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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39)화 (39/220)

38화

“제가 지켜야 할 사람이 조금 많은데 체드란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결국 루부스가 추가되었나 보군.”

체드란은 테라스에서 나엘라가 누구를 만났는지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고 계셨습니까?”

“기억하고 있나? 분명 대련에서 내가 이기면 사고 치기 전에 미리 보고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내가 매의 눈으로 감시하게 되지 않은가.”

“제가 감시당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집에서 이뤄지던 감시가 파티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근데 왜 그대와 얘기만 하면 말이 딴 곳으로 빠지는지 모르겠군. 그대가 사람을 홀리는 건 알고 있나?”

“여우도 아니고 제가 사람을 어떻게 홀립니까?”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가?”

“모르십니까? 대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 아…… 뭣 같은 아버지 밑에서 크셨지. 아무튼, 우리 이야기가 자꾸 딴 곳으로 빠지는 건 체드란의 탓도 있습니다. 지금도 체드란 때문에 여우로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왜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걸 모른단 말인가. 어쩌면 유명한 동화들은 죄다 모를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머니가 읽어 줬던 자신은 나은 셈이다.

“방금 매우 심한 욕이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제가 체드란의 아버지를 욕해서 충격받은 겁니까, 아니면 심한 욕을 해서 충격받은 겁니까?”

“그만하지. 그대와 이야기하면 끝이 없으니.”

나엘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데 체드란은 말을 길게 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자신인데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래서 지키는 것은 왜?”

“그냥, 체드란을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드란은 아직도 잡혀 있는 자신의 손을 한 번, 그리고 나엘라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손등의 키스는 기사의 키스 같은 의미인 모양이었다.

“제가 체드란을 지키는 기사가 되어 드리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지, 하여튼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여자와 남자가 좀 바뀐 것 같을 뿐.

평생 제 몸 하나를 지키기 위해 버티는 삶이었다. 누군가에게 지켜지는 것이 어색하지만 제법 괜찮았다.

어느새 나엘라가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체드란이었다.

“레이디들의 기분이 원래 이런 건지……. 그런데 그대가 나를 지키면 그대는 누가 지켜 주나?”

“반트모어 경?”

“내가 제일 강한데 왜 기사 단장이지?”

“사랑에 빠진 남자는 분별력을 잃으니까?”

“……그렇군.”

체드란은 나엘라의 깊은 오해 하나를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파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네. 제일 윗사람이 자리를 피해야 다른 이들도 쉴 수 있으니 우리는 이만 돌아가지.”

“아가산 백작과 페즈몽레 백작은요?”

“황후가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들었나?”

“루부스 후작 영애에게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금방 이해했다는 듯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귀족들에게 보여 주기식으로 움직인 거 아닙니까? 너희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

“그런 것 같더군. 귀족이 들끓고 있으니 우리 쪽에서도 견제해 줄 때가 됐지. 황제 측과 중립, 그리고 노헤스카까지 모였으니 귀족 전체가 전부 뭉치지 않는 이상 쉬이 움직이긴 힘들 것이야.”

생각보다 황제 측에 모인 자들이 많아진 탓이다. 세기의 로맨스로 보이려 하지만 어쨌든 정치적인 결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게 촉진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불안해진 귀족들이 힘이 있는 곳에 붙으려 할 테니까요.”

“나로선 그렇게 뭉치다 터지길 바라네.”

“혼란을 틈타면 물밑의 일들이 쉬워질 테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돼.”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파티는 소득이 높군요.”

그만 가자는 듯 붙잡은 손을 체드란이 천천히 잡아끌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엘라에게 그는 지나가는 어투로 얘기했다.

“내게 가장 큰 소득은 그대이지.”

나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급급하다. 솔직해질수록 목숨의 위협 또한 커지기 마련이니까.

헌데 이 남자는 이상한 곳에서 솔직했다. 느끼는 바를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마음을 너무 티 내고 다니십니다.”

이젠 나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가만히 돌아보니 체드란 역시 아니라고 말하기도 모호해졌다.

어쩌면 내게 정말로 그런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걸 눈치 빠른 나엘라가 먼저 알아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체드란은 나엘라를 가만 바라보았다. 처음엔 분명 저 표정이 얄미우면서도 신기했었다. 배부른 고양이 같기도, 장난기 넘치는 어린아이처럼 다가오기도 해서였다. 주변에 저런 표정을 가진 자가 없어 더더욱 그 속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헌데 지금, 그는 되레 스스로가 낯설어졌다. 똑같은 웃음일 뿐인데, 입매와 눈꼬리가 똑같이 살짝 휘었을 뿐인데 그녀에게서 다정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돌아가지.”

체드란과 나엘라가 느긋하게 테라스를 나섰다.

파티는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일부는 돌아간 건지 이미 자리를 비운 자들도 보였다.

이 파티의 가장 윗사람인 두 사람이 남아 있음에도 자리를 비운 자가 있을 줄이야. 그들이 어느 편에서 줄을 타고 있는지 대충 가늠해 볼 만했다.

나엘라와 체드란 역시 오늘의 목표를 달성했기에 더 남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두 사람은 파티의 주인인 아가산 백작에게 인사를 한 후 별관을 빠져나왔다. 별관 앞에 대공 부부의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대공저로 돌아가려 천천히 별관을 나서는데 잠시 바람을 쐬고 온 것인지, 루부스 후작과 마주쳤다.

나엘라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쩜 부녀가 이리도 다른지.

그런 루부스 후작과 전혀 닮지 않은 베르에티가 떠올랐다. 얼굴을 똑 닮은 제 가족관 다르게 루부스 후작 부녀는 생김새도 닮지 않았다.

후작은 제국인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한 갈색 머리와 갈색 눈동자를 지녔다. 주황색에 가까운 베르에티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외탁인 모양이었다.

“돌아가시는 모양입니다.”

루부스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늦어졌으니 돌아가려고 합니다.”

길을 막지 않겠단 의사를 밝히듯 후작은 한쪽으로 비켜섰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배웅 인사도 칼같이 끊는다.

문득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지켜 달라 말하던 베르에티가 생각났다. 나엘라는 왜인지 기분이 틀어졌다.

심술이 갑자기 올라온다고 해야 할까, 저 허리 꼿꼿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야 할까.

삐딱한 성격도 아닌데 이상하게 루부스 후작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까 처음 봤을 때 불안해 보이던 눈빛과 지금 당황하던 표정, 그리고 베르에티의 곧은 눈빛까지.

그제야 나엘라는 자신이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저희 아버지, 그러니까 마호세르디 공작님은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이름에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루부스 후작을 보며 나엘라는 더욱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건 그저 단순한 변덕이다. 베르에티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루부스 후작이 마음에 안 들어 부리는 심술이었다.

“마호세르디 공작님은 저를 지키기 위해 첫째 오라버니를 버리셨습니다. 오라버니를 황제의 손에 쥐여 주고 죄책감에 평생을 사십니다. 첫째 오라버니는 혹여 가족의 발목을 잡을까 스스로를 포기했으며 둘째 오라버니는 그것을 묵인했습니다.”

루부스 후작은 점점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니까.

“다들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죄를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가족을 지키고,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후작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베르에티 영애는 제게 뭐든 할 테니 루부스를 지켜 달라 했습니다. 지키는 대상에 자기 자신은 없더군요. 무릎을 꿇는 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눈동자가 멍해지며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겨우 이 정도로 충격을 받으면 어떡하나. 더한 고통을 겪으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는 동안 루부스 후작은 무엇을 했습니까?”

영지를 지키기 위해 그가 평생을 바다 위에서 싸웠던 것을 알고 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동쪽 해상을 지켰던 것 역시도.

각자의 삶 속에서 제 각기 다른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다른 이들이 무엇을 포기하고 어떤 일을 겪으며 소중한 것을 지켜 내는진 알고 있길 바랐다.

베르에티가 동아줄을 붙잡듯 무사하길 간절히 바랐던 상대가 아닌가. 적어도 딸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딸은 괜찮은지 궁금해해야지.

딸이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으며 영지를 지키려 할 때 바람이나 쐬러 다녀오다니.

테라스에서 무릎을 꿇고 나간 베르에티가 사방이 적인 파티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두 발을 딛고 버텼을까.

“베르에티 영애에게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엘라는 체드란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루부스 후작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나쁜 아버지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애초에 부성애가 없어 보였다면 말도 꺼내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체드란이 마차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냥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마호세르디 공작이?”

“온갖 죄책감은 다 안고 사는 못 말리는 팔불출에, 제게 뭐든 다 쥐여 주려는 그런 분이시라서요.”

“그래서 정보가 차단돼도 별말을 안 하는 거군.”

“별걸 다 아십니다. 제가 대공께 그런 정보들을 흘린 첩자를 꼭 잡을 겁니다.”

“그대가 저녁 식사 때 얘기해 주었지.”

첩자는 자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돌아가시죠. 첩자 부인과 함께 사는 체드란의 집으로.”

체드란은 결국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것을 처음 봐 나엘라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그녀의 속이 어떻든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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