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살짝 주변을 훑자 홀 구석에서 이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베르에티가 나엘라의 시야에 걸렸다.
줄리의 말대로 귀족파인 그녀가 나엘라와 할 말이 있다는 티를 내면 좋을 게 없었다. 나이가 어린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해결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마음을 먹은 나엘라는 곁에 있던 귀부인들에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와야 할 것 같네요.”
“어머, 시론 후작가의 이야기를 괜히 꺼냈나 보아요. 당연히 마음 쓰이셨을 텐데.”
어딜 가나 눈치 없는 사람은 꼭 있는 법이다. 줄리가 콕 짚어 그만하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주변인들이 질책하는 눈빛을 보내 당사자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덕에 나엘라는 더 편히 움직일 수 있었다. 오래 자리를 비워도 말이 나오지 않으리라.
“그럼 잠시.”
나엘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귀부인들이 길을 내주었다.
천천히 테라스로 다가가 커튼을 치고 문을 닫았다.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느긋하게 움직였으니 대공비의 휴식을 방해하러 오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의 시선이 테라스에서 떨어졌다 싶을 때쯤 문이 살며시 열리며 베르에티가 들어왔다.
갈색보다는 주황색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눈동자, 아직 앳된 소녀티가 나는 동그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까지. 조금 더 크면 제국에서 손꼽는 미인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나엘라가 봤던 이들 중 가장 아름답던 이는 3황녀 지엘라지만.
테라스에 놓인 긴 소파에 나엘라는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였다. 베르에티는 주저 없이 드레스를 양쪽으로 들어 올리고 무릎을 굽히며 예를 다해 고개를 숙였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루부스 후작가의 외동딸, 베르에티라고 합니다.”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엘라는 자세를 바꾸진 않았다.
누군가와 독대할 때 대부분의 상황에서 윗사람이었던 직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고질적인 습관에 가까웠다. 잘 모르는 상대방과 이야기해야 할 상황에서 항상 우위를 점하려 비딱한 자세를 고수하던 것이 몸에 밴 터다.
이 모습을 본 하일모라가 ‘망할 공작가, 망할 지배 계급’이라며 욕을 한 적도 있지만 쏠쏠하게 써먹었던지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중립 귀족의, 그것도 동쪽 국경 지대의 수장이라 불리는 루부스 후작가가 아니던가.
하일모라의 친구는 곧 자신의 친구라 한 말은 진심이다. 그렇다고 알지도 못하는 이를 날름 받아 주겠다는 의미 역시 아니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바로 본론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나엘라를 상대하는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일까.
도대체 주변인들의 눈에 제가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 나엘라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말하게.”
나엘라가 허락하자마자 베르에티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가지런히 허벅지 위로 두 손을 올리고 응시하는 모습이 반성의 의미론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급히 전할 말이 있어 갑자기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퍽 난감하겠군.”
“일어나진 않겠습니다.”
“일어나라는 말도 아니었다. 내게 무릎을 꿇을 만큼 원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겠지. 들어 보고 판단하겠다.”
“도와주세요.”
물꼬가 트이자 이때까지 침착했던 태도와 달리 베르에티는 간절히 말했다.
“하일모라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키고 싶다면 지키는 것을 가장 잘하는 이를 찾아가라고요. 분명 나엘라 님께서 도와주실 거라 하셨습니다.”
나엘라의 손가락이 가만히 소파 손잡이를 두드렸다.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대의 소중한 무언가겠고……. 그렇다면 무엇에서 지키고자 하는가?”
“황후와 귀족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손잡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황후가 움직이자 그에 따라 귀족들도 움직인다라. 그런데 나엘라에게 들어온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호세르디에서 넘어오는 정보들이 통제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필시 그 원인은 아버지겠지.
정보를 줄 수 없다는 것이 그저 에스토의 일에서 손 떼라는 의미인 줄 알았건만. 수도의 일도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었나?
아니면 그 둘이 모두 연관이 있는 건가.
“그대는 중립 귀족이 아닌가? 그런데 황후와 귀족파가 움직인 것이 무슨 상관이지?”
“하일모라 님도 귀족파입니다. 그것도 황후와 손잡으셨지요.”
다음에 하일모라를 만나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줄 것이다.
하일모라가 귀족파인 것은 알고 있었다. 정확힌 그녀의 가문보다 그녀의 남편이 귀족파였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도 골수 귀족파는 아니다. 그저 영지의 이득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황후와 손을 잡았다니.
“물론 잠시 손을 잡은 척, 하시는 것뿐입니다.”
“왜?”
“황후가 자신과 손을 잡지 않는 귀족들을 가만두지 않으려고 하니까요.”
도대체 자신의 친구는 무슨 일에 발을 담근 건지 감이 안 왔다.
“마호세르디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들 소중한 것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하일모라 님께서 나엘라 님에게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전하면 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하일모라를 만나면 굳이 전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전해 주게나.”
하일모라가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죽고 못 살게 사랑하는 남편이겠지. 사랑 앞에서 누구보다 용감하던 그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와 달란 그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군.”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제 각오는 어린 나이의 치기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명예도 자존심도 소중한 것이 없으면 결국 스러질 것을 잘 압니다.”
“그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가족들인가?”
“아버지가 사랑하고 어머니가 사랑하셨던,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루부스입니다.”
“루부스 후작은 부인과 사별했나?”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바닷가의 습하고 더운 기운이 병에 영향을 주었지만, 루부스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영지를 사랑하고 지키는 것은 영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한 것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 가끔 이렇게 영주다운 이들을 보면 기껍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나엘라가 물었다.
“혹시 하일모라가 내게 어머니 얘기를 꺼내라 하던가?”
“그게…….”
“했군. 하여튼 성격 하고는.”
나엘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린 후작 영애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날름 약점을 알려 주며 가서 찔러 보라는 친구가 잘못한 것이지.
“그래서 내게 무슨 도움을 바라는가?”
나엘라의 물음에 베르에티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키고 싶습니다. 방법을 알려 주세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물어보기에 나엘라는 그저 작게 웃었다.
*
나엘라는 차가워진 손끝을 살며시 문질렀다. 베르에티가 나가고도 오랜 시간을 테라스에서 머무른 탓에 조금씩 체온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잠시 베르에티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그대는 황태자의 사람인가, 황후의 사람인가.”
“어느 곳에 머무를지 확인하시는 겁니까?”
“박쥐 같은 이들이 가장 먼저 버려지는 법이다.”
“제가 어느 곳에 있기를 바라십니까?”
“황후의 사람이 되게. 패는 많을수록 좋지 않겠나.”
“그러겠습니다. 지켜 주신다는 약속, 꼭 잊지 말아 주세요.”
베르에티가 나간 후 나엘라는 한참을 생각했다.
조금씩 자신의 편을 만들고 수도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대비 중이다. 제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고, 상대의 패를 읽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인 법이다.
하일모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라면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니 베르에티도 보냈겠지.
남은 일은 황후가 가지고 있는 패가 무언인지 파악하는 것과 황제를 어떻게 쳐 낼 것인지 계획하는 것뿐.
황제는…….
나엘라의 입에서 이를 악물어 으득 소리가 새어 나갔다.
아버지, 첫째 오라버니만 생각하면 속이 끓었다. 칼을 들고 수도로 올라가려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 가족은 왜 그렇게 힘들어야 했을까.
그때 달칵 소리와 함께 테라스 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표정이 왜 또 그런지 모르겠군.”
체드란이 나엘라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내가 또 무언가를 잘못했나? 왠지 기시감이 있는데.”
생각해 보면 체드란이야말로 황제에게 가장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아니지, 원한만 따지면 한두 명이 아닐 테다. 그래서 황제는 매번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사는가 보다.
아버지의 손에 어머니의 죽음이 방치당하고, 황후가 보내던 암살자들 사이에 아버지의 암살자들이 섞여 있었고, 외숙부는 의문사, 형제를 마음껏 아낄 수도 없었던 인생이라.
“참 잘 컸습니다. 대견하군요.”
체드란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임에도 나엘라는 그저 기꺼웠다.
“어디 아픈가?”
커다란 손이 나엘라의 이마를 짚어 왔다.
나엘라는 정말 진심이었다. 제 가정사는 갖다 붙이지도 못할 만큼 지독한 인생을 견뎌 온 체드란이 아니던가.
개망나니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 속에서 이렇게 괜찮은 남자로 자라다니. 역시 자신의 선택은 옳았다.
결혼 전, 체드란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볼 적에 확실히 좋은 지휘관, 좋은 주군이라는 걸 느꼈다.
전쟁광이란 소문과 실제로 빠져나가는 아군의 수는 매우 상이했다. 그가 정말 전쟁광이기만 했다면 그의 밑에서 버티는 기사나 병사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지, 그것만 보고 사람을 금방 파악한 내가 대단한 걸까? 도대체 난 못하는 것이 뭘까.
“점점 표정이 불손해지는데, 혹시 기분 탓인가?”
나엘라는 이마에 있던 체드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제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떨떠름한 표정의 체드란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쪽─
체드란의 손등에 나엘라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마치 기사들이 레이디에게 하는 것처럼 존경을 담아서.
“제가 지키는 걸 가장 잘한다고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그것과 이 행동이 상관이 있는 건가?”
체드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