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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37)화 (37/220)

36화

그 의도를 알아챈 이들은 장소가 어떻든, 상황이 어떻든, 예법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았다.

나엘라보다 높은 곳에서 인사할 수 없으니 1층 홀에서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샤트 아가산입니다. 여기는 저의 아내 마로 아가산입니다.”

파티 주최자의 인사는 당연했다. 다만 제일 먼저 상황을 알아차리고 주변을 주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업 수완이 좋은 만큼 눈치도 빠른 자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론 도이네입니다. 여기는 저번에 보셨던 제 아내 줄리 도이네입니다.”

오랜만에 본 도이네 백작과 줄리 백작 부인은 여전했다. 도이네 백작은 우직한 느낌이었고 줄리는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기겁할 소문을 낸 원흉임을 알아서인지 나엘라는 옆에서 풍기는 불편한 낌새를 느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아 페즈몽레입니다. 제 아내는 현재 몸이 불편하여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인사드리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체드란이 신중한 이라 하더니 인상 또한 그런 느낌이었다. 단정한 갈색 머리에 눈빛도 잠잠했다. 순간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가볍게 움직일 사람은 분명 아닌 듯했다.

그런 이가 부인 없이 혼자 참석했다. 과연 사교계에서 무슨 뜻으로 받아들일까.

아내가 아파도 혼자 참석할 만큼 대공가에 충성한다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볼 것인가.

대부분은 전자로 볼 것이고 황제처럼 의심 많은 이들은 후자로 볼 것이다.

예를 들면 많은 이들이 모인 이곳에서 중립파를 포섭하거나, 귀족파를 압박하러 왔다고.

페즈몽레는 가장 큰 가신이므로 누군가를 압박할 때 꼭 필요한 가문 중 하나이니 가능한 가정이었다.

또는 그렇게 보이도록 유도하고 다른 일을 꾸미던가.

페즈몽레 백작의 인사 뒤로는 홀로 들어가는 길에 인사를 받았다. 인사를 건넨 이들 대부분 예측이 가능한 이들이었다.

황제파이거나 가신 가문이거나, 아니면 마호세르디와 인연이 있는 곳이거나.

가장 의외였던 이는 귀족 세력에 속하는 루부스 후작가 사람이었다.

서쪽에 마호세르디가 있다면 동쪽에는 루부스 후작가가 있다고 다들 말한다.

루부스 후작가는 바다와 맞닿아 해상을 지키는 가문이며 귀족파 중에서도 큰 세력을 지녔다. 해상 무역으로 들어온 물자를 남쪽에 판매하는 것이 아가산 백작이라고 하더니, 그 친분으로 참석한 모양이었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임 루부스입니다. 저는 부인과 사별한 지 오래라 오늘 딸아이와 함께 참석했습니다. 여기는 제 외동딸 베르에티 루부스입니다.”

바닷가의 군인답게 구릿빛으로 탄 얼굴과 굵직한 턱이 그의 성격을 대변했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의아해하기도 전에 후작 영애인 베르에티 루부스가 나섰다.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베르에티 루부스입니다.”

불안한 아버지와 다르게 베르에티의 눈은 총명하게 빛났다. 곧고도 강한 열망을 담고 있는 눈빛이라 나엘라는 과거에 저도 모르는 무슨 인연이 있었나 의아할 정도였다.

곧 베르에티가 작게 속삭였다.

“하일모라 님에게 대공비 전하를 찾아가란 말을 들었습니다. 이따 조용히 찾아뵈어도 무례가 아닐는지요.”

살며시 떠올라 있던 나엘라의 미소가 순식간에 짙어졌다.

하일모라 세레노피.

얼마나 그리워하던 이름인가.

그 이름만으로도 반가운 존재. 에스토와 더불어 나엘라의 단둘뿐인 친구다.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엉뚱함이 가득했던 하늘색 눈동자가 뇌리를 스쳤다.

수도로 올라간 후에야 볼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꼭 찾아오세요. 하일모라의 친구라면 제 친구와도 같습니다.”

혹 대화가 길어져 의심이라도 살까 나엘라는 미소만 남긴 채 먼저 그녀를 지나쳤다. 하일모라는 과연 어떤 인연을 내게 보낸 것일까.

눈치 빠른 아가산 백작도 그렇고 속내를 알 수 없는 페즈몽레 백작, 엉뚱하던 친구가 보낸 귀족파의 베르에티 후작 영애까지.

왠지 오늘의 파티가 재밌을 것만 같다.

*

나엘라와 체드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르에티는 아버지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괜찮겠느냐?”

불안한 음색에 베르에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위험한 길이지요.”

그녀의 아버지 제임 루부스는 반평생을 배 위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지와 바다를 사랑하여 평생 지키고자 했던 이였다.

그래서 귀족들의 알력 싸움에선 멀리 떨어져, 그저 영지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만 따지던 남자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습니다. 귀족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휩쓸리면 영지에 있는 사람들도 휩쓸린다.”

“가만히 있어도 휩쓸릴 예정이라면 움직여서라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북쪽의 해상 제독이라고 불리는 자가 황후에게 붙었습니다.”

“그는 원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자다.”

“제국은 황제파, 황후파, 황태자파로 갈리고 있습니다. 피바람이 부는 건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베르에티…….”

“가장 세력이 큰 곳은 황제파지요. 제국의 가장 큰 군사권은 황제가 갖고 있으니까요. 이대로 황후가 들고일어난다면 황후 측 사람들과 더불어 중립인 귀족들의 숙청은 필연적인 미래입니다.”

제임 루부스는 딸의 강경한 어조에 작게 신음을 삼켰다.

그저 잘 지키기만 하면 안전할 줄 알았던 고향은 어느새 거센 파란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모두가 안전했으면 좋겠구나.”

“어머니가 사랑했던 영지를 꼭 지킬 겁니다.”

베르에티는 다시금 나엘라가 있는 곳을 눈으로 좇았다.

아가산 백작의 파티는 말 그대로 부유함의 표본이었다. 보통 한 악단만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웅장함을 위해서인지 세 악단과 성악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가구나 장식물의 화려함은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하다는 조각물이나 그림들도 떡하니 배치되어 있었다. 장식, 음악, 조명, 난방, 조촐한 음식까지 부유함의 끝을 달렸으나 나엘라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거의 모든 참석자의 인사를 다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귀족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엘라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체드란이 제 등허리를 남몰래 툭툭 치며 연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원래 파티가 시작되고 나면 남자들과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나뉜다. 하지만 나엘라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내내 붙어 있었는데 결국 체드란에게도 한계가 온 모양이다.

저 멀리서 아가산 백작과 페즈몽레 백작이 체드란에게 눈빛을 보내는 것이 시선에 걸렸다. 나엘라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놓아줘야 했다.

“잠시 다녀오겠소.”

나엘라가 옅게 미소 지었다. 허나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하리라는 것을 잘 아는 만큼 체드란은 불똥이라도 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아가산 백작과 페즈몽레 백작의 주변에는 그 목적이 뚜렷할 만큼 관련 있는 자들만 모여 있었다. 바론 도이네 백작처럼 황제파이거나, 페즈몽레 백작처럼 가신 가문이었다.

그중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은 중립인 아가산 백작뿐이었다.

체드란은 천천히 모여 있는 자들을 훑고는 아가산 백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에 흔들릴 만도 하건만 아가산은 미동도 없었다.

“백작이 함께 있는 이유를 곡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저는 사업가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득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그대의 뜻인가?”

“모든 사업은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박쥐처럼 여기저기 붙을 생각도 없거니와 제 감을 믿습니다.”

황제파든 노헤스카든 체드란과 함께하겠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체드란은 페즈몽레에게 시선을 옮겼다.

“할 말이 있다면 나를 따로 찾아와도 될 것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굳이 티를 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책에도 페즈몽레 백작은 침착하게 답했다.

“가신들끼리만 따로 만나 뵙기보다는 아가산 백작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의심 많은 누군가의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가산 백작까지 끌어들였으니.”

“의심 많은 누군가도 이번엔 묵인할 겁니다. 이것은 귀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이유는?”

“황후가 움직였습니다.”

체드란의 입에서 절로 혀 차는 소리가 새었다. 그녀가 움직였다는 소식이 달가울 리 없었다.

황후가 어떤 사람이던가. 특히 페트론 황자의 일 이후 처음으로 움직이는 것이니 더욱 유념해야 했다.

“오랜만에 움직이는군.”

“끝을 볼 작정인 것 같습니다. 귀족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황태자의 편에 섰던 이들도 술렁이는 중입니다.”

체드란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쉬이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오늘은 저택으로 돌아간 후에도 긴 시간 동안 나엘라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

혼자 남겨진 나엘라에 주변으로 자연스레 귀부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녀의 환심을 사고 친목을 다지길 바라는 속내가 훤히 드러났다. 그 추측을 증명하듯 대화 주제가 전부 그녀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단제가 얼마나 멋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꽁지 빠져라 도망 다니던 뒷모습이 생각나 속으로 이를 갈았고, 다나한과 지엘라의 연애 이야기는 함구했다.

나엘라야 둘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고 당연히 몰랐다. 그래서 웃었을 뿐인데 둘의 연애는 어느새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아 참, 마호세르디의 가신 가문 중의 하나가 시론 후작가죠?”

“어머, 그렇네요. 얼마 전에 부고 소식을 듣긴 했는데…….”

“시론 후작님이 마호세르디 공작님과 막역한 사이라고 들은 적 있어요. 상심이 크시겠어요.”

사교계 소문에 능통한 귀부인들이니 시론 후작가의 일을 어찌 모르겠는가.

각오했던 일이기에 나엘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론 후작 영식은 아직 결혼도 안 했다던데, 의지할 곳이 없겠네요.”

나엘라와 에스토가 친구라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보안에 신경 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피부로 느껴졌다. 아니면 귀부인들의 안쓰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터였다.

“범인은 잡았나요? 부고 소식만 전해졌지 다른 소식은 일절 전해지지 않아서 걱정이네요.”

“부고 소식도 작위 승계를 위해 전한 것이잖아요. 서쪽은 장례 절차나 애도도 조용히 치르는 모양이에요.”

귀부인들은 정보를 얻고 싶은 눈치였지만 아쉽게도 나엘라 역시 아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에스토가 후작 작위를 승계받은 것도 방금 알게 되었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마냥 축하하기에는 친구의 슬픔이 전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죠.”

타이밍 좋게 줄리 부인이 끼어들었다. 부채를 살랑거리던 줄리는 나엘라의 곁을 차지하고 있던 귀부인들을 은근슬쩍 치워 냈다.

자연스럽게 곁에 선 줄리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나엘라에게만 들릴 크기로 말을 전했다.

“루부스 후작 영애의 눈빛이 아까부터 너무 뜨겁네요. 저렇게 티를 내서야 귀엽기만 할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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