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체드란의 모친은 그가 사고를 갖추기도 전에 죽었다. 황후의 소행이었지만 1황자의 외가가 없는 것이 더 편하리라 생각했던 황제가 눈감아 주어 가능했다.
지극한 보살핌이 없었음에도 체드란은 어렸을 때부터 체격이 남달랐고 검술에 두각을 보였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기억력이 뛰어나 학업에 대한 성취도 앞섰다.
애가 탄 황후는 은밀히 악행을 지속하다 2황자가 태어난 이후론 암살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체드란만 없다면 자신의 아이가 무사히 황태자가 되리라 생각했으리라.
그런 체드란을 지킨 것이 모친의 가문이었던 노헤스카 백작가였다. 검술 스승이자 외조부인 그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이였다.
다만 국경을 지키는 가문의 가주로서 자주 수도에 있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 근근하던 보살핌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주 대행을 하던 외숙부가 전쟁터에서 급사한 후론 노헤스카 백작은 더더욱 수도로 자주 올라오지 못했다.
군사력이 강한 노헤스카 백작과 체드란이 가까워지는 게 보기 싫었던 황제나 황후의 손속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허나 자라면서는 두 사람 중 어느 쪽의 술수이든 상관없어졌다.
둘 모두에게 복수하면 되니까.
그렇게 노헤스카 백작이 수도를 올라오지 못하게 되면서부터는 암살자들의 수도 늘어났다. 그나마도 체드란을 지키던 기사들이 노헤스카의 소속이라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후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보내던 암살자들 틈에 황제가 보낸 암살자들이 끼어 있음을.
황후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황제가 체드란이 죽으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기 위해 모른 척했다는 것도.
황제의 손에 놀아나고 있음을 깨달은 황후는 그날부터 암살자를 보내는 것을 멈췄다. 그녀가 멈추자 황제도 더는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고, 체드란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나이를 먹고선 더 명확해졌다. 그건 황제가 일부러 들킨 거였다.
나는 네가 하는 짓을 알고 있고 너의 약점 또한 잡았으니 함부로 자신에게 덤비지 말 것.
아들의 목숨조차 황후에게 들이밀 경고로 써 버리는 아버지라니. 체드란은 황실의 더러움에 점차 질려 갔다.
그 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흙탕 싸움이었지만 체드란이 전부 버리고 뛰쳐나오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래서요?”
이야기에 집중하다 곧 테이블을 넘어올 기세인 나엘라 때문에 체드란은 한숨이 연달아 나왔다.
남의 집 가정사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저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대는 내 이야기가 재밌나?”
“막장은 원래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 있는 법입니다.”
“내 역린을 막장이라는 단어로 치부해 버린 사람은 그대가 유일하다.”
“현재가 중요한 겁니다.”
“그대는 이상하게 현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대와 대화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더군.”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이자 산 자의 의무입니다.”
가볍게 하는 말이지만 속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체드란은 따져 묻지 않았다.
“그대도 알다시피 이복동생인 2황자 페트론 테사의 죽음엔 내가 얽혀 있다.”
황후의 아들이자 그녀가 황태자로 앉히고자 했던 이였다. 후궁 소생이라는 이유로 체드란이 황태자가 되는 것을 막았던 황후는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제 아들인 페트론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페트론은 제 어미에게 악의를 물려받아 나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 페트론을 믿고 기다리기엔 부족했는지 결국 황후가 움직였지.”
조급해진 마음에 움직이긴 했지만, 황제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곳이든 황제의 눈과 귀가 없을 리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황후는 페트론이 해결하기를 기다리는 대신 체드란에게 다시 암살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섞인 황제의 암살자도 마찬가지였다.
페트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미가 더 이상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페트론은 내게 와 악담을 퍼부었다. 그 악담 중에는 황제가 암살자를 보냈다는 내용도 있었다. 문제는 황제가 그것을 알게 되었고, 황후에게 분노했지.”
“못난 자식이 결국 황후의 발목을 잡았군요. 근데 대공이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면 자연히 2황자가 황태자였을 텐데 황후는 왜 그렇게 불안해했습니까?”
“페트론은 황후를 닮아 붉은 머리였다. 하필 그때 다른 후궁에게서 태어난 3황자 데테로아가 백금발에 푸른 눈이었고.”
백금발과 푸른 눈은 역대 황제들의 상징이었다.
“지금의 황태자군요.”
“그래. 분노한 황제는 입을 함부로 놀린 벌로 황후의 가문이 가진 권력을 줄이고자 했다. 그녀의 가문은 황제를 적대하는 귀족파 중에서도 세력이 강했으니까. 그러다 다른 비밀도 알게 된 거다.”
“설마…….”
“맞아. 황후는 황제를 제거하려 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늘을 찌를 듯 노한 황제는 끔찍한 방법으로 황후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았다.”
“페트론 황자군요.”
문제는 그 방식이었다.
“황제는 페트론을 불러들여 황태자가 될 이는 너라며 달콤한 말을 해 댔지. 그에 힘입은 페트론은 어미에게 못 받은 사랑을 아비에게 받고자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참…… 지독하군요.”
“페트론은 온갖 방법으로 날 노렸다. 나만 제거되면 인정받을 수 있다 생각했을 거다. 그러다 암살에 거의 성공한 어느 날 황제는 움직였다.”
“……그 뒤는 안 들어도 알겠어요. 끔찍하네요.”
“황제는 그 일의 배후로 페트론을 지목했어. 증거도 가지고 있었다. 재판은 순식간에 끝났고 황후는 힘 한번 못 쓴 채 아들을 잃었어. 그 뒤로 황후는 조용해졌지만 나는 황실이 지긋지긋해졌다. 그래서 테사라는 성을 버리고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약조까지 한 뒤에 노헤스카의 양자가 되었지.”
그때의 일은 언제 떠올리든, 어느 날을 떠올리든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목숨을 걸고 치르는 전쟁, 황실에 치를 떨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공께서 훗날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잖아요.”
“황제도 그를 알아 한 인물을 내 약점으로 삼았다. 파르로시 테사, 황후의 딸이자 5황녀다.”
파르로시 테사는 황제의 자식 중 막내이자 황후와 같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로 유명했다.
갑작스러운 황녀의 등장에 나엘라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여졌다.
“그녀를 내 약점처럼 보이도록 움직였다. 그 당시 전쟁터에서 공적을 쌓고 있는 나 때문에 황제의 다음 목표물은 노헤스카 백작이었다. 무엇이든 황제가 안심할 수 있도록 약점 하나를 쥐여 줘야 했지.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그래서 파르로시 황녀를 아끼는 척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죄책감도 있었고.”
“페트론 황자에 대한 죄책감인가요?”
“그래. 그나마 남매 같던 이는 3황녀와 황태자뿐이지만 황제의 성정을 아는 만큼 어린 시절부터 극히 조심히 만나 왔네. 하지만 3황녀도 팔리듯 타국으로 간 뒤론 진짜 아끼는 이는 데테로아밖에 남지 않았지.”
또 튀어나온 다른 황녀의 등장에 나엘라의 고개는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
역린이니 뭐니 하며 주변에 아무도 없던 것처럼 굴더니, 그래도 꽤 아끼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이 정도의 무뚝뚝한 성격에서 멈춘 거겠지. 한 사람도 없었다면 성격파탄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3황녀면 다나한 오라버니를 따라다니던 황녀가 아닌가. 타국 왕족이랑 결혼했다더니 그게 팔려 갔던 거구나.
그래도 얼굴을 꽤 마주쳤던 사람이라 나엘라는 조금 심란해졌다.
“어쨌든, 그래서 황제를 몰아내고 황태자를 황제로 만들고 싶다 이 말씀이시죠?”
“이 정도면 나에 대해 다 안 것이나 다름없다.”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에게 체드란은 불쑥 물었다.
“그대는?”
“네?”
“그대의 어린 시절은 어땠지?”
눈을 깜박이던 나엘라는 어색하게 볼을 긁었다.
“아시다시피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의 사랑 속에서 자랐습니다. 검을 잡아 보니 제가 천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없이 기사를 선택했습니다. 이 재능을 썩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마호세르디의 다른 이들처럼 제스라 왕국과 크고 작은 전쟁을 겪었고, 지금은 당신과 결혼하여 대공가의 안주인이자 한 사내의 아내가 되었죠.”
체드란은 나엘라가 제대로 말해 줄 생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남의 가정사는 꼬치꼬치 캐물으며 흥미를 보이더니 자신의 얘기는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영악하긴.
하지만 체드란은 모른 척 넘어갔다. 절대 한 사내의 아내가 되었다는 말이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고 딱히 캐묻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많다. 언젠가는 자연히 알게 될 터였다.
“그렇군. 더 물을 것은 없나?”
“다행히 못된 황제에게 서신을 보낼 일은 없겠네요. 일단 저도 나름 정리를 하겠습니다. 그 뒤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그 이야기를 끝으로 둘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딱딱하던 나엘라의 말투가 어느새 부드러워진 것을 둘 다 깨닫지 못한 채로 세크게라인 후작에게 통보한 결투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내가 가르쳐 준 것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포츠사를 보던 나엘라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훈련을 버텨 낸 것을 자부심으로 삼게. 마호세르디의 기사들도 힘들어하던 것을 이겨 낸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엘라는 한쪽에 마련된 관람석으로 돌아갔다.
결투는 세크게라인 후작저의 연무장에서 이뤄졌다.
혹시나 익숙하던 연무장이 아니라 긴장했다는 핑계를 댈까 봐 정한 장소였고, 대공가의 기사들의 눈빛이 매서워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했다는 말을 할까 봐 일부러 소수의 인원으로만 방문했다.
연무장 한쪽에 마련된 자리로 돌아가자 먼저 앉아 있던 체드란이 고개를 돌렸다.
“긴장하지는 않았는가?”
“자신의 기사를 믿으셔야죠.”
“언제는 그대의 기사라더니.”
“대공과 대공비가 편을 갈라서야 되겠습니까. 저를 믿으신다면 그냥 두고 보세요. 무조건 이길 테니.”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느지막이 움직인 후작이 어느새 그들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그 뒤로는 컬을 과하게 넣고 머리를 틀어 올린 후작부인과, 어려 보이는 딸과 아들도 있었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쪽은…….”
부인과 자녀들을 소개하려는 후작에게 체드란은 됐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머쓱해진 후작이 착석하자 결투는 시작되었다.
“로한 제덴 경과 포츠사 하테못 남작 영식의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서서 서로에게 인사하십시오.”
세크게라인 기사단의 단장인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기사가 목소리를 높이자 로한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로한 제덴이다. 비록 이렇게 됐지만, 부끄럼 없는 결투를 바라지.”
“포츠사 하테못입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하자 포츠사가 살짝 움찔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로한이 힘을 꽉 주고 악수를 한 모양이었다.
뒤에 서 있던 지안도 눈치챘는지 끝까지 비겁한 놈이라며 나엘라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 자리로!”
로한과 포츠사가 세 걸음씩 떨어져 자리를 잡자 결투를 주관하던 기사가 시작을 알렸다.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로한이 땅을 박차며 포츠사에게 달려들었다.
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연무장을 울렸다. 이 결투 하나에 많은 것들이 달려 있어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