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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9)화 (29/220)

Chapter 4. 참아야 할 때

28화

갑작스러운 이름에 나엘라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황후와 그녀의 가문은 대공에게 원한이 있겠지. 페트론 황자의 일로 아들을 잃었고 황제에게 직접 목줄이 채워진 계기니까. 그런데…… 파르로시 황녀?”

“그녀의 원한은 대공을 향한 원한이 아닙니다. 나엘라 님을 향한 원한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황녀의 어머니인 황후가 도왔다면 은근슬쩍 페즈몽레 백작을 팔아 세력을 줄이려 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나에 대한 원한?”

“은밀하게 들리는 이야기로는…….”

프리야가 이를 어찌 얘기해야 하는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파르로시 황녀가 대공 전하께 보이는 집착이 보통이 아니랍니다.”

“집착?”

“어린 시절부터 그나마 황녀를 챙기던 사람이 대공 전하밖에 없었답니다. 정확한 사연은 모르지만 조금씩 애정을 갈구하던 수준에서 나중에는 극단적인 집착으로 변모했다 들었습니다. 황후가 워낙 쉬쉬하고 있어 아는 이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나엘라의 머릿속에 문득 체드란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그래서 파르로시 황녀를 아끼는 척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죄책감도 있었고.”

황제에게 약점을 쥐여 주기 위해 파르로시 황녀를 아끼는 척했다고 말했던가?

나엘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껴? 저 무뚝뚝한 남자가?

아무리 척이라지만 체드란이 누군가에게 다정히 대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됐다.

“집착이라…….”

남편을 향한 시누이의 집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파르로시 황녀가 사주한 것이고 정말 황후가 도운 것이라면…….”

“조용하던 황후가 다시 움직이는 걸까요?”

“마호세르디 때문에 대공의 권력이 커질 것 같으니 손을 썼을 수도 있지. 조용히 있다고 원한을 잊은 건 아닐 테니. 문제야. 정말 황후가 움직인 거라면 이번엔 황제를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렇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황후는 황제를 향한 원한이 가장 클 테니까요.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를 동시에 노릴 수도 있겠네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복수이고, 그동안 기회를 노린 것이라면 이번엔 완전히 무너지더라도 끝장을 보겠다 각오했을 수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나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수도로 가기 전까진 황실을 건드려선 안 돼. 일단은 아버지에게 부탁해야겠군.”

마호세르디 공작이 나서 딸의 납치범들을 잡아 달라 호소하면 이번 일은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이목이 쏠릴 테니 잠깐이라도 황후의 발목을 붙들 수 있다.

황후도 오랜 시간 기다린 만큼 조급하게 바로 나엘라를 노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전을 기할 테니.

어떤 가정이든 확실한 것은 없지만 나엘라는 황후와 파르로시 황녀의 이름에서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곳이 맞다며 온몸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정말 황실의 움직임이라면 발목을 잡는 선에서 당분간 덮어 놔야 한다.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

“덮어야지. 당분간은 내가 더 조심하는 게 낫겠네. 이 일을 정리해서 아버지께 서신을 보내 줘.”

앞에 서 있는 이들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만전을 기하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프리야.”

두꺼운 안경 너머 자리한 프리야의 갈색 눈동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엘라는 잘 안다.

“절대 내 명령 없이 함부로 움직이지 마. 특히 황실의 일은.”

프리야가 배시시 웃자 함께 눈길을 받은 지안이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일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지 잊지 마. 그 목숨이 모두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고개를 끄덕인 이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던 나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들을 사람들한테 해야지. 참 의미 없는 경고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엘라는 두 달을 꼼짝 없이 저택에 갇혀 있어야 했다.

본인 스스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발목이 완전히 아물고 걸어도 무리가 없으리란 판단이 들기까지만도 두 달이었다.

의원은 완벽하게 돌아온 것은 아니란 경고와 함께 앞으로 한 달 정도만 꾸준히 관리해 준다면 전과 다를 것은 없다고도 말했다.

그사이에 나엘라에게 생긴 변화라고는 체드란과의 관계였다.

“조금 더 먹어야겠군.”

체드란과 나엘라는 저녁 식사를 같이하고 시간이 맞을 때면 정원에서 차 한잔 정도는 함께했다.

“그 정도 영양으로는 척박한 환경의 전쟁터에서 제일 먼저 쓰러질 것이다.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어 둬야 하지 않겠나.”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전쟁에 나갈 일이 없는 대공비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라 말을 삼켜 내었다.

“그렇군요. 그럼 조금 더 먹도록 하죠.”

심지어 긍정하는 나엘라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신음이 깊어졌다. 본인도 전쟁에 나갈 일을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체드란의 손짓에 하녀 하나가 어린 송아지 고기를 잘라 나엘라의 앞에 놓았다.

고기를 입에 넣는 나엘라를 보던 체드란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들을 꺼내었다.

“다치기 전에 가려던 파티가 도이네 백작가의 주최였다. 맞나?”

“가든파티였고 근처의 가장 큰 황제파죠. 얼마 전에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기에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래서였군. 도이네 백작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무슨 파티죠?”

“이유는 없어. 백작 부인이 아닌 도이네 백작이 직접 초대하는 파티야.”

“음…… 그게 따로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사교계는 나엘라에겐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그때그때 묻는 편이 나았다. 다행인 점은 체드란이 황실에 있었단 점이다. 기본적인 교양은 정확히 익히고 있을 터였다.

“가든파티나 사교 파티처럼 이름을 붙이지 않는 파티는 대체로 초대한 가장 윗사람을 대접하는 의미로 본다. 대접할 상대는 가주가 집적 초대하는 것이 예의고.”

“그럼 우리에게 환심을 사고 싶단 이야기겠네요?”

“그렇지. 저번 파티가 무산되기도 했고 그대도 첫 사교 파티를 도이네 백작으로 잡으려고 했으니, 아예 그대가 황제 측 사람임을 알리며 친목을 다지겠다는 말이지.”

“확실히 사교계는 초대만으로도 복잡하게 뜻을 드러내네요.”

“사교계는 원래 복잡한 곳이니까. 그런 의미로 그대에게 줄 것이 있다.”

체드란이 마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의미를 눈치챈 듯 마든은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었다.

대기 중이던 하인이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고급스러운 보석함을 조심히 선보였다. 보석함만도 저만한데 안에 든 것은 얼마나 고가일까.

앞에 놓인 상자를 나엘라는 살며시 열었다.

“빛깔, 투명도, 경도가 모두 최상인 보라색 사파이어와 로돌라이트 가넷이다. 세공 또한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장인이 했지.”

보석함 안에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커다란 보라색 사파이어를 다각형의 은색 선들이 교차하여 감싸고 있었고, 거미줄처럼 얽힌 선들 사이엔 작은 로돌라이트 가넷들이 세공되어 있었다.

은색 목걸이 줄을 제외한 크고 작은 보석들이 모두 보라색이었다.

“보라색 사파이어는 사파이어 중 가장 희귀하며 목표를 이루도록 돕고, 타성에 휩쓸리지 않도록 돌본다고 하지. 재난에서 지켜 준다고도 하고.”

나엘라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자 체드란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로돌라이트 가넷은 악몽을 물리치는 보석이다.”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악몽을 꾸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원래는 서로의 눈 색을 장신구로 하기로 했잖아요.”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장신구를 맞추려 했던 건 어차피 서로의 사이가 돈독하다 내비치려던 것이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

“사이가 돈독한 것보다는 애처가라는 소문이 낫겠지. 내 예복 커프스단추나 망토 고정핀에도 자수정이 들어갈 것이다.”

“자수정이요? 애처가도 나쁘진 않죠. 소문은 과한 느낌이 있어야 믿는 이가 더 많아질 테니. 그런데 자수정에도 무슨 뜻이 있나요?”

“술에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지.”

나엘라의 표정이 의아해졌지만, 체드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튼, 집안일로 고생한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니 마다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는 손끝으로 목걸이를 쓸어 보았다. 커다란 보라색 사파이어보다 알이 작은 여러 개의 로돌라이트 가넷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악몽을 물리치는 보석.

어감이 좋아서인지 잔잔한 파동이 밀려왔다.

“식사 계속하지.”

마든이 닫은 보석함을 지안에게 건네자 식사가 다시 이어졌다.

송아지 고기를 잘게 썰어 입에 넣는 나엘라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나엘라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보석함을 빤히 바라보았다.

“악몽을 물리치는 보석이면 잘 때 착용하고 자야 하는 건가?”

그 말에 질겁한 제니가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침대와 가까운 곳에 보관하세요. 이 화려한 목걸이를 어떻게 하고 주무시려고요?”

“역시 좀 그렇지?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놔 줘.”

“네. 그나저나 대공 전하의 감각이 좋으시네요.”

“로돌라이트 가넷 때문에? 내가 악몽을 꾸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집사장이랑 습관이 비슷하니 아셨을 수 있죠. 아니면 악몽을 꾸신 날이면 저희가 안달하는 걸 여러 번 목격하셨잖아요. 그걸로 알아채셨을 수도 있고요.”

체드란이 알게 된 이유는 제니의 말처럼 주변 이들 때문이었다. 나엘라가 악몽을 꾸면 전속 하녀들이 부산스러워졌고, 그걸 본 다른 이들이 마든에게 전한 것이다.

악몽을 알아챈 것은 마든이지만 그 덕에 나엘라는 가장 의미 있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

“대공 전하가 센스 있는 건 의외인데.”

“자수정만 봐도 보통 센스는 아니시던데요?”

“자수정? 자수정이 왜?”

“나엘라 님은 보석에 관심 없으시니 잘 모르시겠지만, 자수정에는 전설 같은 게 있죠.”

“무슨 전설?”

“옛날에 달의 여신을 사랑한 술의 신이 있었대요. 하지만 여신은 냉담했고 그에 분노한 술의 신이 그녀의 신전에 저주를 내렸답니다. 여신의 신전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자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리라고요.”

“사랑을 안 받아 준다고 저주를 내렸다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나엘라는 질색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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