대공비 전하를 대공 전하께서 불한당을 상대하는 것처럼 엎어 치더라, 그리고는 도망가더라.

하도 아이들이 떠들어 대서 직접 보진 않았어도 관람한 기분이었다.

“혹시 대련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래. 그 대련 때문일세.”

하녀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 훨씬 체격이 크신 데 이기기 힘들지 않으실는지…….”

나엘라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는 여자라서 서러웠던 적이 있는가?”

“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들과 달라서 서러웠던 적이 있었느냔 말이야.”

여자이기 때문에 서러웠던 일이라면 하녀장도 셀 수 없었다.

“여러 번 있기는 했습니다만…….”

“지금 내가 그렇네. 여자라서 신체적 조건이 밀리기에 나는 꽤 많은 날을 서러워했네. 남자들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을 갖고 싶던 날도 있었고 누구보다 큰 키를 원했던 날도 있었지. 2m가 넘길 바라 저택의 모든 우유를 먹어 치운 적도 있었어. 유리한 신체 조건은 고점을 차지하고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렇군요…….”

하녀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계라 그저 눈만 깜박거렸다.

“그렇다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는 것은 아니네. 근력이 적고 체격이 작기에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으니까. 나는 이 한계를 극복하고 수많은 이들을 이기며 살아 왔어. 내가 천재였던 덕도 있겠지만 그런 말로 내 노력을 무시하고 싶진 않아.”

나엘라가 천천히 다가가 하녀장의 두 어깨를 짚었다. 그녀의 불타는 보라색 눈동자에 하녀장은 시선을 빼앗겼다.

“그런데 지금, 압도적인 신체 조건 차이로 내가 졌단 말일세. 그러니 무엇을 해야겠나?”

“암, 암살……?”

“……그렇지, 노력일세. 그러니 자네들이 내 노력을 조금 도와주겠나?”

하녀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주게. 앞으로 잘 부탁하네.”

그렇게 하녀들이 주인인 체드란을 감시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

“흠.”

낮은 신음에 아침 식사를 돕던 하녀들이 흘깃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체드란은 심히 기묘한 감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이프를 놓은 체드란이 마든을 불렀다.

“마든. 저택에 무슨 일이 있는가?”

“무슨 일이라고 하시면……? 대공비 전하께서 아침저녁으로 체드란 전하를 찾고 계십니다.”

“그것 말고는?”

“글쎄요. 저도 잘…….”

마든의 웃음이 매우 수상했다. 왠지 모르게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나엘라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필시 온갖 말로 자신을 회유하고 다독이며 대련으로 이끌 게 분명했다. 되도록 상대해 주려 해도 그녀와 대련을 하고 나면 온몸에 진이 빠졌다.

예전에 론체의 말처럼 그녀의 검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자비 없는 움직임을 쳐 내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검을 써야 한다는 것은 체드란 같은 강자일수록 더 힘든 일이었다.

자신의 몸은 오랜 전투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다 보니 살의에 반응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치명상을 노렸다.

자신의 부인을 다치게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마음도 모른 채 매번 최선을 다해 달려드는 나엘라는 너무도 힘든 상대였다. 덕분에 대련에 대한 보상 같은 것들은 입에 담아 보지도 못했다.

“대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냥 한 번쯤 져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체드란이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어설픈 연기를 귀신같이 알아챈 나엘라가 다시 대련해야 한다고 외쳐 대서 문제지.

“세크게라인과의 결투는 잘 준비되고 있는가?”

“이제 사흘 남았군요. 포츠사 영식은 나엘라 님께 사사받으며 다른 기사들과도 대련하고 있습니다. 배운 것을 얼마큼 써먹느냐가 관건이겠죠. 반트모어 경의 말로는 무리 없이 이길 것 같답니다.”

“다른 이상은 없는가?”

“세크게라인과 노헤스카 기사들의 결투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아직 결투에 걸린 승패 보상이나 전후 사정까지는 소문이 나지 않은 것 같지만 꽤 많은 이들이 주시하는 것 같습니다.”

“소문이 퍼졌다고? 세크게라인에서는 환영할 일이 아니군.”

“아무래도 대공비 전하의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갑자기 소문이 도는 것보다는 귀를 기울이던 사건의 소문이 훨씬 빠를 테니까요. 포츠사 영식의 패배를 염두에 둔 소문 같습니다.”

“승패와 상관없이 소문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마든이 씨익 웃었다. 마든도 체드란도 이제는 나엘라의 방식을 조금씩이나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유리하게 써먹어야 하는지, 이 일로 발생할 토벌권 양도에 관해서는 황실에 어떻게 보고해야 하는지, 예민한 황제에게 이 일이 어떤 식으로 보일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왔다.

심지어 수습은 어느새 당연히 체드란의 몫이 되지 않았나.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그때 누군가의 다급한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졌다. 곧 숨을 고르는 기척 뒤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녀장입니다.”

“들어오라.”

소리 없이 열린 문이 조심스레 닫혔다.

이마에 땀까지는 훔치지 못했는지 땀이 송골송골 맺힌 하녀장은 서둘러 체드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그게…… 대공비 전하께서 황제 폐하께 서신을 보내도 되는지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체드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를 찾아다니던 나엘라가 최후의 카드를 던졌다. 거부할 수 없는 말로 그를 불러낸 것이다.

오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명백한 협박에 체드란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간다고 전하라.”

하녀장이 먼저 식당을 나서자 체드란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서재에서 한 손에 책을 펼친 채 우아하게 앉아 있던 나엘라가 노크 소리에 탁, 책을 닫았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체드란이 들어왔다. 가벼운 셔츠 너머로 잡힌 그의 근육을 본 나엘라는 기분이 조금 상했다.

자신의 체격이 조금만 축복받았다면 저 정도 근육은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이유를 알 법한 억울함에 나엘라는 일어나지도 않고 자리를 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한눈에 봐도 나엘라의 기분이 느껴져 체드란은 조용히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겠다고?”

“오랜만에 뵙는다고 제가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오랜만에 뵙는데 어째 안부 인사도 없으신지요.”

아무래도 나엘라의 기분이 생각보다 더 안 좋은 모양이었다.

체드란에겐 대놓고 적의를 보인 적이 없었는데 대련 이후로는 나엘라와 마주할 때마다 가시방석이었다.

“잘 지냈는가?”

“아뇨. 잘 못 지냈습니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라곤 하나 참 너무하십니다. 그래도 엄연히 대공께서 제 남편이신데 부인이 이리 찾음에도 얼굴 한번 비추는 법이 없으시다니요. 가신들이 무정한 남편이라 손가락질할까 겁이 납니다.”

체드란은 이 와중에도 청산유수로 흐르는 나엘라의 말에 감탄했다. 문제라면 그 날 선 내용의 상대가 자신이라는 거지만.

“흠흠, 그렇군. 그나저나 황제에게 서신을 쓰려 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이유는?”

“황제 폐하께서는 대공 전하의 아버지 아닙니까?”

“생물학적으로는 그렇지.”

아마 다른 이가 체드란의 앞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면 당장 끌려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역린을 건드리고자 악의로 꺼낸 말이 아닌 걸 알기에 그냥 넘어갔다.

다른 악의는 있어 보였지만.

“마침 제 남편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지 뭡니까. 근데 대공 전하께서는 저를 피해 다니시고, 그래서 황제 폐하께 여쭈어보려 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아들의 비인 제가 궁금하시지 않겠습니까.”

조금씩 선을 넘던 나엘라가 끝내 역린을 건드렸다. 처음부터 그런 악의가 맞았던 모양이다.

체드란의 굳어진 표정과 싸늘해진 눈동자를 보던 나엘라는 싱긋 웃었다.

나엘라의 웃음 한번 보기 어렵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웃음은 예상 못 한 바다. 아주 복장을 뒤집는 표정을 보게 될 줄이야.

그녀가 웃을 때는 늘 사고를 치는 중이거나 사고를 친 후라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그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싸늘하게 굳어진 체드란을 나엘라는 미소를 유지하면서도 똑바로 노려봤다.

“무슨 생각이긴요. 제 남편을 탈탈 털어 보자는 그런 생각이지요.”

서재에 한풍이 불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