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의도가 무엇인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 그런 의미입니다.”
“내가 적이란 소리군.”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분명 나엘라는 심기가 뒤틀려 더욱 물고 늘어지는 듯했다. 체드란은 그런 태도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겨우 그런 것으로 건드릴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요 며칠 제 인내심을 시험했습니다.”
어째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체드란은 나엘라가 최악의 수를 던졌다고 생각했다.
“내 이야기라면 아주 유명하지 않나?”
“제가 아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첫째 황자로 태어났으나 후궁 소생이라 황태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 황태자로 가장 유력했던 2황자 페트론 테사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 황실의 성인 테사라는 성을 버리고 스승이었던 노헤스카 백작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 온갖 전쟁에서 공적을 얻어 대공이 되었다는 것.”
“마호세르디의 정보력이 형편없는가 보군.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을 내막을 그대는 겉밖에 모르는군.”
“그러니 알려 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인이라는 자가 남보다 아는 것이 적으니 말입니다.”
체드란은 나엘라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봐 왔던 나엘라는 과격한 수를 던지지만, 결과는 늘 좋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는 과격한 수를 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어떤 결과를 원하는 것일까.
“그대가 내뱉은 말의 경중을 알고 있는 것인가.”
“네. 알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책임도 알고 있는가.”
“죽기야 하겠습니까.”
“내 신의를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앞으로 그대가 할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신의가 있었습니까? 저를 믿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나엘라의 눈동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또렷하기만 했다.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군. 언제나 그런 식인가?”
“물러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전심전력을 다 하는 스타일이라서요.”
“그것이 그대의 약점이 될 것이다.”
“알고는 있습니다. 단점이 된 적은 없지만요.”
“그 단점으로 그대의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경고는 제 역린입니다. 하지만 봐드리죠. 서로 역린을 한 번씩 건드렸으니 대공께서도 저를 봐주셔야 합니다.”
더불어 뻔뻔하기까지 하니 이 대화를 어찌할까.
“그런 말장난으로 언제나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그런 것으로 넘어가지 않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가.”
“저도 바보가 아닌지라 통하는 사람에게만 합니다.”
“나에겐 통한다는 말인가?”
“이때까지 통하지 않았습니까?”
말로는 이길 수 없다. 체드란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대로는 계속 의미 없는 말싸움만 지속할 뿐이었다.
“진짜 의도를 말해.”
체드란의 마지막 경고였다. 더는 빙빙 돌리는 말을 참아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태도에 나엘라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께서는 저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체드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대공비.”
“앞에 수식언을 빠트렸군요. 잘 써먹을 패인 대공비라고 하셔야죠.”
체드란이 입을 굳게 다물자 나엘라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제는 정말 대화를 할 차례였다.
“모두 밖으로 나가라.”
대공 부부의 험악한 설전을 바라보던 이들이 서재를 나섰다. 마지막으로 빠져나간 지안이 문을 닫자 나엘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서로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정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체드란은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즉위하기를 바란다.
나엘라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길 바란다.
둘의 목적을 위해선 황제를 몰아내야 했다.
“그래서?”
“원활한 목적 달성을 위해선 황제를 알아야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인 법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말인가? 내 역린을 건드려 내 심기를 뒤트는 것?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듣고 황제에 대해 파악하는 것?”
“대공께서 봤던 황제가 가장 정확하겠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려야 하는 역린이라면 이런 방식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엘라의 방법이라기엔 조금 뒤틀려 있었다.
“이유는?”
“당신이 날 피했으니까요.”
체드란은 머리가 다 아팠다. 겨우 그런 이유로 저를 화나게 했다는 말이다.
“고작 그런 것으로?”
“고작이라니요. 이건 경고입니다. 날 피하지 마세요. 난 내 사람이 내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울컥 화를 내려던 체드란은 잠시 멈칫했다. 내 사람?
“내가 왜 자네 사람이지?”
“제 품 안에 있지 않습니까?”
어이없는 소리에 체드란은 치밀어 오르던 화가 푸스스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나엘라가 말하는 제 사람이라는 범주에 체드란 자신이 들어 있을 줄은 몰랐다.
대체 이 여자는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걸까.
“그대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대공 전하요.”
나엘라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으로 돌려주었다.
“내가 누구의 사람이라고?”
“제 것이요.”
이제는 사람도 아닌 ‘것’이란다. 당연하다는 태도와 당당한 눈빛에 체드란은 자신의 사고방식이 이상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왜지?”
“제가 지킬 사람이니까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평생 살게 될 이 대공가도 지킬 것이라고.”
“나는 그대보다 강하다.”
“열받지만 맞는 말이죠. 근데 그래서요?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저보다 약해서 제가 지키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럼 그대보다 강한 사람을 왜 지키려고 하는가?”
“강하든 약하든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하는 건 당연한 행동입니다.”
나엘라는 굳게 믿는 신념이 확고했다.
“대공가를 소중하게 생각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지 않았나?”
“앞으로 대공가에서 보낼 시간은 충분히 넘치지요. 남은 인생을 살아갈 곳이라 생각하면 당연히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까지 포함할 필요는 없다. 그대가 대공가를 소중히 여겨 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만큼 약하지도 않고 이 대공가를 지킬 의무는 내게도 있다.”
“의무와 상관없이 남편이지 않습니까.”
“그대가 이 혼인을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몰랐군.”
“결혼이 애들 장난입니까? 당연히 중요한 일이고 심사숙고한 결정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길래 이런 당연한 것도 모르십니까?”
그건 체드란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길래 그런 사고방식을 갖게 됐을까.
“조금은 그대를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모르겠군.”
체드란은 자신과의 대화를 힘들어한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가만히 대화를 되짚어 보던 나엘라는 어떤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낯설어서 그러십니까?”
“무엇을?”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 주겠다 말해 준 것이요. 아니면 당신이 누군가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나 누군가의 소중한 무언가가 된다는 감각들 말입니다.”
어쩌면 세 가지 다일지도 몰랐다.
흔들리는 체드란의 눈동자를 본 나엘라는 그것이 정답임을 깨달았다.
“저는 기사였던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지요. 당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황자였으니 자신을 위해 검을 들거나 아니면 항상 누군가의 주군이었겠네요.”
“그대는 공녀였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면 그대도 나와 비슷한…….”
“저는 기사였다니까요?”
이젠 말도 통하지 않았다. 나엘라는 아예 밀어붙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각자 잘하는 걸 하도록 하죠. 저는 대공 전하를 지킬 테니 대공 전하는 스스로를 지키세요.”
“아까는 막 대공이라고 하더니 왜 갑자기 대공 전하가…….”
“호칭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호칭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에는 어폐가 있네. 내가 항상 누군가의 주군이었다면 당연히 날 지키는 기사들이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지켜지는 것이 낯설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그대에게 어떤 존재가 되었는진 모르겠으나 나는 그대의 생각보다 강하고…….”
쾅! 나엘라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체드란은 입을 다물었다.
“자, 그러한 이유로 대공께서는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나엘라는 체드란의 말을 무시하기로 한 것이 확실했다. 거기에 더해 만만해진 것도 틀림없어 보였다.
몇 번의 말싸움으로 나엘라는 체드란이 자신을 봐준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제가 대공을 지키기로 했으니 이제 말해 보시죠.”
“무엇을?”
“처음부터 묻지 않았습니까. 대공의 어린 시절이요.”
체드란은 얼핏 감을 잡았다. 자신은 나엘라에게 약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이유를 찾자면…….
“제가 못된 황제 폐하를 물리치고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 끼어든 제가 못마땅하실지도 모르지만, 대공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신이 불행했던 당신에게 저를 보내셨나 보죠.”
그녀의 모든 주장이 엄청나게 뻔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체드란은 다시 한번 곱씹었다.
나엘라 본인보다 두 배만 한 덩치의 체드란을 스스럼없이 지킨다고 말하고, 스스럼없이 체드란이 자신의 사람이라고 말하며, 이곳이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곳임을 스스럼없이 주장한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엘라가.
“그렇군.”
“뭐가 말입니까? 역시 신이 보낸 선물 같다는 말씀입니까?”
“뻔뻔하기는. 그런 말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마라.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 때는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각오 안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물이 아니면 뭡니까?”
“선물까지는 아닌 것 같고 위로 정도면 적당할 것 같군.”
“위로요?”
지옥 같던 어린 시절에 대한 작은 위로.
2황자이자 이복동생인 페트론 테사가 죽었을 적에 나엘라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나마 자신을 아끼던 3황녀가 타국으로 팔려 갈 적에 나엘라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수없이 찾아오던 암살자 중 일부가 황제의 사주임을 깨달았던 적에 나엘라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때도 그녀의 사람이었다면 나엘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리고 앞으로 겪을 수많은 일에 나엘라가 있다면 어떨까.
그때 나엘라가 있었다면 그녀는 불같이 화를 냈겠지.
그로우 영식이 하녀를 건드렸을 때처럼. 어쩌면 복수하겠다며 날뛰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부는 성공했을 수도 있고.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에 나엘라가 있다면 황제가 자신을 노릴 때마다, 수많은 적이 자신을 노릴 때마다 온갖 과격한 방법들을 내놓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 결과는 희한하게 좋을 테고.
그런 작은 위로였다.
제 어린 시절에 그녀가 없었음을 위로하고 앞으로 있을 힘든 일 속에서 당연히 자신을 지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한다.
체드란은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래. 궁금한 것을 물어보게.”
“아니, 위로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아니면 말하지 않을 걸세.”
“그럼 처음부터 물어보도록 하죠. 일단…….”
체드란은 그녀의 고민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만히 웃었다. 그게 어떤 감정의 시작인지도 모른 채로.
“아 참, 그렇다고 대련을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대화가 끝나고 나면 바로 연무장으로 가시죠.”
소파 옆에 가지런히 놓인 나엘라의 애검을 이제야 알아챈 체드란은 묘한 감동이 차게 식어 감을 느꼈다.
위로는 무슨.
이 여자는 처음 생각했던 대로 위험 분자가 맞았다. 대공가의 위험 분자는 아니지만, 자신한테는 위험 분자다. 그게 아니라면 상대하기가 이렇게 힘들 리 없었다.
그런 체드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엘라는 생각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