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챙─ 챙─
로한이 연속으로 검을 휘두르자 포츠사는 상대의 힘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검을 움직였다. 사브르에 비해 장검인 로한의 검이 받는 힘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힘의 우위는 확실해 보였다.
자꾸만 피해 내는 포츠사가 아니꼬웠는지 로한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츠사는 무너지기는커녕 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버텼다.
날과 날이 비벼지며 끄드득, 소리가 났다. 검날이 갈리는 소리에 포츠사가 바로 거리를 벌렸다.
갈수록 로한은 과격하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고 포츠사는 계속 거리를 벌리며 힘을 흘려보내기만 했다.
“음…… 언제까지 도망만 칠 예정인지.”
후작은 들으라는 양 무척이나 크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속으로 역시 정식 기사와 수습 기사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빤했다. 포츠사도 나엘라에게 고된 훈련을 받았는데, 로한이라고 안 그랬을까.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던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로한이 이겼을 때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런 후작의 표정을 보면서도 나엘라는 별 동요 없이 로한과 포츠사의 대결에 집중했다.
이 싸움의 승패는 바로 사브르가 될 것이다.
곧고 길지만, 양쪽에 날이 있어 찌르기와 베기가 동시에 가능한 사브르는 생김이 낯선 만큼 대응도 어렵다. 포츠사가 제대로 된 검술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 로한은 그저 힘이 약한 검이라고만 생각 중일 터.
사브르의 진짜 강점은 한순간에 대응할 틈도 없이 결판난다는 데 있었다.
오른쪽으로 다가오는 검을 방향대로 흘려보낸 포츠사가 다시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공격은 없고 방어와 회피만 있는 검술에 로한은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이었다. 왼쪽으로 치고 들어오던 검을 포츠사는 강한 힘을 주어 쳐 냈다.
반탄력으로 한쪽 손에 힘이 풀린 로한은 한순간에 양팔이 벌어졌다. 찰나에 품속을 내주게 된 로한이 깨닫기도 전에 결투는 끝났다.
포츠사는 반걸음을 내디디며 힘껏 팔을 뻗었다. 길고 얇은 사브르가 로한의 오른쪽 어깨 보호대 밑 틈을 파고들었다.
“아악─!!!”
로한의 비명과 함께 포츠사는 주저 없이 사브르를 뽑아내었다. 피가 분수처럼 연무장에 흩뿌려졌다.
“끄윽. 네, 네 놈이……!”
검을 휙 휘둘러 피를 털어 낸 포츠사가 로한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좋은 결투였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토벌전 이후가 되겠군요.”
후작이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손가락질을 하며 벌벌 떨었다.
“이, 이건 반칙……!”
“반칙?”
미간을 찌푸리는 체드란의 모습에 후작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토벌전 준비나 제대로 하게. 황제 폐하께는 내가 잘 말해 두겠으니.”
체드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엘라도 따라 일어섰다.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오는 포츠사에게 나엘라의 뒤에 서 있던 지안과 론체, 노헤스카의 기사들이 엄지를 척 내보였다. 자신도 자랑스러운지 포츠사는 밝게 웃었다.
잘 마무리한 포츠사를 보며 나엘라는 만족스런 웃음을 삼켰다. 이제는 자신의 용건만 남았다.
나엘라는 후작을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휩싸였다.
*
그날 저녁, 수도의 사교계까지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다음 날 저녁이 됐을 때는 이미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어머, 대공 전하께서 모든 전투에 나서시니 국경 주변의 가주들이 아주 편해졌나 봐요.”
“그러니 그런 조건을 걸고 결투를 건 것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노헤스카 대공가의 기사들은 정말 대단하네요. 수습 기사가 정식 기사를 이기다니.”
일 대 다수의 싸움, 세크게라인 기사들이 했던 모욕, 정식 기사와 수습 기사의 싸움은 사교계 사람들을 흔들어 놓았다.
어떤 이들은 국경의 영지들이 나태해졌다며 손가락질했고 어떤 이들은 노헤스카 대공가의 기사들을 드높여 칭찬했다.
거기다 그 차가운 마호세르디 공작이 사위를 자랑스러워했다는 이야기까지 돌기 시작해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커졌다.
가린에게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받던 나엘라에게서 흥얼흥얼 허밍이 새었다.
“음음~ 음~ 음음음~”
그녀의 반응에 체드란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직 황제에게 토벌권 양도에 관한 서신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니 소문을 빠르게 퍼트린 것이지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니 황제 폐하도 쉬이 거절하긴 어려우실 테니까요.”
“대신 황제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겠지. 우리는 아직 숨죽일 때다. 수도에 올라가지도 않았어.”
어느 순간부터 나엘라와 체드란이 ‘우리’가 된 것을 가린만 눈치챘다.
하지만 가린은 여느 때와 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까지 나섰잖아요. 이제 사람들은 조금씩 당신이 황제 측으로 돌아섰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겁니다. 아버지와 당신의 사이가 괜찮은 듯 보이니까요.”
“국경의 영지들이 지탄받고 있다.”
“그들도 한 번쯤 경각심을 가질 때가 됐습니다. 우리가 수도로 올라간 뒤에도 주변 영지들이 이 모양이면 어떻게 마음 편히 올라가겠습니까?”
“노헤스카의 가치가 너무 올라가면 황제의 견제를 받는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황제는 단제 오라버니의 목숨을 쥐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버지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대공께서 아버지와 친목을 두텁게 해 놓은 것처럼 보이면 찰나의 생각을 막을 작은 브레이크 정도는 되겠죠. 당신이 완전히 황제파가 되었다고 믿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리고 이 정도 이름을 높이는 건 주변 영주들과의 알력 싸움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차분한 나엘라의 목소리를 듣던 체드란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천재란 소리를 들었다고 했지.”
“네. 그랬죠.”
“그건 검술에서였나, 아니면 지략에서였나.”
“당연히 검술이죠. 지략이 대단하다는 소린 못 들었어요. 그저 나쁘지 않다는 정도?”
그저 나쁘지 않다는 정도라…….
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처음 검술 천재라 불렀던 이가 누구였나.”
“아버지셨어요. 그다음엔 오라버니들이었고, 그다음엔 기사들이요.”
“모두 검술이 천재라고 말했고?”
“네. 아버지께서 걱정이 심해 제가 나섰던 전투의 반은 사령관 막사에만 있었지만요.”
나엘라가 가진 문제의 원인과 이유를 체드란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중에 마호세르디 공작을 만나면 꼭 물어볼 것이 생겼다.
“아무튼, 이번 파티에서 대공께서는 저와 드레스 코드를 비슷하게 맞추는 걸 잊지 마세요.”
애초에 두 사람은 이것을 상의하려 마주한 참이다. 그러다 보고하러 들어온 가린과 타이밍이 맞아 체드란에게까지 사람들의 반응이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번 파티가 어디라고?”
“도이네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가든파티예요. 대공령과 가까운 영지 중 가장 큰 황제파죠.”
“그냥 대공저에서 파티를 열어 여러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어차피 대공저에서도 한 번 파티를 열어야 했다. 체드란의 생각엔 지금 개최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것보단 저희가 직접 가서 확실한 진로를 드러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대공저에서 여는 파티는 주변 영지들을 모두 불러 국경 영지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형태인 것이 낫습니다. 우리 저택이니 귀족파를 몰래 만나는 것도 용의하고, 국경 지대의 친목을 다진다는 명분이면 황제도 그리 큰 의심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의심은 놓지 않을 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의 큰 모임은 모두 의심하는 작자야.”
“어차피 받을 의심이면 당당하게 굴죠. 황제를 배신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떳떳하게 사람들을 만나겠다 이런 느낌으로.”
체드란은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사교계는 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사람 심리는 좀 압니다. 전쟁터는 온갖 군상의 모임이니까요.”
“아무튼, 재단사에게 그렇게 맞추라고 말해 놓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체드란에게 나엘라가 깜박한 것이 있다며 붙잡았다.
“제가 도이네 백작가에 참석한다는 서신을 보내자마자 주변 영지의 부인들이 수도에서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움직인다는 소문이 퍼져 버렸지 뭐예요?”
“…….”
“파티가 좀 많이 늘어나겠죠?”
“황제의 의심도 늘고 말이지.”
“이 정도는 괜찮다니까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토벌권 양도 서신, 아직 안 보내셨다고 하셨죠? 황제 폐하를 잘 달래 보세요.”
“퍽이나 달래지겠군.”
또, 또 말없이 사고를 쳤다. 사고 치기 전에 말해 준다던 사람은 어디 갔나?
“곧 다른 소문으로 덮어질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다른 소문?”
“로맨스가 필요하시다면서요?”
“로맨스?”
“자세한 것은 물론 비밀입니다.”
한숨을 푹 내쉰 체드란은 인장으로 봉인하려던 서신을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문득 세크게라인 후작과의 일을 호기심 가득 물어 오던 황태자의 서신도 생각났다. 역시 자신은 나엘라의 뒤처리 담당이 맞는 것 같았다.
찝찝한 얼굴로 방을 나서는 체드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곤 나엘라는 표정을 바꾸었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재빨리 가린에게 물었다.
“세크게라인 후작 일은?”
“마호세르디 공작님께 도움을 받아 은밀하게 사람을 풀었습니다. 며칠 후 뒷골목에서 평소 다니던 사창가의 가드들에게 두들겨 맞은 채 발견될 겁니다.”
“우리가 의심받을 확률은?”
“극히 적습니다. 미리 소문을 퍼트릴 자들도 포섭해 놨습니다. 세크게라인 후작은 이번 일로 후작 부인과 갈등이 생겼고, 기분을 풀러 사창가에 갔다가 술김에 난동을 일으킨 것으로 맞춰 놨습니다.”
“평소 다니던 곳인데 가드들이 그를 몰라봤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비는?”
“그 점을 이용해 후작 부인이 사주한 것처럼 몰아갈 예정입니다. 가드들이 후작의 정체를 몰랐을 리 없으나 막대한 돈을 받고 일을 벌인 후 도주했다고요.”
“토벌전은?”
“어차피 토벌전은 세크게라인의 기사단장이 지휘합니다. 가주와 상관없을 듯합니다.”
“후작은 평소 사창가에 갈 때 호위를 둘밖에 안 데려간다고 했던가?”
“믿는 곳이니까요.”
“믿는 곳에 발등 찍히는 일이란 이런 경우지. 본인도 다수에게 맞아 보면 알 수 있겠군. 미래에 기사가 될 우리 포츠사 경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말이야. 해당 기사들은?”
“한 번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의심받을 것 같아서 기간을 조금 두어 준비 중입니다. 세크게라인 후작과 같은 형태로요.”
“경계 대상에서 벗어나려면 한 달 정도는 벌려야겠군. 셋 다 한 달 차이로 벌리기엔 무리가 있으니 그 세 명과 다른 이들까지 묶어서 일을 처리해. 다른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우리가 의심받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세크게라인 기사들로 처리할 테니까요. 다 똑같은 이들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내가 내 사람이 아닌 자들에게까지 자비로울 필요는 없으니.”
적이라면 그들이 속한 곳 또한 적이 된다. 적과 함께하던 다른 이들에게 유하게 굴었다가 뒤통수를 맞고 내 사람을 잃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짓도 없다.
애초에 나엘라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베풀 자비는 있어도 적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적에게 악하게 굴기로 결정했다면 철저한 악이 되자는 주의였다.
“그나저나…….”
나엘라가 가만히 턱을 괴자 가린은 고요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시아버님, 의심이 너무 많으셔서 문제네.”
이럴 때의 나엘라는 수없이 많은 정보를 뒤섞으며 고려한다. 그 점을 잘 아는 가린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곁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