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오늘 새벽, 서부와 남부의 경계에 있는 국경 쪽에 문제가 발생했다. 군수 물자를 가득 실은 마차 열 대가 새벽을 틈타 국경을 빠져나가려다 발각되었다.
범인들이 서부와 남부 쪽으로 나뉘어 도망가는 바람에 서부 국경군과 남부 국경군이 모두 동원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번 일로 제국 내에서 생산되는 군수 물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정확한 조사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에 전보가 날아왔다.
문제는 이 물자가 제스라 왕국으로 빠져나갔는지, 아니면 두칸 야만족들에게 빠져나갔는지 확인이 안 된다는 것이다. 빠져나간 양, 물자를 조달해 준 내부 배신자, 물자가 넘어간 곳을 확인하기 위해 체드란이 직접 나서야 했다.
급히 무장하고 나서려던 체드란을 나엘라가 붙잡았다.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이번에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군. 가장 큰 대형 마차 열 대의 물량이다. 처음부터 대량으로 빼내지 않았을 테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얘기지.”
“잘하면 제국 전체에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겠군요.”
“제국 내 배신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마호세르디와 함께 조사한다고 들었습니다.”
“마차 열 대가 모두 각기 다른 곳에서 모여 그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더군. 그중에는 마호세르디에서 생산하는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 보안 쪽으로 예민한 곳이니 지금 비상이라고 연락받았다.”
“그렇겠군요. 마호세르디는 군수 물품으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엄청난 철 매장지, 뛰어난 장인들, 최대 군수 물품 생산지이죠. 명검을 찾으려면 마호세르디로 가라는 말도 있죠.”
“왜 갑자기 자랑이지?”
“저도 모르게……. 그걸로 마호세르디가 부를 쌓았죠. 남들 다 거절하던 삭막한 국경 지대가 황금 땅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왜 자꾸 자랑하는지 모르겠군.”
체드란은 나엘라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아무래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느낌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시게.”
“없습니다.”
“그냥 하지 그러나.”
“정말 없습니다.”
“마호세르디 측에서는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이 온다더군.”
“…….”
“그대가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지.”
나엘라의 눈이 잠시 커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진짜였나?”
동그래졌던 눈이 팍 찡그려졌다.
“별로 그렇게 보고 싶진 않습니다.”
“자기 사람을 그리도 아끼는 그대가? 가족들을 지키겠다며 나와 결혼까지 한 그대가?”
“그것과는 별개입니다.”
어쩐지 나엘라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는 것 같더라니. 보고 싶다는 말도 전해 달라 못 하는 모양이었다.
마호세르디에 있을 때는 늘 붙어 있던 가족이었을 텐데 얼마나 그립겠는가.
“전해 주겠네. 그대가 못 하는 말들까지.”
“뭐…… 가족들끼리 애정 표현을 잘 못 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
“그냥 그걸 체드란에게 전해 달라고 하기가 민망해서요.”
“신경 쓰지 말게.”
저택 중앙 현관 앞에 서 있던 체드란의 곁으로 기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반트모어 경은 두고 가시나 봅니다.”
현관 앞에 모이는 기사 중에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나 기사 단장인 반트모어 경이 없었다.
“나 대신 그대를 지켜야지.”
눈에 익은 한 기사가 다가와 말고삐를 건네자 체드란이 훌쩍 올라탔다. 체드란의 체구에 맞춰 말도 거대했다.
“사고 치지 말고 있게나. 요즘 들어 저택으로 돌아올 때마다 자꾸 심장이 두근거리니까.”
“협심증이 있으신 거 아닙니까?”
“말을 말지.”
정원 너머 대공저의 대문 앞에도 기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 인원이나 무장한 행색을 보아 확실히 작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다녀오지.”
“별일 아니길 바랍니다.”
“내가 그대를 만나고 자주 그렇게 바랐지.”
“따뜻한 배웅 좀 해 보고 싶습니다.”
“며칠씩 영지 시찰을 나갈 때마다 자고 있거나 사고 치고 있던 이가 어디의 누구였지?”
“제 긴장을 풀어 주시려는 거면 됐습니다.”
체드란은 작게 웃더니 고삐를 잡고 말의 방향을 대문 쪽으로 돌렸다. 그가 방향을 잡자 함께 있던 기사들도 말에 오르며 자리를 잡았다.
기사 하나가 대문 쪽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아직 기사의 버릇이 남아 있나 보군. 당장 검을 쥐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기세가 날이 서 있다는 것은 알고 있나?”
“아…….”
무의식중에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마호세르디에게 있어 이번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뻔히 예상이 가 나엘라 역시 절로 긴장을 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뛰쳐나갔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 마호세르디의 기사들을 만나면 좀 색다르겠군. 전부 그대와 함께 전쟁터를 누빈 자들이 아닌가?”
나엘라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을 뒷받침하던 자랑스러운 기사단과 의사를 따라 주던 둘째 오라버니까지.
이제는 자신이 없어도 괜찮은 곳이었다.
“다녀오시죠.”
나엘라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자 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올 때 선물 사 오지.”
“기대하겠습니다.”
곧이어 힘찬 기합과 함께 체드란이 대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 뒤를 이어 기사들이 떠나며 흙먼지가 일었다.
“뭐…… 이제 내가 있을 곳은 노헤스카니까.”
괜히 아침부터 소란을 부린 것 듯한 기분에 멋쩍음이 밀려와 나엘라는 볼을 긁적였다.
*
서부와 남부의 경계선은 커다란 강 하나를 기준으로 나뉜다.
문제는 그 강이 제국을 지나 제스라 왕국과 두칸을 가르는 경계선도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을 따라 빠져나간다면 둘 중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재 물자를 빼돌리려 했던 일당들은 노헤스카 국경군에 억류되어 있었다. 범인들을 어디에 두고 조사할지부터 협의를 해야 했다.
체드란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도착했다. 경계령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다나한이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무래도 새벽에 급보를 받고 먼저 출발한 모양이었다.
보고 체계는 확실히 마호세르디가 더 빠르다. 아무래도 나엘라에게 자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드란이 말에서 내리자 대기하던 국경군이 다가왔다.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은 안에 세워진 간이 사령부에 계십니다.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체드란은 말의 고삐를 넘겨주며 빠르게 걸었다.
마호세르디 측에서는 범인 신문과 조사를 이미 시작했을 것이다. 이미 늦었는데 느긋하게 움직일 시간은 없었다.
천막으로 만들어 놓은 간이 사령부로 들어가자 안에서 얘기하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다나한 마호세르디였다. 결혼식 날 서부 국경인 공작령을 비울 수 없어 그는 참석하지 못했었기에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엘라와 똑같은 보라색 눈동자지만 머리카락은 갈색이었다. 다만 이목구비와 차가워 보이는 눈매는 똑 닮아 있었다.
예전에 봤던 첫째 단제 마호세르디와 마호세르디 공작도 딱 이렇게 생겼었다. 그들은 검은 머리여서 나엘라와 완전 판박이였지만.
“이제야 처음 뵙습니다. 다나한 마호세르디입니다.”
체드란이 다나한보다 더 높은 계급이니 하대를 써야 맞다. 헌데 나엘라의 오빠인 그에게 체드란이 어찌 하대할까.
“오랫동안 마호세르디 검은 방패 기사 단장이셨는데 이제야 뵙습니다. 체드란 노헤스카입니다.”
이래서 부인이 잘하면 유부남들이 처가 말뚝에 절을 한다고 하는 모양이다.
나엘라 득을 크게 보았으니 마호세르디에 무엇을 보답해야 할까.
체드란과 다나한이 막사 안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에 마주 보고 자리를 잡았다. 다나한의 보좌관들인지 젊은 기사 한 명과 중년의 기사 두 명이 옆에 앉았다.
체드란은 보좌관을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기에, 그 옆에는 노헤스카 국경군을 통솔하는 군단장 한 명과 보좌 한 명만 자리에 앉았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바로 이야기하도록 하죠.”
체드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나한의 보좌관 중 젊은 기사가 일어나 짧은 시간 동안 조사한 것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당들이 체계적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 몇 개의 조직들이 단 한 명의 지시 아래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조직들은 무역이 활발한 동부와 북부, 군수용품이 발달해 있는 서부와 남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맨 아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는 심부름꾼들부터 그들을 지시하는 맨 위까지 상하로만 명령이 내려지고 보고가 올라가는 듯합니다. 각 조직은 서로의 존재나 이름도 잘 모르고, 맨 위의 명령권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답니다.”
생각보다 조사한 것이 많았다.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조직 간에 서로의 존재조차 잘 모른다면 언제든 꼬리 자르기가 대비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나가 잡혔다고 다른 이들이 줄줄이 잡힐 리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더군다나 조직의 우두머리조차 모른다는 것은 정말 꽁꽁 감춰져 있는 비밀스러운 곳이라는 얘기였다.
“명령권자가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조직인가 보군.”
체드란의 질문에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명령 체계와 규모라면 제국 내부의 배신자 또한 상당한 계급의 인물일 수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감추고 여기까지 키우는데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들었을 테니까요.”
“그 정도로 구축한 조직이 왜 겨우 군수 물자나 빼돌리려 한 걸까.”
“군수 물자가 목적이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 조사를 더 해 봐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정도로 알아낸 것도 근처에 대기하던 일련의 무리를 급습해서 잡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그들이 각 조직에서 넘어오는 물건들을 한곳에 모아 제국 외로 빼돌리는 역할을 해 왔더군요. 물자가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려던 이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국경을 오가는 잔챙이들만 남았을 겁니다.”
체드란은 보고를 듣는 내내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호세르디의 모든 군사 통솔권을 가진 이는 공작이지만 실질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다나한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다나한에게 보고가 올라가자마자 명령 없이도 각 지역의 지휘권자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정보를 모았다.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교육이라도 시킨 건지, 그 주변 일대가 모두 수색에 나섰다. 잡힌 일당들을 심문하고 중요한 정보들은 그때그때 주변에 알려 협동 수색에 불협화음이 없었다.
그 신속함에 한번 놀라고, 자율적인 대응이 가능하도록 각 지휘권자에게 권한을 넘겨줬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이것도 혹시 나엘라가 만든 체계일까.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의 경계에서 놈들이 잡힌 게 아니었다면 아마 중요한 시간을 날렸을지도 모르겠다. 대기하던 자들은 일당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조직을 정리하고 떠났을 테니까.
마저 보고를 끝낸 보좌관이 물러나자 다나한이 입을 열었다.
“아직 저희가 조사한 것은 여기까지가 전부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문제는 시간이로군요. 지금쯤 흩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단체의 정체를 캐려면 결국 맨 윗놈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규모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더 상의하던 이들은 더는 얘기할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의를 일단락 지었다.
“나머지는 잠시 쉬었다가 정하도록 하죠.”
체드란의 말에 조금 지친 티를 내며 보좌관들이 빠져나갔다. 새벽부터 움직였을 테니 체드란보다 힘이 부칠 것이다.
막사 안엔 다나한과 체드란만 남았다. 둘 다 서로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나엘라는…….”
“나엘라가 전해…….”
하필 또 서로의 주제가 나엘라에 관한 것이라 그 이름이 동시에 나왔다.
체드란도 다나한도 서로의 모습이 어색해 보여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