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유난히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에 나엘라는 번쩍 눈을 떴다. 입은 막혀 있었고 양팔과 발이 결박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고민하며 나엘라는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일전에 드레스 코드를 맞추기로 한 나엘라와 체드란은 서로의 눈 색과 같은 장신구를 옷에 달기로 했었다.
그래서 대공령의 시내 구경 좀 할 겸 놀러 나왔고, 나엘라와 지안, 제니, 호위 기사들은 수도에 납품할 정도로 유명하다던 디자이너의 가게로 향했다.
심드렁하게 장신구를 보던 나엘라는 일행들이 이것저것 살피는 틈을 타 잠시 바깥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때 납치된 모양이었다.
아이고,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지만 입이 막혀 새어 나가지는 않았다.
이건 철저하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혼자 그렇게 돌아다닐 거면 애초에 호위를 왜 데리고 나왔단 말인가.
그래도 나엘라는 본인 탓을 오래하기보단 실용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대낮에 시내 한복판에서 납치를 감행할 정도로 대담하게 움직일 자들이 몇이나 있을까.
최근부터 따지면 세크게라인 후작, 그로우 가소 백작가, 노헤스카의 적, 마호세르디의 적…….
많아도 너무 많았다.
원래도 적이 많은 마호세르디인데 노헤스카까지 합쳐지니 더 많아졌다.
그래도 마호세르디에 있을 적에는 늘 최전방을 오가는 처지라 긴장을 풀지 않았었는데. 여기 와서 조금 익숙해졌다고 그만 방심해 버렸다.
일단 혼자서 도망가든 누군가의 구출을 기다리든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마차가 멈추고 납치범들을 마주하면 배후나 좀 캐 봐야겠다.
이왕 벌어진 거 소득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오늘 시내에 나올 것을 이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도이네 백작 파티에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었으니 드레스나 장신구를 맞추러 나올 것을 예상하고 며칠 동안 대기했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대공저에 남겨 뒀던 첩자를 통해 이야기가 샌 것일 수도 있고.
전자라면 납치범들을 생포하여 일당들과 사주한 이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하고, 후자라면 어느 첩자가 어떤 정보를 듣고 말을 옮겼는지, 그 첩자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면 될 터였다.
어느덧 마차가 멈추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차 문이 벌컥 열리자, 역광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 위로 달이 떠 있었다. 달의 위치를 보아하니 아까 나왔을 때의 시간에서 이미 한나절은 지난 듯 보였다.
이쯤이면 대공가의 기사들도 수색을 끝내고 추격을 시작했을 시간이다. 나엘라는 좀 더 마음을 편히 먹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속도를 봐선 거의 따라잡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라면 조금 늦더라도 나엘라가 대공령 밖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시내 한복판에서 납치한다는 건 국경 지역의 삼엄한 경비와 꼼꼼한 출입 기록을 우습게 봤다는 거다.
“이리 나와.”
남자가 포대 자루를 옮기듯 마차 안에 쓰러져 있던 나엘라를 질질 끌고 나왔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눈을 가늘게 뜨니 곧 쓰러질 것 같은 통나무집과 그 주변을 밝힌 횃불들이 시야에 걸렸다.
나엘라를 짐처럼 질질 끌고 간 남자가 벌컥 문을 열자 안에는 구색만 갖춘 가구들과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남자 셋이 보였다.
“이 여자가 대공비야?”
“와, 예쁘기는 더럽게 예쁜데?”
“할 맛 좀 나겠네.”
나엘라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안에는 자신을 끌고 온 남자까지 모두 네 명. 무기만 제대로 있다면 상대할 수 있는 정도다. 모두 상대하는 것보단 최우선을 도주로 설정하면 더 쉬울 것이다.
문제는 무기인데…….
그 순간 남자가 집안 구석에 있던 침대로 나엘라를 던졌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묶여 있는 양 발목을 붙잡았다.
“우웁─!”
순간적으로 드는 불길한 생각에 몸부림치던 것도 잠시, 무언가 느낀 남자가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나엘라의 복부를 강타했다.
“읍─!”
제대로 명치를 맞는 바람에 온몸으로 퍼지는 고통을 삭이려 숨을 몰아쉴 때였다. 나엘라의 발목을 붙잡은 남자가 단번에 움직였다.
우드득─ 우드득─
양쪽 발목이 남자의 손에 모두 돌아가자 나엘라는 숨도 못 쉬고 바들바들 떨었다.
“기사라고 했다.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감시해.”
“예이─!”
“어우, 아무리 기사라도 연약한 아가씨 같은데 발목까지 꺾어 놓을 필요 있나.”
“만약을 위해서겄지, 뭐. 도주라도 하면 어쩔 거요.”
뼈가 돌아가는 엄청난 고통에 나엘라는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최대한 숨을 천천히 내쉬며 고통을 삭이고 있을 때 나엘라를 끌고 왔던 남자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놈은 진짜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놈이다. 도주를 대비하여 발목을 꺾어 놓는 것은 암살자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는 와중에도 나엘라는 발목이 깔끔하게 돌아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뼈만 잘 맞추면 회복은 빠를 것이다.
“후읍─ 읍─.”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부릅뜨는데 식탁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혀를 찼다.
“아이고, 예쁜 마나님이 왜 원한을 사서 이렇게 됐데.”
“내버려 둬. 높은 분들 사정이야, 우리가 알아서 뭐 해.”
“그나저나 차라리 노예로 팔아 버리지. 여기서 꼭 죽여야 하나? 보라색 눈동자는 정말 흔한 것이 아닌디.”
“모르지 나도. 우리야 돈만 받으면 끝 아닌가.”
“의뢰자도 대단하네. 엉망으로 만든 다음 죽이라고 했다며?”
“시체도 여기 버리고 가라던데?”
나엘라는 발목의 통증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놈들은 납치하여 어디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바로 처리할 목적인 것 같았다. 거기다 내용으로 유추해 보면 확실히 원한으로 인한 사주다.
시체도 버리고 가라는 것으로 봐선 엉망이 된 사체를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방식인 거다.
이런 수법은 가끔 전쟁에서도 쓰인다. 보통은 포로를 토막 내어 죽이고 적에게 보여 주어 사기를 꺾거나 분노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으니 빨리빨리 끝내자고.”
“아까 그놈은?”
“이따가 돌아온다는디. 시체 확인하러.”
나엘라는 어느새 가라앉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놈들을 훑어봤다.
허름한 행색에 말투도 경박하고 아무렇지 않게 떠들며 정보를 흘리고 있다. 이 세 놈은 아까 나간 놈처럼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놈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놈들은 버리는 패다.
훈련받은 그놈은 의뢰인이 따로 보낸 놈으로 벌써 도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일차적인 목적은 끝냈으니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을 테니.
“자자. 얼른 하고 가자고.”
남자 하나가 바지춤을 풀며 나엘라에게 다가가자 다른 남자들도 귀찮다는 듯 미적거리며 움직였다.
“근디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아가씨가 진짜 기사 맞는겨?”
“뭐, 희한한 취미가 있는 귀족 놈들도 있잖아?”
나엘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로우 영식 일로 소문이 났다고 해도 사람들은 나엘라가 기사라는 것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도로 확신한다는 것은 나엘라를 지켜봐 왔던 사람, 아마 저택의 첩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사주한 자는 대공가 저택에 첩자를 심어 놓은 데다 원한이 크다. 시체를 보여 줄 목적이라면 보통…… 체드란이나 마호세르디에 원한이 있다고 봐야 한다.
엉망이 된 나엘라의 시체에 분노할 사람을 찾자면 그 둘밖에 없을 테니.
“우와. 눈 한번 살벌하네.”
키득키득 웃던 남자가 드레스 멱살을 잡고 나엘라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잠깐만 실례합니다요.”
드드득─ 드레스의 재봉선이 터지며 찢겨 나가는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소리 한 번 안 지르네.”
“형님, 목소리 좀 듣고 싶은데 입이나 풀어 주죠.”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시체랑 하는 취미는 없는데.”
“이런 일 한두 번 합니까? 눈빛을 봐요. 저게 자살할 눈빛인가.”
남자의 거친 손길에 겨우 외면했던 발목이 욱신거렸다.
곧이어 입에 묶어 놨던 천이 떨어지고, 남자가 장난스럽게 나엘라의 뺨을 톡톡 쳤다.
“소리 내 봐.”
남자의 말에도 나엘라는 묵묵부답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이곳에서 나가면 네놈들의 목숨은 없다는 그런 마음을 담아서.
“하, 곧 죽을 년이 눈빛하고는. 목소리 한번 비싸네.”
조금 짜증이 났는지 나엘라의 머리채를 잡은 남자가 그대로 침대 헤드에 갖다 박았다.
쾅─!
“아이고 형님! 시체랑 하는 취미 없다면서요!”
주르륵 이마를 타고 떨어진 피가 눈에 들어갔는지 한쪽 시야가 흐릿해졌다.
머리는 위험한데……. 멍하니 생각하던 나엘라는 흐려지려던 의식을 꾸역꾸역 잡았다.
“이래도 비명 한 번 안 지르네?”
횃불을 가리고 선 남자 때문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나엘라는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했다.
마호세르디에서는 일부러 경비를 허술하게 둔 구역이 있다. 그쪽으로 유도해 범죄자의 도주 경로를 몇 군데로 압축하고 빠르게 잡기 위함이었다.
그런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수상한 자가 지나가면 경비대에 바로 보고하도록 훈련시켜 두었다.
그것은 노헤스카도 같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조치했으니까.
“마나님, 이제부터 우리가 뭘 할지 알고 있어?”
마호세르디도 자신이 생각해 내어 구축해 두었다. 심지어 경비병들의 교대 시간조차 허술한 새벽 시간대를 만들어 틈을 만들었다.
외벽과 내벽의 교대 시간을 교차하여 짜고 웬만한 첩자들은 들여보내도록 처리했다. 첩자의 양과 첩자들을 보내는 대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옷을 모두 찢고 우리 세 명이 돌아가며 무언가를 할 거야. 그게 뭘 거 같아?”
마호세르디의 철통 보안은 나엘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완벽한 보안은 없다고 생각하여 처음부터 틈을 만들어 이용했다.
이 사실을 론체에게 말했을 때 그는 일어나 손뼉까지 쳤다.
“우리 마나님, 남편에게 얼마나 사랑받았으려나?”
그랬던 자신이 납치범들에게 잡혀 있는 꼴이라니. 열세 살 때 감옥에서 첩자들을 구경한다고 난리 치다, 밧줄을 푼 첩자에게 되레 당했을 때 이후로 최고의 수치였다.
짜증이 몰려온 나엘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사주했지?”
나엘라의 목소리에 남자가 과장된 행동으로 손뼉을 쳤다.
“목소리 한번 듣기 어렵네. 그치? 열받게.”
짜악─ 남자가 거친 손으로 나엘라의 뺨을 때렸다.
“어차피 죽을 테니 알려 줄까?”
투둑─ 찌익─ 드레스가 아래부터 찢겨 올라가며 허벅지까지 단숨에 갈랐다.
“페르? 페란? 몽레는 확실하게 기억나네. 뭐 그런 이름이었어.”
페즈몽레 백작, 노헤스카의 가장 큰 가신 가문인 곳이다.
“거짓말이군.”
남자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뭔 개소리야?”
“네놈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사주한 놈이 거짓말을 했겠군.”
사주한 자들은 제 신분을 감추려고 하지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이놈들은 정말로 버리는 패라는 의미다.
어쩌면 일이 실패할 것까지 계산해 놨을지도 몰랐다.
페즈몽레 백작의 이름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이번 일을 사주한 놈은 체드란에게 원한을 가진 자다.
대공비를 죽이면 마호세르디와 사이가 틀어지리라 예상했을 것이고, 놈들에게 가짜 이름을 알려 주며 가장 큰 가신을 쳐 내려고 했다.
“근데 이년이……!”
남자가 나엘라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침대 헤드에 다시 한번 내리쳤다.
쿵─!
아까보다 더 많은 피가 나엘라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두 번은 진짜로 위험한데…….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제 위에 올라타는 남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