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나엘라는 그저 눈만 살짝 내리깔았다.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망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 배려에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까.
“들었나?”
“…….”
“내게 화가 났나?”
“…….”
“공범이 아주 많네만.”
순간 어이가 없어서 입이 떡 벌어졌다. 공범이 그렇게 많은데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니.
“저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네만. 뭐, 어쩔 수 없었네.”
“변명하는 태도가 아주 성의 없으십니다.”
“그대에게 배웠지.”
청출어람이 따로 없었다.
“그럼 이것도 복수입니까?”
“복수를 굉장히 좋아하는군. 아니면 지금 머리에 복수밖에 없는가? 그것이 정말 나와 관련된 복수인가.”
체드란은 의외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의외로 센스 있는 것도 그렇고, 의외로 입을 다물게 하는 재주도 그랬다.
“바보로 만들었을지언정 그대가 힘들길 바라는 이는 없었다.”
“저의 몫입니다.”
“그대를 아끼는 건 우리의 몫이지.”
“저를 아끼셨나 봅니다.”
“잊었나 보군. 그대는 내가 잘 써먹을 패인 대공비 아닌가.”
나엘라가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이것도 복수 아닙니까? 복수 맞는 것 같습니다?”
“나를 멋대로 그대의 품 안에 가둬 놨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책임질 게 많으니 피곤하네요.”
체드란은 한없이 피곤해 보이는 나엘라의 모습에 설핏 웃었다.
“적어도 그대가 상처받지 않기를, 또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은 진심일세.”
나엘라가 뭐라 하기도 전에 체드란은 그녀를 휙 일으켰다.
“이곳에서는 그만 나가야겠군. 여기서 더 오래 있으면 별별 소문이 퍼질 판이야. 대공 부부가 아무도 없는 테라스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네.”
나엘라의 무릎에서 스르륵 떨어지는 백작 부인의 숄을 체드란이 집어 들었다.
“대공께서는 은근 속이 좁으신가 봅니다. 그런 것들을 다 기억하고 계시고.”
“아니지. 그대의 말을 잘 안 잊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나엘라의 허리에 손을 두른 체드란은 예고도 없이 테라스 문을 벌컥 열었다.
순간적으로 쏠린 시선에 나엘라는 열심히 표정을 관리했다. 다행인 건 마침 근처에 도이네 백작 부인이 서 있었다.
할 말이 있던 나엘라는 체드란을 질질 끌고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줄리 부인, 부탁할 게 있습니다.”
더는 그녀의 호칭은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 그 의미를 눈치챈 듯 줄리가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함인지 눈을 살짝 내리깐 후 부채로 입을 가렸다.
“말씀하세요.”
“아버지의 사람인 건 도이네 백작도 포함인가요?”
줄리는 옛날 일을 회상하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마음을 가리는 양 입가에 올렸던 부채를 접어 가슴 부근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물론 그 잠깐 사이에 그림자는 금방 사라졌지만.
“그이는 좋은 사람이에요. 반듯한 사람이고요.”
뒤로 움직이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마호세르디처럼 첩보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고.
나엘라는 나쁘지 않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의 눈과 귀가 필요합니다. 제가 사교계에는 인연이 없어서요. 제가 수도로 올라갈 적에 부인도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인의 인연들도 만나 보고 싶고.”
줄리는 가볍게 웃었다.
“마호세르디를 위해서 그 정도야.”
이 정도면 아버지와 무슨 사이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하는 걸까?
“아닙니다.”
“네?”
“이제 마호세르디가 아니고 노헤스카입니다.”
“저런. 공작님께서 서운해하시겠네요.”
“딸을 시집보내실 때 그 정도 각오는 하셨어야죠. 냉큼 보낼 때는 언제고.”
“이것 참, 정말로 서운해하실 것 같은데요. 사실 공작님께서는 대공비 전하께서 이혼하고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살짝 하시던 걸요?”
아니 이 아저씨가?
나엘라는 억지로 웃었다. 체드란조차 이혼이라는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흐트러졌다.
“아버지께 저는 아주 잘 지낸다고 꼭 전해 주세요.”
“어쩜……. 마호세르디 사람들은 정말…….”
줄리는 들고 있던 부채를 촤르륵 펼치며 입가를 가렸다. 물론 반달로 휘어지는 눈가는 훤히 보였다.
“한결같이 사랑스럽네요.”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나엘라를 뒤로한 채 줄리는 여유롭게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설마…… 사랑스럽다는 것에 아버지도 포함인가……?”
나엘라가 되뇌는 말에 체드란도 질겁한 표정이 되어 줄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 버린 기분이었다.
*
한참을 가만히 서 있는 나엘라를 보며 방 안에 있는 이들은 안절부절 진정을 못 했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시론 후작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는지 알고 있기에 탓하지 않았다.
“습격한 암살자가 제스라 왕국인 건 확실해?”
“그게…….”
“사건에 대한 상세 정황은?”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들을 향해 나엘라가 고개를 돌리자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였다.
“죄지었어? 왜 그러고들 있어.”
“공작님께서…….”
“아버지가 왜?”
“그 외에 아무런 정보도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답이 되었다.
제스라 왕국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나엘라다. 그런데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없다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정보가 내부의 첩자에게서 새어 나갔든가, 아니면 범인이 제스라 왕국이 아니든가.
어쨌든 나엘라가 알아선 안 될 이야기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마호세르디에서 알아서 할 테니 나엘라 님의 일에만 신경 쓰시라고 전하셨습니다.”
공작이 나엘라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나엘라도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을 왜 모르실까.
마호세르디에서 어련히 잘하리란 걸 안다. 암살자들을 잡으려 후작령 폐쇄에 들어갔을 것이고 끈질기게 추격 중일 것이다.
에스토나 그의 가족들에 대한 신변 또한 마호세르디에서 책임질 테지.
폐쇄령을 내렸다는 건 암살자들을 못 잡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못 잡았는데 암살자가 제스라 왕국인 것은 어떻게 판단했지?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암살자가 여러 명이라 몇 놈은 잡고 몇 놈은 놓친 걸까?
제스라 왕국인은 외향적인 차이로는 쉽게 제국인과 구분할 수 없다. 암살자 몇 놈을 잡았다 한들 억양 차이가 확실할 텐데 쉽게 입을 열었을 리도 없고.
가장 확실한 것은 두 가지였다.
나엘라가 알면 안 되는 것이 있어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범인의 정체든, 첩자의 정체든 둘 중 하나가 분명하다.
정보가 없으니 무엇 하나 쉽게 유추할 수가 없었다.
판단에 가장 중요한 정보가 막히자 나엘라는 오랜만에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없는 것 같았다.
일단 지금은 범인에 대한 확인보다 먼저 할 것이 있었다.
나엘라는 테이블로 다가가 자신의 의복을 확인했다. 비록 잠옷으로 사용하는 긴 슬립과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그 색이 깨끗한 흰색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혹시 더러워진 곳은 없나 옷을 털어 내고는 다시 단정히 갈무리했다.
테이블 아래에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망설임 없이 침실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올라갔다.
“내 검을 가져와.”
테이블 앞에 천천히 무릎 꿇자 슬립이 옆으로 퍼졌다. 그 모양새가 기도하는 성직자의 옷과 닮은 것 같아 퍽 마음에 들었다.
“검은 왜……?”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기도라도 담아서 보내려고.”
테이블 위로 놓인 검을 잡아 나엘라는 망설임 없이 검집을 벗겼다. 그러고는 검집과 검을 나란히 올려놓은 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신을 믿지는 않는다.
나엘라가 해 왔던 일들을 신의 덕이라며 영광을 돌리기에는 죽어 간 이들에게 미안했고 자신의 노력이 아까웠다.
하지만 한 사제가 말했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신께서는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의 기도까지 들으신다고.
그래서 신을 믿지 않는 나엘라는 누군가를 잃은 날이면 이렇게 기도를 했다. 그 어떤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아닌, 죽은 자를 위한 기도였다.
“그대가 만약 죄를 짓고 간 것이 있다면 그 죄는 응당 살아 있는 자들이 갚을 겁니다.”
이것이 지금 나엘라가 시론 후작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대는 본인이 행한 선한 일들만 안고 가소서.”
검을 들고 싸우다 죽었으니, 다음 생에는 검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소서.
행하던 일들을 끝맺지 못하고 찾아간 안식이지만 이제는 그 안식을 편안히 누리소서.
“지금의 나는 흔들릴 수 없어서 눈물 한 방울 담지 못하고 그대를 애도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만큼은 그대를 앗아 간 자들 때문에 폭풍우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따뜻하던 기억이 이리도 시리게 사무칠 수 있는지 매번 놀랍습니다.
찬란하던 그대의 인생을 기억하는 한 사람으로서 언제나 그대를 기릴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나의 몫이며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도 나의 몫이니.
이 모든 감정은 산 자의 것이므로 그대는 그저 편안히 잠들길 바랍니다.
나엘라는 짧은 기도를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감정에 휩쓸리는 시간은 잠깐이면 되었다. 모든 것은 끝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검의 한쪽 면에 각인된 문장을 손으로 쓸었다.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이 검이 무슨 의미인지는 에스토도 잘 알 것이다.
그녀는 검에 기도뿐만이 아니라 소망도 함께 담았다.
“에스토, 지금의 고통이 지나고 나면 먼 훗날 너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많이 힘들고 괴롭겠지만 내가 일어났던 것처럼 너 또한 일어날 수 있을 거다.
내 오랜 친구는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니까.
“언제가 다시 보게 되는 날…….”
그때는 이 검을 내게 돌려줘도 괜찮을 만큼 많이 이겨 냈기를 바란다.
보고 싶다. 내 친구. 그리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준비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기를.
지금은 참아야 하는 나를 용서해 주기를.
검집에 검을 다시 집어넣는 손길이 경건했다.
그러나 보라색 눈동자 속엔 더 이상 슬픔은 없었다. 다만 어떠한 감정으로 크게 일렁였다.
내 사람을 건드렸으니 그 복수는 나의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지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결국엔 해낼 것이다.
이것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나의 의지이며 신념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