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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36)화 (36/220)

35화

그날 저녁 식사에서 체드란은 총 세 번의 사레에 걸렸고 마시던 물을 두 번 뱉었으며 다섯 번 헛기침했다.

묘하게 더듬거리던 체드란과 거침없는 나엘라의 대화는 대기 중이던 하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괜히 등을 돌리거나 옷매무새를 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나엘라의 협의 주제는 많지 않았으나 거침없었다.

첫째, 잠자리를 원하는 기준이 서로가 원할 때인지 후계를 위해서인지.

둘째, 서로가 원해서라면 반대로 어느 한쪽이 원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셋째, 후계를 위해서라면 월에 몇 번 정도 동침을 할 것인지.

넷째, 잠자리에서 지켰으면 하는 것이 있는지.

다섯째, 아이는 몇 명을 원하는지.

차마 한 번을 먼저 대답할 수가 없어 체드란은 겨우겨우 몇 가지 답을 전했다.

“잠자리는…… 서로가 원한다면 이루어지지 않겠나…….”

“어느 한쪽이 원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배려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잠자리를 가져야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네만…….”

“잠자리에 서로 지켜야 하는 것도 있었나? 그것도 잘…….”

“아이는 뭐…… 하나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전부 모호하기만 한 대답에 나엘라가 인상을 팍 찡그리자 지레 겁먹은 체드란이 먼저 외쳤다.

“내게 시간을 좀 주게.”

다급해 보이는 말투에 체드란의 습관처럼 나엘라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너, 너무 빠르지 않은가?”

“빠릅니까?”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네. 잠자리나 후계 문제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논의해도 충분해 보이네만.”

“하지만…… 프리야가 남자는 많이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아닐세. 나는 전혀 힘들지 않네. 제발 믿어 주게나.”

나엘라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남자가 아니니 왜 힘든지 정확힌 모르지만 어쨌든 당사자인 체드란의 의견이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문제는 미뤄 놔도 될 듯싶었다.

후계를 원해 잠자리를 가지고자 한다면 의원이나 산파를 불러 그 주기와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해 놔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가지면 전쟁에 나가는 건 무리다. 체드란의 말대로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보류할 사항이 맞는 것 같았다.

긴 고민 끝에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체드란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고맙네.”

“뭘 고맙기까지.”

부부의 긴 논의가 끝나자 식사는 다시 이루어졌다.

어찌 된 일인지 마지막에 감사함을 표한 건 체드란이었다. 마치 나엘라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는 꼴이 되지 않았나?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놓인 체드란은 고기의 맛을 이제야 느끼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이 주제로 이야기를 꺼낼 것 같지 않아 안심이 되었다.

허나 그것이 속단이었음을 체드란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그는 일주일 후 벌어질 일을 예지하지 못했다.

결혼 생활에 대해 조언자가 없던 나엘라는 줄리 백작 부인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 과정에서 체드란이 자신을 좋아하며, 당분간 잠자리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저 흐뭇하게 웃던 줄리 부인은 조언은커녕 풋풋하다며 자기 일인 양 좋아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사교계에 대공 부부의 소문이 돌았다. 발 빠른 말이 둘러 둘러 체드란의 귀에 돌아왔을 때쯤엔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대공이 대공비를 너무 사랑해서 건드리지도 않고 지켜 주고 있다더라.

다른 남자와는 다르다며 대공비가 허락하는 날까지 지켜 줄 것을 맹세했다더라.

대공비에게 온갖 선물 공세를 하다 못해 대공령의 기사단까지 줬다더라.

소문은 여러 입을 지날수록 점점 거대해졌고, 나중에는 대공비를 위해 전쟁까지 불사한다는 크기로 부풀었다.

누군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소문은 빠르고 신속하게 퍼졌다.

보고받고서야 알게 된 체드란은 제국 전역을 강타한 소문에 결국, 기절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자신의 건강한 몸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

나엘라가 유의 깊게 보던 영지 중 아가산 백작가에서 파티가 열렸다.

다른 왕국의 귀족이었으나 그 능력을 인정받고 제국으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사업 수완이 좋아 망명 귀족임에도 세력이 꽤 거대했다.

문제는 그가 중립이라는 것.

그 덕에 아가산 백작의 파티에는 황제 측 인사와 귀족 측 인물들이 가리지 않고 참석했다. 그만큼 적도, 아군도 많아 도이네 백작가의 파티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할 순 없었다.

“가끔 신기하군.”

저택 현관 앞에서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민 체드란이 말했다.

“그대를 처음 봤을 땐 그저 차가운 사람일 것 같았는데 말이지.”

나엘라가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체드란에게 손을 얹었다.

“어디서 그런 정열적인 성격이 나오는지 알 수 없군.”

저도 모르게 나엘라는 살짝 웃었다.

“잊으셨나 봅니다. 제 피는 제국의 서부 경계선을 지키는 기사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걸. 그들은 물러서지 않으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지키는 검이자 방패이지요.”

“여전히 멋있고.”

“제가 멋있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실언했군.”

“당신도 노헤스카에서 태어나 자랐으면 저처럼 살았을 겁니다.”

“인생의 반은 이곳에서 보냈다.”

“어쩐지 반만 멋있으시더라니.”

나엘라는 오늘 연한 분홍빛의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반 묶음으로 고정한 뒤 웨이브를 넣어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렸다.

드레스는 흰색에 가까워 밝은 곳이 아니면 분홍색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어깨는 한쪽만 고정하고 허리에 매듭을 묶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제작한 드레스라 어느 명작 그림 속 여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식 또한 백금으로 만든 팔찌 하나와 길게 늘어뜨린 목걸이뿐이라 무척 경건해 보였다.

대신 반 묶음을 고정한 머리 장식에 여러 가지 백금 줄을 매달아 놓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백금 줄이 반짝였다.

“오늘은 페즈몽레 백작도 온다지요?”

가장 큰 가신 가문이자 대공비 납치 사건 당시 사주한 사람으로 범인들이 지목한 자였다.

“부인의 건강 악화로 한동안 파티에 참석하지 않더니, 오늘은 혼자라도 참석한다더군. 조금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어. 페즈몽레 백작 혼자 참석하는 것이니 필시 목적이 있을 거야.”

“부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 가주 혼자 참석하다니…… 확실히 이상하군요. 그래도 노헤스카의 가장 큰 가신 가문인데…… 어떤 사람입니까?”

“신중한 이다. 함부로 움직일 사람은 아니야. 그런 이가 목적이 있는 양 움직이니 이상한 것이다. 나를 따로 찾아와도 되었을 텐데.”

나엘라가 듣기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신중한 이가 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거꾸로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대놓고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만 멋있는 나는 잘 모르겠으니 그대가 알아보게.”

“반만 멋있는 대공께서는 일도 반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저번처럼 절 혼자 두고 가시면 이번에는 정말 가만 안 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소문 때문에 떨어져 있기도 어렵게 됐어.”

나엘라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함께 오르려던 체드란은 잠시 멈추어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의 하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지.”

“제 하녀들은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말을 전하는 이들이 아닌데 이상하네요.”

“정확히는 마든에게 들었다.”

“마든이 요즘 제 하녀들 곁을 맴도는 것 같더니 뭘 주워들었군요.”

“앞으로 내게 다정히 대해 주기로 했다면서?”

“절 좋아해 주는 사람이니 당연히 다정하게 대해 줘야죠.”

“그런데 왜 찾아볼 수가 없지?”

체드란의 지적이 있고 나서야 그녀는 잠시 뜨끔한 기분이었다. 그날의 대화 이후 다정하게 대해 줘야 한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

“말해 보게.”

“분명 연무장 앞에서 만났을 때 칭찬도 해드렸고…….”

“그게 그대의 다정인가? 그럼 그 다정이 왜 며칠을 가지 못하나?”

“음…… 오늘…… 오늘 체드란 님은 아주 멋있으십니다.”

체드란은 남색의 예복에 흰색의 망토를 걸치고 은색의 견갑판으로 망토를 고정했다. 포마드로 머리를 넘기고 몇 가닥만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니 군인의 강인함보다는 미형의 얼굴이 더 돋보였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체드란은 다시 입을 다물고 마차에 올랐다.

“나쁘지 않군.”

문이 닫히자 마차는 붉은 월계수 기사단의 호위 속에서 아가산 백작가로 향했다.

도착한 아가산 백작가에는 저택 대문부터 파티가 이뤄지는 별관까지 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황실이나 권력 있는 가문들은 손님들을 위해 마차를 모아 놓는 공간이 따로 있을 테지만 일반적인 귀족 가문에선 어려운 일이다. 작위가 낮은 자가 윗사람보다 큰 저택을 소유할 순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보통은 본인 가문의 마차 놓을 자리만 마련해 놓는다. 그러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작위부터 권력까지 통틀어 책정하곤 귀빈일수록 저택 가까운 곳에 마차를 대기시키곤 했다.

아가산 백작가의 연회장은 특이하게도 1층 홀이 모두 오픈된 구조였다. 그렇게 춥진 않아도 나름 겨울인지라 곳곳에 난방을 위한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겨울에 1층 홀을 모두 오픈하고 난방을 가득 준비해 놨다는 것은 은연중 재력을 자랑하는 행태였다. 난방 비용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돈이 많다는 방증이니까.

문제는 권력과 이권의 힘으로 별관 앞까지 들어온 대공가의 마차가 홀에서도 한눈에 보였다는 것이다. 기사단 정복과 망토까지 갖춰 입은 붉은 월계수 기사단원들만 해도 시선이 모일 판인데, 가장 깊숙이 들어온 마차라니.

덕분에 시종이 이름을 외치기도 전에 연회장의 모든 사람이 대공 부부가 도착했음을 눈치챘다.

다들 어찌나 행동이 빠른지 안에서 누군가 나오기도 전에 모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예의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체드란이 나엘라를 에스코트했다. 먼저 내밀어진 커다란 손 위에 살짝 제 손을 얹은 나엘라가 마차에서 내렸다.

확연히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든 나엘라는 마차가 멈춘 곳과 1층 홀이 무척 가까워 놀랐다. 모든 이들이 이미 자신과 체드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나엘라가 살며시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내빈들이 더욱 집중했다.

“반갑습니다. 나엘라 노헤스카입니다.”

보통은 대공인 체드란의 인사가 먼저지만 나엘라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체드란은 애처가로 소문난 상태이고, 제대로 예법에 맞게 인사하는 것은 호스트를 만난 후에 해도 충분했다.

그녀는 제 첫인상을 확실히 각인시키고자 했다. 전쟁터가 아닌 사교계에서의 주인공은 자신이니까.

그러니 체드란보다도 제게 잘 보여야 할 것이며, 그가 저라면 껌뻑 죽으니 실질적인 권력은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이 자리에서 박아 넣어 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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