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찰나에 벌어진 틈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엘라는 확신했다. 자신과 붙어 있으면 부인들까지 상대해야 한다. 그게 싫어 그는 그나마 쉬운 남자들만을 상대하러 도망가겠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함께 인사를 받다가 가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부인들이 나를 어려워해 아내의 사교를 위해서 잠시 빠졌다 잘 말하고 다닐 테니.”
“이럴 때는 청산유수시네요.”
“그럼 이따 보지. 힘내게.”
체드란이 슬쩍 팔을 떼어 내자 티 나지 않게 꽉 붙잡고 있던 나엘라의 손이 툭 떨어졌다.
이 많은 시선 속에서 억지스럽게 다시 붙잡을 수도 없으니 나엘라는 살짝 미소를 걸친 채 이를 악물었다.
“이따 이야기 좀 합시다, 대공.”
“앞으로도 대공 전하라 부르지 말고 대공이라 하시게. 화가 날 땐 그냥 체드란이라고 불러도 되고. 그럼 이만.”
한쪽에 모여 있던 남자들을 향해 유유히 사라지는 체드란의 뒷모습을 보며 나엘라는 헛웃음을 참았다.
두고 보자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곳은 전쟁터 한복판과 마찬가지였다.
망할 체드란. 첫 사교계 데뷔부터 남편이 없는 걸 부인들에게 뭐라 말한단 말인가.
설마…… 그동안 일을 벌이고 뒤처리는 안 한 자신에게 복수하는 건가……?
나엘라는 싸한 예감이 들어 잠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런 나엘라의 옆으로 여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
파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사람들에게 가장 낯선 인물이던 대공비는 서늘한 인상과 달리 제법 말을 잘 받아 주었다.
물론 중간중간 차갑게 끊어 내는 대화도 있었지만, 첫인상이 워낙 강해 그 정도는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대공비가 차갑게 끊어 내는 대화는 가만 보면 무례한 화제이거나 예의를 지키지 않는 어조라 언뜻 당연하게도 느껴졌다.
“대공 전하께서 착용하신 망토 줄은 대공비 전하를 생각해서 제작하신 거죠?”
“자수정들을 감싸고 있는 특유의 문양,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수도의 그 유명한 장인 있잖아요!”
“어머, 대공비 전하의 목걸이도 그쪽 제작인 것 같던데. 두 분이 세트로 맞추신 거구나!”
“세상에 어쩜, 대공 전하께서 저리 자상하시니 좋으시겠어요.”
계속되는 이야기의 향연에 나엘라는 잠시 어지러워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화원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언제 대화 주제가 저와 체드란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자신은 말을 많이 할 필요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시게 된 거예요?”
다들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인지 눈을 반짝거렸다.
“예전에 군사적인 문제로 대공 전하께서 마호세르디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 만났고 조금 부끄럽지만 서로에게 한눈에 반했네요.”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 와 횟수를 세는 것도 포기했다. 다들 체드란과 나엘라의 소문이 진실인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이것도 한두 시간이지, 슬슬 지쳐 가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다가와 나엘라를 불렀다.
“대공비 전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
처음 인사 후 물러났던 도이네 백작 부인이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는 뜻이지만 나엘라는 거절하지 않았다. 파티 주최자를 위해 따로 공치사하는 자리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대접을 받았으면 작은 보상이라도 보답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경우도, 따로 하는 경우도 있어 다른 부인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엘라는 백작 부인을 따라 테라스로 향했다.
커튼을 치고 테라스 문을 닫자 한쪽에 마련된 벨벳 의자가 보였다. 술을 깰 겸 잠시 쉬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한 건지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해 보였다.
“대공비 전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돌려 말하는 것보단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신다고요.”
나엘라가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아랫사람이 본론을 꺼내었다. 무례한 화법에 속했으나 나엘라는 되레 흥미가 생겨 계속 유지하던 작은 미소를 천천히 풀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잠시 시간을 내어 달라 했습니다.”
“알고 있네만.”
상대하기 쉬운 화법으로 나오니 나엘라도 편하게 말을 놓았다.
예의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 나엘라도 굳이 예의를 지키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나엘라에게 조금 놀랐는지 살짝 눈을 크게 뜨던 백작 부인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마호세르디 공작님께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도 있으시네요. 공작님께서는 대공비 전하께서 사람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하실 거라고 하셨는데.”
“아버님께서는 워낙 걱정이 많으시네. 그대가 아버님의 사람인지는 몰랐군.”
나엘라가 사람 상대하는 걸 어려워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마호세르디 공작과 지안밖에 없었다.
그러니 백작 부인에게 그런 말을 전한 것은 아버지가 맞을 터였다.
나엘라의 평소 성격까지 아는 것으로 보아 백작 부인은 꽤 믿을 만한 자인 것 같았다.
“굉장히 영민하시다 들었습니다. 역시 제가 공작님의 사람인 걸 금방 확신하셨군요.”
“내가 다방면으로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나 보군.”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확신했고요. 마호세르디의 피는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아버님만 모르고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런 것치고는 공작님께선 대공비 전하를 자신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노헤스카에 있어도 대공비 전하가 곧 마호세르디라고요.”
과하다. 아무리 퍼 줘도 더 퍼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라더니, 이제는 마호세르디까지 줄 기세였다.
자신이 결혼하기 전에 진작 주시지. 꼭 이렇게 뒤에서 나엘라의 곁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다고 알려 준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껏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지 못하는데.
자신에게 검조차 겨누지 못해 대련 한 번 못 하던 모습이 떠올라 나엘라는 실없이 웃었다.
언제까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로만 볼 건지. 그 유난스러운 걱정들이 못내 따뜻했다. 전해 들은 것만으로 제가 다시 힘내게 만들었다.
“그래서 전하려던 말은 무엇인가? 혹시 그것이 아버님의 잔소리라면 이미 충분하네만.”
아까보다 친밀해진 말투에도 백작 부인은 잠시 말을 골랐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그녀가 앞으로 뱉을 말의 무게를 나타내는 것이라 나엘라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마호세르디는 유서가 깊고 세력이 큰 곳이라 가신 가문이 꽤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시론 후작가가 손에 꼽히지요.”
시론 후작가에 대한 이야기에 나엘라는 문득 아침의 꿈이 스쳐 지나갔다.
“시론 후작가의 첫째인 에스토 시론 경과 오랜 친우라 들었습니다. 시론 경이 검은 방패 기사단에 입단해 마호세르디 저택에서 지냈다고요.”
나엘라의 분위기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길 바랐으나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가 퍼지고 있어 만남을 청했습니다. 갑자기 듣고 놀라시는 것보다 제가 말씀드리는 게 나을 듯싶어서요.”
겨울조차 초여름 날씨와 비슷한 지방이라 바람에 전혀 찬기가 없었음에도 나엘라는 이상하게 손끝부터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어제 새벽, 제스라 왕국 소속 암살자의 습격으로 시론 후작이 당했습니다.”
나엘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에스토 시론 경은 급하게 후작령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후작령은 폐쇄된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아이스크림 같다고 했던가.
오랜 친우의 부드러운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우이자 에스토와 똑같이 웃음 짓던 시론 후작의 얼굴 또한 천천히 지나갔다.
나엘라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아침부터 지안이나 다른 이들이 왜 그렇게 부산스럽게 굴었는지. 감이 좋은 나엘라가 무언가를 느꼈을까 걱정하던 것이었음을.
체드란까지 걱정을 내비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다들 연락을 받은 거다. 새벽길을 내내 달려온 연락병에게 들었겠지.
그들도 그리 오래 감출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오늘은 고단할 게 분명한 날일 테니 하루 정도만 늦출 생각이었을 터.
백작 부인의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녀도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가 퍼지지 않았다면 모른 척 넘겼으리란 의미였다.
순식간에 그들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시론 후작가의 상황이 어떨지도 눈에 훤히 보였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오세요. 밖에는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백작 부인이 자신이 두르고 있던 숄을 벗어 나엘라의 무릎 위에 덮어 주곤 자리를 비켰다.
곧이어 테라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나엘라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테라스 밖으로 화원이 보였다. 백작 부인이 차를 좋아한다더니, 화원 안에는 차로 쓸 만한 꽃들이 가득했다.
유난히 작고 소담스러운 꽃들의 향연에 나엘라의 마음에도 잔잔한 추억들이 흘렀다.
시론 후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차갑게 생긴 마호세르디 사람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곱슬머리에 따뜻한 갈색 눈동자를 지닌 이였다. 날카로운 검술만을 지녔던 나엘라에게 검이 가진 부드러움을 잊지 말라고 조언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검술도 그와 닮아 있었다.
후작과 꼭 닮은 웃음을 지닌 에스토가 스쳤다.
아버지를 잃은 에스토는 어떤 기분일까. 친우를 잃은 아버지의 기분은 또 어떠할까.
상상할 수도 없는 슬픔과 분노를 견디고 있을 이들을 위해 나엘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제 일을 잘 마무리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도 나엘라는 한참을 더 화원만 바라보았다.
체드란이 자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
*
“괜찮은가?”
저를 살피는 푸른 눈에 금세 도끼눈을 뜬 나엘라가 이를 갈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정말 복수입니까?”
“무슨……?”
“저 때문의 체드란의 일이 많아져서 오늘 복수한 거냐고요.”
“흠흠, 아무리 부부 사이라지만 존칭은 쓰는 것이 어떻겠나.”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대공인데 적어도 ‘님’자는 붙여야 하지 않을까. 이름만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나엘라가 부르는 제 이름에 서늘한 감정이 들어 있었다.
“제가 반말했습니까? 존댓말 쓰고 있잖아요, 체드란.”
“……다시 들으니 존대도 하고 존칭도 하는군.”
“그래서 복수냐니까요?”
“아니다.”
“어째서 아닙니까?”
“답이 정해져 있는 건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군.”
입을 꾸욱 다물고 묵언 시위를 하는 나엘라를 향해 체드란이 손을 들어 올렸다.
혹시나 기습 공격이라고 생각해 반격이라도 해 올까, 일부러 천천히 손을 든 체드란은 나엘라의 눈 아래를 검지로 살며시 쓸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밖에 있었군. 말투는 딱딱한데 울지는 않았고.”
그녀는 알까. 무표정해서 더 아파 보일 때가 있다는 걸. 눈물지은 것도 아닌데 어쩐지 나엘라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