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확신이 들기까지
33화
보고서들을 확인하던 체드란은 노크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온 마든 때문에 잠시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대공비 전하의 검에 대해서 아십니까?”
“검? 포츠사 하테못 남작 영식과 대련할 때 몇 번 보았지.”
“거기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아십니까?”
“무언가 적혀 있는 것은 보았네.”
내용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함께 대련할 당시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까.
마든은 포츠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적혀 있는 문구가 인상적이라기보다는 나엘라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알 것 같아 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꽤 아끼는 검이겠어.”
“검을 쓰는 모든 자는 자신의 검을 아끼니까요.”
“그런데 검은 왜?”
“대공비 전하께서 그 검을 에스토 시론 경에게 보내셨습니다.”
체드란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책상에 턱을 괴었다.
생각보다 그녀가 꽤 힘들어한 걸까, 나름 담담해 보이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도 감정 표현이 크지 않으니 그녀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떤 마음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금이라도 물어볼 것을.
이제 와서 슬쩍 후회가 되었다.
“그런 뜻이 담긴 검이라면…… 보낼 만도 하군.”
“기사들에게 검이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죠. 대공비 전하의 검은 뜻도 남다르니 더 아끼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많이 친한 친구였나 보군. 시론 후작과도 친했을 테고. 노헤스카의 이름으로도 무언가를 보내는 것이 좋겠나?”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걱정이 됩니다.”
“무엇이?”
“마음이 아주 착잡하실 텐데 너무 평소와 같은 것이요.”
나엘라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마든은 고개를 숙이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체드란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마든을 내버려 두었던 것은 언젠가 기사로서의 자신을 되찾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많이 고민하고 또 어느 날은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며 지내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다.
마든은 자신의 기사니까.
그런데 심각한 얼굴의 마든을 보니 자신이 이끌어 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 고민이 기사로서의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 같아 조심스럽기도 했다.
“대공 전하께서도, 대공비 전하께서도 죽음이 익숙하신가 봅니다.”
거기까지 들은 체드란은 아무래도 조언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해지는 사람은 없다. 대공비가 악몽을 꾸는 것을 알면서 그러나.”
“그래도…… 버티시지 않습니까.”
“버티는 사람들은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라 가능한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냥…… 제가 매우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집사 일도 재밌고 보람도 느낍니다. 저에게는 집사라는 자리가 더 맞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체드란은 생각했던 것보다 마든의 고민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원체 자신은 말이 별로 없는 스타일이라 이런 대화가 어려웠다. 이럴 땐 차라리 나엘라가 고민을 들어 주는 게 나았으리라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기사를 남에게 맡길 생각을 하다니. 예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마든.”
“네.”
“마든 그린델라움.”
“네…….”
“검을 처음 들었을 때를 기억하는가.”
“…….”
“왜 기사가 되려고 했었는지 기억하는가.”
“…….”
“그대가 진정 집사로 남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총집사 마든도 기사 마든도 내 곁에 있다는 건 그리 다르지 않겠지.”
“…….”
“허나 자신에게 떳떳한 일을 하길 바란다. 기사였던 그대가 집사가 된 것이 부끄럽지 않다면 집사로 남는 것을 택하라.”
“그게…….”
“또한, 마음이 약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검을 놓도록. 대신 더는 누군가를 지킬 수 없음에 아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든은 어떤 말도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검을 놓으란 소리에 눈가가 흔들리는 것이 체드란의 시야에 잡혔다. 체드란은 모른 척 말을 이어 갔다.
“왜 기사 대부분이 몸에 신체적 장애가 생기거나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져야 검을 놓는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아니, 너는 알고 있다. 너 또한 검을 사랑했던 자니까. 놓을 수 없어서 놓지 못한 것이다. 그런 길만 걸어왔기에 그런 길로밖에 걷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에게 다른 길이 생겼다면 나는 그대의 뜻을 응원하겠다.”
마든은 고민하다 되물었다.
“제가 기사를 포기해도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싫다. 내가 왜 아끼는 기사를 잃어야 하지?”
“그럼 말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대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을 제대로 이겨 내지 않는다면 다시 검을 들어 봤자 이런 일이 반복될 테지.”
“대공 전하께서도 이런 고민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있지. 그리고 이겨 내었다.”
“어떻게요?”
“원해서 검을 잡은 것은 아니나 검을 좋아했으니까. 기사였던 때의 그대처럼.”
“저는…….”
마든은 두려움 속에 혼재된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공비가 검을 쓰는 것을 보아하니 어떻던가? 그저 강해 보이기만 하던가? 그 자신감과 기사로서의 자부심이 분명 부러웠을 텐데. 검을 쓰는 자들이 다들 그렇듯이, 뛰어넘고도 싶고 따라가고도 싶지 않던가.”
체드란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조금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포기해야 할 것이다. 두 번 다시 나와 전쟁터를 누빌 일도, 그대가 그렇게 좋아하는 대공비와 대련 한 번 해 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대가 기사라면 모두 할 수 있는 것이지.”
집사라는 자리 또한 마찬가지다. 집사로서 마든이 할 수 있는 것들과 해냈던 것들이 있었다.
“집사와 기사 중 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택하라.”
자신이 해 줄 말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도 마든이 집사의 자리를 택한다면 체드란은 그저 묵묵히 선택을 지지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기사로 돌아오는 것을 더 바라지만.
“조금 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다. 충분히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곤 집무실을 나가는 마든을 체드란은 가만 바라보았다. 마지막 표정까지 심각한 것이 꽤 깊게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후우…….”
누군가를 설득하고 위로하는 것보단 검을 쓰는 것이 체질에 맞았다. 특히 마든처럼 섬세한 이들은 더 어려웠다. 말도 잘하고 검도 잘 쓰는 나엘라가 특이한 것이다.
아니면 뭔가 특별한 비법이 있나?
새삼 그녀의 능력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왠지 나엘라가 한동안 체드란을 감시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이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지려고 하니까.
자신은 체구가 크고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다. 힘이 더 세고 검을 더 잘 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한 그녀가 그 정도로 검을 쓴다는 건 특이한 일이었다.
체드란은 생각하다 보니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호세르디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검을 휘둘렀으니 감을 잃지 않으려 계속 훈련을 하고플 텐데 나엘라는 그런 것도 없었다.
검을 좋아한다는 건 일종의 중독과 같다. 그게 불안이든 설렘이든, 한 번 잡은 검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엘라는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가득했다. 노헤스카로 온 이후론 딱히 훈련에 매진하거나 검을 들고 다닌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면 자신 모르게 훈련을 하는 것일까?
체드란은 놓아 버린 보고서를 다시 집을 생각은 안 하고 문득 찾아온 궁금증에 생각을 더듬었다.
*
저녁 식사 시간, 나엘라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체드란이 슬쩍 시선을 내리더니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자주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가 먼저 말하지 않기에 나엘라도 식사를 이어 갔다.
다음 날 정원을 산책하다가 티타임을 가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면 작은 기척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얼핏 보인 구두 뒤꿈치라든가, 미쳐 가려지지 않은 커다란 덩치라든가.
그런 상황들이 며칠이나 이어졌다.
방에서 차를 마시던 나엘라는 그제야 남편의 정신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동안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저택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가 싶었다. 되도 않는 숨바꼭질 중인 체드란도 그렇지만, 마든도 요새 우중충한 얼굴로 다니지 않았나. 혹 두 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인 걸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체드란이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아.”
맞은편에서 뜨개질하다 놀란 제니가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게 감시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마든도 이상하고.”
“집사님은 왜 그런지 알아요.”
“왜?”
“저번에 귀찮아하는 지안한테 자꾸 뭔가를 얘기하셔서 들어 봤는데 기사로 돌아갈지 집사로 계속 남아 있을지를 고민하시더라고요.”
“음, 그건 중요한 고민이지. 그럼 체드란은?”
“대공 전하는 모르겠네요. 정말 왜 그러시는 거지?”
나엘라는 찻잔을 톡톡 쳤다. 그때, 오랜만에 돌아온 당번으로 곁에 있던 프리야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좋아하시는 거 아닐까요?”
“숨바꼭질을? 아니면 감시를?”
“대공 전하께서 나엘라 님을요.”
진심으로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나엘라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좋아하면 감시하는 건가?”
“좋아하니까 계속 보고 싶으신 거 아닐까요? 그런데 부끄러우니 대신 감시를 하시는 게 아닌지…….”
“정말 몰랐어. 체드란이 날 좋아한다고?”
가만 생각해 보면 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자신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아름다웠고 검도 잘 썼다. 검을 잘 쓰는 사람한테 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하물며 자신은 천재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주장이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모르고 있었군.”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제니가 뜨개질을 멈췄다. 프리야도 정상적이진 않다는 걸 잊고 있었다 자책하며 제니는 다급히 나엘라를 말렸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궁금증이 들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타당해. 일단 나는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편이지 않나?”
“아니 그건 맞습니다만…….”
“그리고 검을 잘 쓰는 것을 넘어 천재라 불렸지. 전쟁광인 체드란이 보기에 충분한 호감 요소가 아닌가?”
“그, 그것도 맞고…….”
“여기 와서 집안일도 완벽하게 해냈다. 첩자도 잡고 저택 내부도 단단히 했지.”
“으음…….”
나엘라가 하나하나 따져 볼수록 제니의 목소리 또한 작아졌다. 분명 무언가 이상한데, 또 이상할 만큼 납득 가는 요소였다.
“심지어 사교계도 완벽하게 데뷔하지 않았나? 내 소문이 지금 사교계에 파다할 텐데.”
“그렇죠…….”
“사교계는 체드란이 손대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것도 잘 해낸 나를 체드란이 안 좋아할 이유가 뭐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