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옛날이야기들이 다 그렇죠, 뭐. 아무튼, 하필 그때 신전을 나오던 어린 소녀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고 해요. 그 모습에 마음이 급해진 달의 여신은 소녀를 돌멩이로 만들어 버렸고, 술의 신은 제가 건 저주를 후회하며 돌 위로 포도주를 부었다 합니다. 그러자 보랏빛 자수정이 되었고요.”
“그럼…… 자수정은 억울한 어린 소녀라는 뜻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보석을 가장 큰 사치품이라 여기는 귀족들이 그런 뜻을 좋아할 리 없으니까요. 그런 전설로 인해 자수정을 들고 있으면 술에 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귀족들의 생각이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런데 자수정에는 다른 뜻도 있어요. 하늘과 인간을 잇는 보석이라고 하죠. 그래서 주교나 교황이 반지로 만들거나 잔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 외의 가장 중요한 뜻은 역시 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
그제야 나엘라는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뜻이 있었으면 진즉 말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뜬금없이 술에 취하지 않는 보석은 뭔 소용인지 모르겠다.
“그럼 대공이 차고 있는 자수정은 나를 표함과 동시에 승리를 상징하겠네.”
“그렇죠. 보석 선택을 매우 탁월하게 하셨네요.”
나엘라는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했다. 체드란이 저런 센스를 가졌을 줄이야.
왠지 그가 직접 고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갔다.
제니는 그런 나엘라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랑과 관련된 전설을 가진 보석은 희귀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뜻이 하나 더 있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아무래도 대공의 몫이기도 했고, 그도 정확히 그 뜻을 알고 준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잠자리를 봐 드리겠습니다.”
제니가 조용히 물러나는 그 순간에도 나엘라의 시선은 작은 로돌라이트 가넷에 머물러 있었다.
*
과거, 나엘라가 한참 검에 빠져 잠자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훈련장에서 보냈던 적이 있었다.
“마호세르디 영애.”
누군가의 부름에 나엘라는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가 인상을 확 구겼다. 그곳에는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걸어오는 여자와 미안하다는 듯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마호세르디의 연무장은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딱딱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3황녀 지엘라 테사는 싱긋 웃었다.
눈부시게 흘러내리는 백금발과 크고 동그란 갈색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 웃으니 힐끗힐끗 쳐다보던 기사 몇이 얼굴을 붉혔다.
“오랜만에 보는데 인사조차 없다니, 서운하네요. 훈련하느라 바쁘다는 건 알지만 시간 좀 내주세요.”
가볍게 들리는 말투완 달리 황녀에게 인사부터 하라는 살벌한 경고였다.
나엘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엘라를 만나고 나면 이 돌려 말하는 화법으로 인해 몹시 피곤해지곤 했다.
“3황녀 지엘라 테사 님을 뵙습니다.”
“어머, 마호세르디 영애는 역시 자유로운 분인 것 같아요. 내게도 그리 편하게 대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예법에 맞게 다시 인사하라는 말을 모른 척하며 대충 넘어간 나엘라는 대신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를 노려보았다.
“시론 경은 왜 황녀님과 함께 있지? 지금은 훈련 시간일 텐데.”
에스토 시론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올려 보였다. 곱슬거리는 그의 갈색 머리가 부드럽게 흩어졌다.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오히려 뻔뻔하게 보이기도 했다.
“제가 부탁드렸답니다.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께서 잠시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우셨기에 연무장 구경을 시켜 달라고 졸랐어요.”
“기사단의 부단장은 저택을 안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이 바빠 부단장인 시론 경이 대신 저를 호위하는 수고를 해 주셨어요. 아니면 마호세르디 영애께서 저를 안내해 주실 순 없을까요? 그럼 참 좋을 텐데.”
저택의 안내는 저택 주인이 하는 게 당연하다. 속으로 뜨끔한 나엘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훈련에 빠진 에스토를 타박하려다 오히려 한 방 먹었다. 본전도 못 찾은 셈이다.
“연무장에는 황녀님이 구경하실 만한 것들이 없으실 텐데요. 무슨 일이십니까?”
“너무 심심해서요.”
웃기시네.
나엘라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조금 전 다나한이 연무장 끝에 있는 기사단장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보고 싶은데 단장 집무실까지는 못 들어가니 오라버니가 나올 시간에 맞춰 연무장으로 온 것이겠지.
“그나저나 영애의 검은 언제 보아도 참 곧네요.”
나엘라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검은 온갖 사람에게 배운 검술이 섞여 있었다. 좋게 말하면 변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오로지 급소만을 노리는 기사답지 못한 검술이었다.
그런 검이 곧을 리가 있겠나.
“좋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머? 하나도 안 믿는 표정이네. 나는 검술에 문외한이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마호세르디의 사람들을 보면 느껴지는 게 있어요. 그대들은 참으로 곧고, 또 다정합니다.”
나엘라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다정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엘라가 유일했다.
하긴, 다나한조차 다정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정할지도 모르겠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는 에스토에게 나엘라가 냉기 서린 시선을 보냈다. 뭐 하러 황녀를 여기까지 데려왔냐는 분노도 얹었다.
“황녀님, 아무래도 훈련 시간이니 검이 날아오거나 못 볼 꼴을 보시게 될 수 있습니다. 그만 들어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하녀들이 심장을 쥐고 쓰러진다는 에스토의 전매특허, 아이스크림 같은 웃음이 얼굴에 떠올랐다. 사르륵 녹아내릴 것 같다나 어쩐다나.
하지만 에스토의 앞에 있는 것은 나엘라가 유일하게 힘들어하는 3황녀 지엘라였다.
“검이 날아오다니, 무슨 그런 농담을 하세요. 시론 경도 참. 기사가 검을 놓치는 일만큼 수치스러운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답니다.”
“그…… 여기는 아직 검술이 익숙지 않은 수습 기사들도 많습니다.”
“그럴 땐 당연히 영애께서 지켜 주시겠죠.”
“예? 왜 제가 아니라 나엘라입니까?”
“두 분이 친구라더니, 이름으로 부르는 사이인가 보네요.”
황녀가 돌아가면 에스토를 죽이겠다고 나엘라는 다짐했다. 에스토는 지금 황녀에게 나엘라를 놀릴 수 있는 정보 하나를 안겨 준 꼴이었다.
“아무튼, 두 분 중에 더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영애 아닌가요? 시론 경은 영애에게 한 번도 못 이겼다고 들었는데. 저도 은근 귀가 밝답니다.”
누가 황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한단 말인가.
보안을 위해 마호세르디를 몇 차례 뒤집었음에도 누군가 외부인에게 이야기를 전한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 그럽니까? 물론 한 번도 못 이긴 건 맞지만 아주 비등비등한 실력입니다.”
한심하다는 나엘라의 시선을 무시한 에스토는 억울하다며 외쳤다.
“그거야 당연히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께서 그러셨죠. 설마 마호세르디 경이 거짓말을 했으려고요.”
적은 역시 내부에 있었다.
기사의 실력을 함부로 공개하는 것은 보안에 아주 심각한 문제다.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을 모두 혼내야 한다는 생각에 나엘라는 머리가 다 아팠다.
“그래도 위험하니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황녀를 저택까지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엘라는 검을 집어넣었다.
“이런, 조금 더 구경하고 싶은데.”
“다나한 오라버니를 뵙고 싶은 거라면 시론 경을 시켜 바로 저택으로 오라 전하겠습니다.”
“정말 구경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지엘라의 표정에 나엘라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들의 훈련은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거기다 마호세르디 기사단의 훈련은 안보와 관련되어 있어서 공개하기가 어렵습니다.”
“솔직히 재밌지는 않죠.”
“그러니 돌아가시죠.”
“그런데 공기가 좋아요.”
“공기요?”
지엘라는 싱긋 웃었다.
“지긋지긋한 사교계랑은 다른 공기잖아요. 이곳은 깨끗하고 곧고, 기사들의 신념 같은 것들이 느껴지니까요.”
나엘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파티에는 향초 같은 것을 많이 피워서 어지럽다는 이야기인가?
“영애는 이해할 수 없겠네요. 그런 것이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영애의 신념은 무엇인가요?”
“신념이요?”
“기사마다 저마다의 신념이 있던데요.”
나엘라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평상시의 지엘라도 어렵지만, 이렇게 진지한 지엘라는 더 어렵다.
“저는 딱히 특별하지 않습니다.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겁니다.”
“다나한 경과 같은 대답이네요. 그런데…… 만약 그 소중한 사람이 영애를 배신한다면요?”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어딘지 모르게 간절한 지엘라의 눈빛을 보니 진지하게 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자의 검이 어디로 향했는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제 소중한 사람들을 해친 거라면 더는 제 사람이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 길을 존중할 겁니다.”
지엘라는 한참 동안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요동치더니 깜박임 몇 번에 가라앉았다.
“부럽습니다, 영애가. 시론 경처럼 전쟁터에서 등을 맡길 친구가 있다는 것도, 소중한 사람을 소중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미소가 아릿했다.
하지만 그 아릿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저 멀리서 볼일을 끝낸 다나한이 걸어오고 있었다.
“마호세르디 경.”
연무장에 지엘라가 있는 것에 놀란 다나한이 모여 있는 에스토와 나엘라를 슬쩍 훑었다.
“왜 여기 계십니까?”
“영애를 보러 왔답니다. 마침 인사를 마치고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 차라도 마시려 했는데, 경과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지엘라가 전에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다나한은 그런 지엘라를 어색해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얼떨결에 함께 저택으로 끌려가게 생긴 나엘라만 와락 인상을 구겼다.
“나는 너의 그런 신념이 좋다.”
나엘라는 어깨에 턱 올라온 에스토의 손을 쳐 내며 얘는 또 왜 이러냐는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오랜 친구임을 증명하듯 에스토는 아랑곳 않고 사르륵 웃었다.
“너는 너의 신념대로 살아. 널 배신한 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무래도 다 같이 뭘 잘못 먹은 모양이었다.
지엘라도 에스토도 의미 없는 소리를 해 대는 이상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