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어…… 그러니까…….”
애초에 그들은 모두 나엘라의 성격에 단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엘라를 좋아해 다들 떨어지지 않으려 들었고.
말을 더 찾지 못하는 제니 대신 가만히 듣고 있던 프리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대공 전하께선 무뚝뚝한 성격이시니 표현을 못 하시는 걸 수도 있어요.”
“흐음, 생각해 보니 목걸이도 선물 받았군.”
“그렇네요. 나엘라 님이 하시는 일에 딱히 뭐라 하신 적도 없잖아요.”
“그렇지. 아버지조차 가끔 버거워하셨는데 체드란은 그런 게 없었지.”
이것은 나엘라에게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스스로 사랑 같은 감정들에 무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눈치챈 것만도 큰 발전이었다.
아무래도 에스토와 시론 후작가의 일 때문에 정신을 빼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더 고민하던 나엘라는 이론적으로는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 사람에게 전해 들었던 사랑이란 감정은 체드란이 하는 행동들과 얼추 비슷한 면이 있었다.
선물도 주고, 자주 보고자 찾아오고, 그간 저지른 일에도 화 내지 않고.
전술 짜듯 대입해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과정이 있으니 결과와 원인이 있는 법. 체드란의 감정은 사랑이 맞는 듯했다.
이제껏 자신은 대부분 옳은 결론을 내려 왔다. 이번에도 맞을 것이다.
“뭐, 결혼 생활이니 사랑이 있는 편이 낫겠지.”
프리야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비록 계약 결혼이지만 대공 전하도 나쁜 분은 아닌 것 같고, 사랑이 있으면 더 좋겠죠.”
“그렇다면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음…… 나엘라 님이 당장 체드란 님을 사랑하시는 건 무리고, 일단은 노력이라도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노력?”
“일단 대공 전하께 잘해드리면 되죠.”
“지금보다 더 신경 쓰고 잘해 줘야겠군.”
“다정하게요.”
“그래. 혹시 체드란이 다른 것을 원할까?”
“어떤 거요?”
“아이라든가, 잠자리라든가.”
옛날에 어떤 기사가 했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더 많은 것들을 하고 싶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사랑이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나 대부분 사소함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름 들은 것들이 많기에 내놓은 결론이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후계자도 낳긴 낳아야 하니까. 아이를 가지는 것은 모든 일이 끝난 다음이겠지만 잠자리는 익숙해지는 것이 나을 수도 있고.”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 생각한 나엘라는 저녁 식사 시간에 체드란과 상의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래도 부부의 일이니 혼자 결정할 순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체드란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대해 줘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니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
연무장 근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체드란과 론체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무슨 일인지 평소와 다르게 가벼운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타난 나엘라는 허리에 검까지 차고 있었다.
그녀의 애검은 에스토에게 보냈으니 누군가에게 빌린 검이거나 임시로 쓰고 있는 것일 터였다. 새로 검을 제작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고 나엘라가 검을 쉽게 고를 사람도 아니었다.
며칠 동안 그녀를 관찰해 온 체드란은 갑작스런 모습에 조금 놀랐다. 한동안 검을 잡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도망 다닐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고개를 든 나엘라는 호기심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체드란과 눈이 마주쳤다.
“훈련할 모양이지?”
여전히 안부 인사는 생략해 버린 담백한 대화였다.
“아…… 뭐…….”
“음?”
“반성할 것이 있어서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습니다.”
“반성? 그대가?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보군.”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을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겨 눈치채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점점 더 미궁으로 들어가는 대화에 체드란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옆에 멀뚱히 서 있다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론체도 마찬가지였다.
부부의 묘한 침묵이 불편해진 론체가 결국 인사를 건넸다.
“잠은 푹 주무셨습니까? 날씨가 맑습니다. 훈련하시기에도 좋으실 겁니다.”
“아, 반트모어 경. 그대도 있었군.”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말이야. 그렇다고 반트모어 경을 무시한 건 아닐세. 언제나 수고해 줘서 고맙군.”
인사치레하던 나엘라는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
체드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기!
결심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잊어버렸다. 체드란과 생각보다 빨리 마주치는 바람에 미처 계획을 짜지 못했다.
혹시 자신이 너무 딱딱하게 굴진 않았을까 걱정이 든 나엘라는 만회할 행동을 떠올렸다.
“음…….”
너무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표정에서 이상함을 느낀 체드란이 자리를 피하려 할 때쯤이었다. 한발 빠르게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역시 체드란 님은…… 그러니까…… 뒤처리 능력이 뛰어납니다.”
“……?”
“제가 무슨 일을 벌여도 늘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앞으로 더 뒤처리를 잘하라 이 말인가?”
“능력이 뛰어나다면 써야 하는 것이 맞지요. 아, 아니 이것이 아니라…… 당신만큼 보좌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엘라로선 최대한의 칭찬이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체드란의 다른 장점을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내가 언제부터 그대의 보좌관이었지? 물론 뒤처리를 많이 하긴 했지만, 보좌관은 아닐세. 남편일세.”
“그럼…… 남편으로서 보좌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검도 매우 잘 쓰죠. 당신만큼 검을 잘 쓰는 사람은 첫째 오라버니 이후로 처음입니다.”
최대한 칭찬을 쥐어짠 나엘라는 어쩔 수 없이 칭찬 하나를 더 덧붙였다. 검에 관한 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라 정말 후하게 쳐 준 칭찬이었다.
“아무래도 아침이 상한 모양이군. 내가 요리사를 불러 이 죄를 엄히 묻겠네.”
“요리사라고 하니까 생각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방 쪽은 일이 많아 훈련에서 제외하지 않았습니까? 요리사들과 그 보조들도 첩자일 가능성이 있음을 깜박했습니다.”
“확인해서 조치하도록 하지.”
“역시 검만 잘 쓰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검을 잘 쓴다는 건 좋은 말이긴 한데…… 오늘 정말 왜 그러나? 심적으로 많이 힘든가?”
아무래도 아침 식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며 체드란이 심란해하고 있을 때, 나엘라는 솔직히 말해도 될지를 고민했다.
그간 다정하게 못 해 준 것 같아서 만회하고자 칭찬이라도 한 거였는데. 이러다간 대화만 빙빙 돌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드란의 입장에서 볼 때 나엘라가 그의 감정을 눈치챈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고 있었을 테니 먼저 알고 있다고 표현하면 더 좋아할지도 몰랐다. 나엘라가 체드란의 입장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원래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말씀드리려 했으나 지금 만난 김에 말하겠습니다.”
“역시 무슨 문제가 있었군. 아까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겨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그 일인가?”
“맞습니다. 체드란 님이 절 좋아하는 감정에 관한 것입니다.”
체드란과 론체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네만.”
“체드란 님이 절 좋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체드란 님이라고 불러드리는 중인데요.”
체드란이 멍하니 깜박이자 푸른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옆에 서 있던 론체는 사안이 매우 심각하다 여기고 어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때를 놓쳤다. 다음에 나오는 폭탄 발언에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혹시 체드란 님도 저랑 닿고 싶으십니까?”
“닿고 싶……?”
“만지고 싶고 잠자리를 함께하고 싶으시냐 여쭌 겁니다.”
체드란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잠시 사라졌다 돌아왔다.
“아, 물론 저는 그런 것에 큰 거부감이 없습니다.”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우리는 부부 사이이니 당연한 의무라고도 생각하고요. 안주인의 권리를 누리려면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미리 말씀해 주세요. 제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
“당황하셨나 봅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앞으로 부부 사이의 지켜야 할 것들을 협의하고자 합니다. 잠자리 문제나 후계 문제는 충분한 협의가 필요하니까요.”
나엘라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끝내고는 론체에게 살짝 눈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멍하니 바라본 그녀의 뒷모습은 반듯하고 곧은 평상시 모습과 같았다.
그녀의 하나로 묶인 검은 머리칼만이 발걸음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전혀 흔들림 없는 나엘라와 같아 조금 전의 대화로 혼란스러운 것은 체드란뿐임을 깨달았다.
“대공 전하…….”
론체가 나지막하게 부르자 멍한 얼굴의 체드란이 돌아보았다. 체드란은 나라를 빼앗긴 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곧 정조를 빼앗길 남자의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어찌 됐든 나엘라의 말이 체드란의 강한 정신에도 크게 타격을 줄 만큼 범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 힘들어 보이는 얼굴에 론체는 절로 안쓰러움이 올라왔다.
“아니라고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나엘라가 어떻게 할 것 같나?”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게 문제네. 나도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어. 잠자리나 후계가 필요 없다고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아내에게 그대를 좋아하지 않으니 착각하지 말라는 말을 어찌해?”
“……이대로 가다간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때 생기는 문제가 클 것 같나? 아니면 내가 나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생기는 문제가 클 것 같나?”
“그건…… 그것도 모르겠군요.”
“나도 모르지. 그러니 지금 아무 대꾸도 못 한 것 아닌가.”
체드란의 머릿속에 잠자리와 후계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당장 오늘 저녁에 이 화두를 논해야 한다.
대체 뭐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후계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있으면 좋은 것도 맞다. 열심히 키운 대공령이니 잘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넘기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나엘라와 자신의 자식이면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나엘라의 머리와 자신의 검 실력만 닮는다면 대공령은 훨씬 커질지 몰랐다.
생각하고 나니 후계는 낳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부모의 조건이 너무 훌륭하지 않은가?
잠자리는 사실 부부 사이에 당연한 문제였다. 정략결혼한 귀족 부부 중 형식적인 사이라도 후계를 위해 날짜를 맞춰 잠자리를 가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다만 나엘라와 체드란은 그간 별생각이 없기도 했고 딱히 지켜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런데…… 나엘라와 잠자리라고……? 그녀와 한 침대……?
“아…….”
순간 체드란의 얼굴이 전에 없을 정도로 화르륵 붉어졌다.
제 인생에 여자가 있었어야 무슨 상상이라도 해 봤을 것이 아닌가.
전쟁터를 전전하다 보니 체드란도 기사들의 음담패설 정도는 들어 본 적 있다. 하지만 방법은 알아도 그게 자신의 일일 거라 생각 못 했던 터다.
“정말…….”
론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체드란은 그 눈길을 피해 먼 산을 바라보았다.
“기절하고 싶군.”
체드란은 그렇게 원하던 기절은 하지 못하고 그저 애꿎은 하늘만 열심히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