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31)화 (31/220)

30화

“윽……!”

나엘라가 벌떡 일어나자 놀란 지안이 황급히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예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이제야 지엘라의 말이 조금 이해가 갔다.

“부럽습니다, 영애가. 시론 경처럼 전쟁터에서 등을 맡길 친구가 있다는 것도, 소중한 사람을 소중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체드란과 데테로아 황태자의 이야기였나 보다.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다 말하지 못했다고 했으니.

황실에서 하루하루 살아남아야 했던 그녀에게는 마호세르디가 숨구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의 첩자도 없는 그곳은 지엘라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었을 테니.

“나엘라 님, 괜찮습니다. 천천히 숨 쉬세요.”

나엘라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나 숨 쉬고 있어.”

“네네. 아주 완벽히 잘하고 계세요.”

“악몽 아니었는데.”

“그럼요. 악몽이 아닙니다. 그냥 개꿈이니 잊어버리세요.”

나엘라의 하녀가 유별나다고 다른 사람들이 목소리 높여 주장해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악몽 아니었는데. 지안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과거의 꿈치고는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꿈이었다.

“여기, 물을 가져왔습니다.”

가린까지 척척 손 씻을 물과 마실 물, 향유를 건넸다.

“후우, 정말 악몽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엘라가 피곤하다는 듯 손을 내젓자 미심쩍은 표정의 지안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정말 악몽이 아니라고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정말 아니야.”

“저는 다 알아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셔야 해요.”

“다 아는데 왜 자꾸 물어. 정말 괜찮아.”

나엘라의 전신을 훑어보던 지안은 그제야 의심을 좀 덜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에요. 도이네 백작가 파티 건으로 아침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면 큰일이니까요.”

“아, 맞다. 오늘이지.”

“깜박 잊으셨어요?”

“아까 꿈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역시 악몽이시죠?!”

와락 터진 소리에 나엘라는 미간을 찡그렸다. 꿈 때문이 아니라 지안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아질 것 같았다.

극성을 부리는 지안에게 옮아 덩달아 제니, 프리야, 마든과 하녀장까지 달려와 부산을 떨었다. 그 바람에 파티 장소로 향하는 직전까지 시달려야 했다.

쏟아지는 걱정과 염려 속에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파티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나엘라는 목에 선물 받은 목걸이를 걸었다. 목걸이를 강조하기 위해 검은 머리는 하나로 틀어 올렸고, 어깨에는 속이 훤히 비치는 시폰 재질의 숄을 걸쳤다.

쇄골에는 작게 갈은 진주를, 숄에는 손톱보다 작은 보석들을 달아 놓으니 화사하게 반짝였다. 마치 걸어 다니는 커다란 보석이 따로 없었다.

물론 나엘라의 개인적인 평을 들은 지안은 한참 동안 떠나가라 웃어 댔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엘라가 1층 로비로 내려가니 체드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복 형식으로 나온 듯한 검은색의 기사단 정복을 차려입고 그 위에 두툼하고 긴 망토까지 두르자 한 마리의 표범 같았다.

온통 검은색 일색이라선지 망토의 양쪽을 연결하며 가슴을 지나가는 체인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은색의 체인 사이에 세밀하게 세공된 자수정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악몽을 꿨다고?”

도끼눈이 된 나엘라가 범인을 찾는 듯한 눈으로 사람들을 훑자 마든이 눈길을 피했다.

“악몽 아니었습니다.”

“목걸이를 차고 자지 그랬나. 아니면 주먹만큼 커다란 로돌라이트 가넷을 찾아야 하나.”

도대체 나엘라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다.

“아주 가득 찾아 주세요. 침대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게.”

“그러지. 한번 찾아보겠다.”

농담도 통하지 않았다. 나엘라는 그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러다 가기 전에 진을 다 뺄 판이다.

“그만 가도록 하지.”

에스코트를 위해 체드란이 손을 내밀었다. 나엘라는 단단하고 커다란 손을 가만 보다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대공 부부의 공식적인 첫 외출이었다.

*

국경 근처의 영지에서 오랜만에 열린 큰 파티다. 수도와는 달리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곳이라 대체로 사사로운 파티는 지양하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얼마 전 대공비가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져 주변 영지의 안전에도 비상이 걸린 덕에 한동안 더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대공비가 도이네 백작가의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퍼진 것이다. 간만의 파티에 주변 영지 귀족들이 다 몰려온 듯했다.

소문만 무성하던 나엘라가 첫 사교계 데뷔를 하는 셈이나 마찬가지기에 더더욱 모여들었다.

“그로우 영식이 호되게 당했다면서요?”

“가소 백작님의 외아들이요?”

“네, 맞아요. 백작님은 참 괜찮으신 분인데 아들이…….”

“저런. 그러고 보니 대공비께선 기사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병약하셨다잖아요. 마호세르디 공작님이 걱정되어 검을 좀 가르치셨겠죠.”

당연히 그들의 대화 주제도 나엘라였다.

“그나저나 대공 전하도 황자 전하 시절 이후론 이런 모임은 처음이시겠네요.”

“에스코트할 레이디가 없어도 황실 주최 파티에는 무조건 참석해야 했으니까요. 노헤스카로 오시곤 레이디가 없다며 참석하지 않으셨는데 말이죠.”

“바쁘시기도 했고요. 저는 황실 주최 파티를 간 적이 없어서 뵌 적이 없어요.”

“저는 예전 가문 합동 훈련 날 잠깐 참관하러 오신 대공 전하를 뵈었었죠.”

“어머, 어떻던가요? 소문대로 전쟁을 많이 좋아하실 용모……?”

“호호, 대공 전하를 위해서 전쟁을 일으킬 용모는 맞더라고요.”

체드란에 대한 소문이 점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외모라고 변질되고 있을 때 연회홀 앞을 지키던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 전하와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악단의 연주 소리만 홀을 채웠다. 은은한 악기의 음률 위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바닥을 가르는 묵직한 구두 소리가 박자를 맞췄다.

바야흐로 대공 부부의 등장이다.

좌중을 압도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몇몇 이들은 급하게 숨을 삼켰다.

당장 맨손으로 몇 사람을 쓰러트릴 것 같은 체드란의 기세에 조금 익숙해지고 나면 깔끔하게 넘긴 백금발이 눈에 띄었다. 그 밑으론 무감정한 푸른 눈매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나엘라 또한 마호세르디의 상징과도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서늘하다 못해 시리게 반짝였다.

부부는 마치 전쟁터에 나온 듯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 덕에 누구 하나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근처에서만 맴돌았다.

그때 파티의 주최자인 도이네 백작 부부가 다가갔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몇 번 백작을 본 적 있던 체드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도이네 백작.”

체드란이 인사를 받자 백작은 가슴에 한 손을 올린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나엘라 노헤스카라고 합니다.”

나엘라는 고개나 허리를 숙이지 않고 바르게 선 채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나엘라의 손에 백작이 입을 맞추었다. 뒤이어 백작 부인이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줄리 도이네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 다 직위를 붙이지 않았으나 그 의미는 엄연히 달랐다.

나엘라가 대공가를 붙이지 않는 건 작위를 말하지 않아도 모든 이가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백작 부인이 백작가라 붙이지 않는 것은 대공 부부의 앞에선 작위가 의미 없기 때문이었다.

한차례의 격식 차린 인사가 지나자 뒤이어 백작 부인의 안부 인사가 이어졌다.

“힘든 일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그저 지나간 일이고 조금 고된 일이었을 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마호세르디 공작님께서 많이 놀라셨었지요.”

확실히 사교계는 장미 속에 칼이라고 불릴 만했다.

시선이 몰린 이 자리에서 백작 부인은 공작을 언급하며 단번에 마호세르디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같은 황제파이니 이 정도는 가능하리라 계산에 넣었겠지.

물론, 나엘라에게도 기회였다.

“부인의 걱정 어린 서신과 꽃바구니도 잘 받았습니다. 직접 키운 캐모마일 꽃들이라고 하셨는데 맞나요?”

나엘라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백작 부인에게 장단을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어중간한 태도보다는 명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앞뒤가 확실히 다르면 더 좋고.

가면도 두 개, 이득도 두 배.

“네, 그렇습니다. 캐모마일에는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라는 뜻이 있지요. 말려서 차로 드셔도 좋습니다.”

“하녀들에게 이르겠습니다.”

간단한 안부 묻기 이후 체드란에게서 파티가 훌륭하다는 평까지 이어지고서야 두 부부의 인사는 끝이 났다.

편안히 즐기고 가시라는 인사를 끝으로 백작 부부가 물러나자 이곳을 지켜보던 이들이 조금씩 서로를 살폈다. 누가 먼저 움직일 것인지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나엘라는 저절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곤 허리를 바르게 폈다.

진짜 파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얼굴을 비추려 몰려들 테니 많은 이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말을 거는 이를 확인하고, 외웠던 인적 사항을 떠올리고, 그들의 태도와 이야기를 평가해 중요한 것들은 다시 되새겨야 했다.

굳게 마음을 다독이던 그때, 체드란이 나엘라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래도 잠시 떨어져 있어야겠군.”

나엘라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하자 체드란이 작게 속삭였다.

“그대와 떨어져 있어야 귀족파가 내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오겠지. 귀족파의 군사 현황을 확인하고 오겠다.”

“지금…… 도망가시겠다는 겁니까?”

이를 가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체드란이 살짝 멈칫했다. 그러고는 눈동자만 살짝 굴려 나엘라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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