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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41)화 (41/220)

40화

분위기가 풀린 덕에 편한 자세를 취했다.

“대공비는 사고 잘 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안 그래도 궁금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이혼 불가 조항 말입니다. 대공비 성격 때문에 들어간 거 맞습니까?”

“하하하, 이런…….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차가워 보이던 다나한의 인상이 웃음 한 번에 확 변했다.

“다른 것은 뭐가 궁금하십니까.”

“대공비가 검술에 관해 천재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거기서도 그 이야기를 했군요.”

어쩐 일인지 다나한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돌았다.

의외의 반응이라 체드란은 조금 놀랐다. 분명 당당히 천재라는 말을 뜯어내는 나엘라를 상상했건만 그 속내는 다른 모양이었다.

“말 못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좋지 못한 이야기는 맞는가 봅니다.”

작게 한숨을 쉰 다나한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체드란은 상관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사람은 옳은 선택이 어떤 것인지 늘 알고서 행동하진 않는다.

때로 옳다고 믿은 것들이 어느 순간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느끼기도 하고, 그로 말미암아 후회를 하고 나서야 깨닫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흔하게 말하지 않던가. 잃고 나서야 소중한지 알았다고.

나엘라의 아버지는 적어도 소중한 것이 무엇인진 알았다. 그러나 옳다고 믿어 행한 행동에 잃을 수도 있음을 몰랐을 뿐이었다.

일곱 살 나엘라의 어느 여름날, 바람이 선선해 테라스 문을 열고 잠들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그날따라 잠이 안 오던 나엘라가 어머니와 함께 자겠다며 공작부인의 침실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당시 쓸모없는 아이 취급을 받던 나엘라가 유일하게 애정을 갈구하는 이는 공작부인뿐이었다. 또한, 유일하게 애정을 나누는 이였다.

누군가는 팔불출 같은 공작의 모습에 어렸을 때부터 사랑받고 자랐겠거니 생각하지만, 실상은 냉대받고 무시받던 아이였다.

아버지와 말을 나눠 본 횟수는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었고 왜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첫째인 단제는 당시 황실 기사단에 신임 기사로 막 입단했을 때라 자주 보지 못했다. 어쩌다 보게 되어도 나엘라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인사 한번 없이 가만히 바라보다 사라지기 일쑤였다.

둘째인 다나한은 검에 미쳐 있었다.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검을 휘두르고 밤새 훈련하며 몸을 학대하다시피 움직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엘라와 마주칠 일 또한 없었다.

바쁜 아버지와 오라버니들, 그들의 무시 속에서 나엘라는 자연히 어머니의 애정을 집착적으로 갈구했다.

가장 좋아하던 강아지 인형 하나, 그리고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어머니.

이게 나엘라의 세상 전부를 차지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던 어느 여름밤,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고 어머니 품속에 안겨 있던 나엘라는 물었다.

“아버지는 왜 저를 미워하세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무슨 표정을 지었던가. 촛불 하나 없이 은은한 달빛만 들어오던 침실이었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훤히 보였다.

“아버지는 나엘라를 미워하지 않아.”

“거짓말.”

“너무 사랑해서 그래. 그래서 무서운 거야.”

“아버지가 뭘 무서워해요? 아버지는 무서운 거 없어요.”

나엘라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날 아침에 보았던 아버지의 차가운 표정이 훤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나엘라를 밀어냈다. 나엘라가 공부하던 책은 찢어 버렸고, 집무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항상 문을 잠갔으며 환하게 웃는 그녀를 무시로 일관했다. 아버지의 그 손동작, 숨을 몰아쉬는 속도, 미세하게 떨리던 눈가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버지는 겁쟁이란다, 나엘라.”

“아닌데…….”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일 뿐이야.”

“나는 가족이 아니라서 안 지켜 주나 봐요.”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하진 않을게. 다만…… 먼 훗날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겠니?”

그때 나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나엘라는 잠에 빠져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기엔 너무 어렸다.

꿈속에서도 어머니와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그곳에 아버지나 오라버니들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머니는 나엘라를 끌어안고 급히 기사들을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호칭도 없이 이름을 불러 댔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나엘라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감각만 생생했다. 어머니의 배를 뚫고 나온 단검과 뿜어지는 피 분수, 그리고 뜨거울 정도로 따뜻했던 피와 단검에 찢어진 옷자락, 피로 물들어 가는 얼룩의 모양 같은 것들만 선명히 떠올랐다.

그 뒤로 들이닥치는 기사들과 도망치는 암살자들의 그림자, 절망으로 일그러진 표정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숨이 천천히 멎어 가던 것, 떨어지지 않으려는 나엘라를 집사가 억지로 떼어 내던 것, 나엘라가 붙잡았던 어머니의 팔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장면까지. 전부 생생했다.

나엘라는 나쁘지 않은 기억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 그때 뒤엉킨 소리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전부 소리 없는 동작들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나엘라는 죽기로 했다. 어머니가 죽어 다시 뵐 수 없으니 나도 죽어야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방 안에 있던 호신용 단검으로 살짝 배를 찔러 보았다. 그런데 너무 아팠다.

이 고통 속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이왕이면 똑같은 방법으로 죽고 싶었는데 그게 살짝 아쉬웠다.

결국, 아프지 않고 죽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길래 밥을 굶었다. 하루 이틀은 조금 힘들었는데 사흘째가 되니 아무 생각도 안 나고 힘들지도 않았다.

본능적으로 이렇게 버티면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한 와중에도 쉬운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길 한참, 얼마나 지났는지 세기를 포기했을 적이었다. 애걸복걸 물이라도 한 모금 마셔 달라는 하녀들과 집사들 사이에서 아버지가 나타났다. 이상하게 그때는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다.

아버지는 들어오자마자 억지로 물을 먹이려 했고 나엘라는 위액까지 토해 냈다. 그러다 뺨도 몇 대 맞았다. 눈앞이 번쩍하며 너무 어지러워 기절했다.

누군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붉게 물든 아버지의 눈동자였다. 아버지가 다시는 내게 손대지 않겠다며 꼭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눈동자만 조금씩 움직여 아버지를 바라보자 자신과 같은 보라색 눈동자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제발 살아 달라고, 너마저 잃을 수 없다고 울며 애원하던 아버지를 응시했다. 이상할 만큼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무엇을 바라는지 자꾸만 말을 걸었다.

나엘라는 결국 물 한 잔을 마셨다. 너무 시끄러워서 머리가 다 울렸다. 몇 번 게우긴 했지만 일단 간신히 삼켰다.

그다음 날 아침에는 둘째 오라버니가 찾아와 울었고, 점심에는 첫째 오라버니가 찾아와 울었다. 나엘라가 알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어머니에게 빨리 가고 싶을 뿐인데 다들 왜 이리 시끄럽게 구는 거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억지로 뭘 좀 삼켰다.

방 안에 누워 있는 생활은 똑같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엘라의 방을 제 방인 양 들락거리는 세 사람이었다.

신임 기사가 어떻게 수도에서 내려온 것인지 단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검에 미친 것처럼 살던 다나한은 한동안 연무장에 나가지 않는 듯 보였다.

사실 나엘라의 눈에는 그저 알 수 없는 기행이었다. 그냥 잠깐 스쳐 지나갈 이상한 행동들. 궁금하지 않아서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 오라버니의 품에 안겨 정원엘 나갔다. 단제의 품에 안긴 것도 처음이지만 정작 놀란 것은 다른 이유였다. 정원에 선 나엘라가 10분도 안 되어 쓰러졌다는 것이다.

화장실 갈 때도 힘들긴 했지만 단제에게 끌려다니는 정원 산책 10분 만에 쓰러질 줄은 몰랐다. 어쩐지 다리가 이상하게 후들거리더라니.

그때 나엘라는 두 번 다시 단제와 산책하러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자는 대로 했더니 자신을 쓰러지게 만들었다. 단제도 양심이 있다면 자신을 두 번 다시 건들지 않겠지.

하지만 단제는 양심이 없었고 나엘라는 그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매일같이 안겨 나오던 나엘라는 한 계절이 지나기 전 30분 정원 산책이라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강아지 산책인 양 끌려다니기만 했음에도 체력은 느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이 형제가 나엘라를 작정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부터는 다나한의 품에 안겨 연무장에 내려졌다. 망할 단제는 무슨 일 때문인지 급하게 수도로 돌아갔고 한동안 보지 못했다.

그때쯤에는 나엘라의 짜증이 최고치에 달했다. 하자는 것들도 군말 없이 다 했고 게워 내지 않을 정도로 음식도 먹지 않았나. 그런데 자신의 손에 결국 목검까지 들려 주다니. 이걸로 찌르면 죽일 수 있을까란 생각도 했다.

똑같은 자세로 똑같이 검을 휘두르라니.

연무장을 뛰라니!

다나한이 인생 최대의 악당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제발 자신 좀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왜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자신이 그리 미울까. 억지로 밥을 먹이고 억지로 끌고 다니고, 역시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짜증이 가득 나서 건성으로 검을 휘두르는 나엘라의 옆에는 꼭 아버지가 있었다. 오늘도 언제쯤 쓰러지는 척을 해야 어색하지 않을까 각을 재던 그때,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나엘라는 검술의 천재구나.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다.”

그 말에 더욱 흐느적거리며 검을 휘두르는 나엘라는 보이지 않는지 아버지는 계속 칭찬을 늘어놨다. 심지어 다나한도 옆에서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르는 각도도 완벽하고 눈빛조차 살아 있구나. 천재라서 재능이 남다른 것 같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저렇게 검을 잘 휘두르는 아이는 처음 봅니다.”

“제국 최고로 검을 잘 쓰는 일곱 살이다. 이것 참, 누군가 본다면 놀라서 쓰러질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다른 이에게 알리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검을 너무 잘 쓰니 시기하는 이들도 생기겠군요. 물론 제가 지켜 줄 테지만요.”

계속 감시하는 두 사람 때문에 나엘라는 쉴 수도 없었다. 속으론 계속 불만이 쌓여 가는데 표현하기도 귀찮아서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안 하면 더 귀찮게 할 테니까. 언젠가는 저들도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잠깐의 여흥은 곧 끝날 것이다.

“검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구나. 나엘라, 조금만 더 하면 훌륭한 기사가 될 것이다.”

“아버지, 나엘라는 여자아이인데요?”

“여자아이라고 기사가 되지 말라는 법 있더냐. 나엘라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다. 나엘라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모든 들어줄 것이다.”

어떻게 저리 말이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다섯 마디 이상 잇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수다쟁이들이었다.

“너는 하고 싶은 걸 모두 하고 살 거라. 이 아비가 못나서 가장 중요한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나엘라도 언젠가는…….”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차라리 미워해. 마호세르디를 나가고 싶다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줄 것이다.”

딱히 마호세르디를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나엘라는 순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그냥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끼니마다 다 같이 먹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오로지 그것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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