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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8)화 (28/220)

27화

“어디 한 번 다 끝나고도 그런 태도가 유지되는지 보자고.”

자신 위에 올라탄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니 두 남자도 바지춤을 풀며 다음 차례를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들의 옆으로 금이 간 얇은 유리창이 보였다.

유리창은 아주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닥으로부터 올라온 진동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바지를 내리던 남자가 나엘라를 바라봤다.

“돌아가면 다시 한번 기합을 줘야겠군. 이렇게 늦어서야…….”

“뭐라는 거야?”

멍청한 남자들은 진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만약에 내가 정말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여기서 살아 나간다고 치자.”

나엘라의 담담한 이야기에 남자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 나간다고 가정하는 그녀가 웃긴 모양이었다.

“죽을 것 같겠지. 나 자신이 수치스럽고 더러울 거다. 어쩌면 앞으로 남자와 두 번 다시 잠자리도 갖지 못할 테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

“곧 죽을 년이 말이 많구나.”

남자는 나엘라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발목을 묶어 놓은 끈이 거슬리는지 거칠게 손을 움직였다.

그 바람에 발목에서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이 올라왔다. 그런데도 나엘라는 담담히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심하면 자살 시도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죽지 않을 거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복수를 하고 이 사건을 덮을 만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꾸역꾸역 살아갈 거다.”

당연한 듯 삶을 얘기하는 나엘라를 보며 남자는 표정을 굳혔다.

“나는 나를 믿거든. 날 저택에 고이 모셔져 자란 귀족 영애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절대 나를 감당 못 해. 네놈을 놓친다 한들 찾아낼 거고, 여기 있던 놈들 하나하나 추적할 거다.”

평온하여 더 소름 돋는 목소리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남자는 갑자기 무언가 쫓기는 듯한 기분에 허겁지겁 움직였다.

“너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지옥을 보여 줄 거다. 네놈들 사지를 결박해 통 안에 가두고 그 안에 며칠을 굶은 쥐를 함께 넣을 거야. 배고픈 쥐가 네 살을 조금씩 파먹는 걸 직접 보게 될 거다.”

드레스를 올리는 남자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감은 좋은 모양인지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때부터는 아까보다 커진 땅의 진동을 느낀 것인지 다른 이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쥐뿐일 것 같나? 내가 진정 수많은 고문 방법을 모를 것 같나? 그 모든 일은 직접 내 손으로 할 거고 네가 죽어가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거다.”

나엘라는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여러 고문 방법을 듣기만 했지 실제로 행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그보다 더한 방법으로 복수해 줄 이들은 많았다.

“형, 형님…… 뭔가 이상합니다.”

나엘라의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가 겨우 돌아왔다. 눈을 깜박거리기도 힘들어 겨우 뜨고 있는 정도였다. 아까부터 흘린 피의 여파가 이제야 오는 것이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남자가 비웃었던 것처럼 나엘라도 비웃음을 돌려줬다. 감각이 잘 없어 제대로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표정을 보니 나쁘진 않았다.

밖에서는 어느새 진동의 원인이었던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게, 횃불을 환하게 켜 놓으면 어떡해. 누가 봐도 여기잖아.”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남자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횃불부터……!”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문짝이 통째로 날아갔다. 숨 막히는 정적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는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있었다.

나엘라가 질투했던 월등한 체격과 은색으로 빛나는 갑옷, 먼지와 함께 느리게 가라앉는 남색 망토까지.

정말 전쟁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완전 무장을 한 체드란은 처음이었다.

나엘라는 곧 멀어질 것 같은 정신을 마지막으로 붙잡으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깔끔하게 넘기던 백금발이 조금 흐트러져 이마를 가리고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안광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나엘라…….”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분노가 절절히 느껴지는 저음에 나엘라는 천천히 정신을 놓았다.

“저놈들의 사지를…….”

나엘라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며 피로 범벅되어 붉게 보이던 눈동자가 점차 사라졌다.

“사지를 찢어 놔야 하는데……. 오체분시…….”

나엘라를 향해 뛰어가려던 체드란은 마지막 말에 살짝 멈칫했다.

분노는 여전했지만 애매하게 분위기가 식고 있었다.

*

나엘라는 며칠 동안 앓아누웠다. 독감이라도 걸린 듯 열이 내려가지 않았고 온몸이 다 아팠다.

그녀를 진찰하던 의원은 미묘한 얼굴로 체드란에게 병명을 읊었다.

“그게…… ‘스트레스성 신체화 장애’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차갑게 굳은 얼굴과 압도적인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어마어마해 의원은 땀을 뻘뻘 흘렸다.

문제는 그렇게 노려보는 이가 체드란만이 아니었단 사실이다. 하녀들부터 시작해서 집사장, 기사단장 등 침실 안에 한가득했다.

“쉽게 말해 화병입니다. 울화병이라고도 하지요.”

열받아서 앓아누웠다는 이야기다. 나엘라의 성격상 납치되고 아무것도 못 한 채 상처만 입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군…….”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복을 돕는 약을 드릴 테니 식후에 꼬박꼬박 챙겨 드시면 됩니다. 피를 좀 많이 흘리신 것 빼고는 기억에도 이상이 없으시고 발목도 깔끔하게 붙을 것 같습니다.”

“알겠다. 그만 나가 보도록.”

의원이 고개를 숙이고 침실을 나가자 지안이 머리를 감싸 쥔 채 잠시 비틀거렸다. 놀란 마든이 얼른 팔을 뻗자 지안은 도끼눈을 뜨곤 차갑게 그의 손을 쳐 냈다.

“나엘라 님은 저희가 보필하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조금 쉬시지요.”

그만 돌아갈 것을 권해 오는 제니의 말에 체드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며칠 동안 저택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엘라가 사라지자 지안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그나마 침착한 제니가 저택으로 돌아와 론체와 체드론에게 알리며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 받은 수색대가 시내를 쥐 잡듯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론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엘라가 조치했던 도주로들을 살폈다.

그중의 하나, 수상한 곳이 눈에 띄어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출동해 대공령 너머 예상 경로를 짜고 추격을 이어 갔다.

천만다행으로 늦지 않게 도착한 것 같았지만 소득은 전무했다. 범인 중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것 같다는 놈은 놓쳤고 나머지 세 놈은 아는 것이 없었다.

다음 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 나엘라는 억, 소리와 함께 목덜미를 붙잡고 기절했다. 부러진 곳에서 올라오는 열과 뒤집어진 속에서 올라온 울분으로 며칠 내리 앓기 시작했다.

대공저 안에 꼬리가 있었음을 깨달은 체드란은 모든 첩자를 잡아 와 밤새 심문을 이어 갔지만 아직 소득이 없었다.

첩자들은 하나같이 나엘라가 시내에 나간 것을 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일로 이중첩자는커녕 첩자의 씨가 말랐다. 더 문제가 있다면 소득도 없다는 점이었다.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체드란은 틈틈이 나엘라를 찾았다. 누워서 끙끙 앓는 나엘라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중간중간 살벌한 욕을 중얼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신기하군.”

“뭐가 말입니까?”

뚜벅뚜벅 걷는 체드란에게 따라 붙은 마든이 물었다.

“그 대공비가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말이다.”

나엘라가 누워 있는 것이 영 어색했다. 과감한 행동력으로 늘 생기가 넘치고 항상 어떤 꿍꿍이를 품은 듯한 나엘라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대공비 전하께서도 사람이시니까요.”

잠깐 멈칫한 체드란이 이상한 눈으로 마든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공비는 원래 사람이었다. 그대의 눈에는 사람이 아니었나 보군.”

편을 들어 줘도 난리다. 마든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체드란은 돌아보지 않았다.

“뼈에 좋은 음식을 알아봐.”

“스트레스에 좋은 음식은요?”

“대공비는 기사다. 발목이 제대로 낫지 않으면 앞으로 검을 쓸 때 무리가 올 거다.”

“그럼 뼈에 좋은 음식만 찾아보겠습니다.”

결국, 체드란은 걸음을 멈추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마든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스트레스에 좋은 음식도 준비해야지.”

그 말과 함께 휙 몸을 돌려 혼자 걸어가는 게 아닌가.

그 뒷모습을 마든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

나엘라는 일주일간 푹 쉬고 조금 나아진 몸을 베개에 기대며 팔짱을 끼었다. 차분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주시하며 전속 하녀 네 명이 주르륵 서 있었다.

“한 명씩 시작해.”

그녀의 말에 가린부터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 페즈몽레 백작을 조사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2주일 동안의 행적은 깨끗합니다. 대부분 저택에서 지냈으며 수상한 이가 왔다 간 흔적도 없다고 합니다. 주변 영지 몇 군데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입니다. 귀족파, 황제파 할 것 없이 의심 가는 자가 없습니다.”

하녀들이 나엘라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이유는 마호세르디의 첩자들이 사방에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첩자전으로는 황제에 뒤지지 않는 가문이기에 웬만한 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손바닥 안이었다.

다음으로는 제니가 나섰다.

“기사들 사이에 첩자가 있을지 몰라 반트모어 경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곧 하반기 기사 시험이 시작되기도 하고 개인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라 말씀하시기에 마호세르디 방식의 기사단 개편을 추천했습니다. 대대적인 개편이 시작되면 개인 면담과 평가가 동시에 진행되니 첩자를 캐 낼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반트모어 경은 대공 전하께 보고드린 후 진행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럼 기사들 사이의 첩자가 확인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거군.”

이어서 지안이 말했다.

“납치범들의 심문에 참여해 본 결과 나엘라 님이 말씀하셨던 자는 아무래도 의뢰인이 따로 고용한 암살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세 명과는 이 일로 만난 사이며 의뢰인이 같이 움직이라고 했답니다.”

“문제는 그자가 나를 그놈들에게 넘겨주고 바로 사라졌다는 거다.”

“애초에 나엘라 님의 죽음까지 확인할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남아 있다가는 덜미를 잡힐 가능성도 크다 판단한 듯합니다. 그놈들이 정말 버린 패이기에 실패해도 그만, 성공해도 그만이라는 생각도 있었던 듯싶습니다.”

“그런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내가 굳이 죽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지 않은가.”

“그날 대공 전하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셨다면 나엘라 님을 욕보였겠죠. 그렇다면 어떻게든 대공께 타격이 왔을 겁니다. 마호세르디와의 관계도 장담할 수 없고요.”

“그럼 일단 대공의 원한 상대인 걸로 생각하고 움직여야겠군.”

나엘라는 마지막 하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엘라의 전속 하녀 중 가장 존재감이 없는 이, 그리고 가장 나엘라와 붙어 있지 않은 하녀였다.

“프리야.”

프리야가 고개를 들자 늘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흩어졌다.

“곧 염색해야겠군.”

갈색 머리 위로 희끗희끗하게 보이기 시작한 금발에 프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꺼운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프리야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황제는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굳이 나엘라 님을 건드려서 얻을 이득이 없어요.”

옥구슬처럼 굴러가는 미성에 나엘라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겐 노헤스카가 마호세르디를 따라 황제의 측근이 되는 것이 더 나았다. 페즈몽레 백작을 쳐 노헤스카의 세력을 줄일 순 있지만, 굳이 나엘라를 건들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만약 나엘라가 목숨을 잃기라도 했다면 마호세르디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약점은 쥐고 있을 때 이득인 법. 없애면 오히려 손해다.

“이해득실만 따진다면…….”

프리야가 두꺼운 화장으로 만들어 놓은 주근깨가 콕콕 박힌 볼을 긁적거렸다.

“이해득실만 따진다면 딱히 이 정도까지 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원한으로 따진다면…….”

나엘라와 다른 이들의 시선이 모이자 프리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후와 황후의 가문, 혹은 파르로시 황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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