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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42)화 (42/220)

41화

그렇게 또 시간이 한참 지났다.

시간 감각이 없던 시기라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야 나엘라는 계절이 바뀐 것을 알았다. 자신은 여전히 조금 먹었고 누가 끌고 오지 않는다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연무장에서도 매번 똑같은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물론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조금 체력이 붙어 횟수를 더 늘렸을 뿐.

하지만 아버지와 다나한은 한결같이 나엘라가 천재라며 대단하다고 말했다.

“훌륭한 기사가 되겠구나. 물론 다른 것이 하고 싶다면 언제든 말해도 좋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 빼고.”

“검술 실력이 뛰어나니 보다 많은 사람을 지킬 수 있겠군요.”

나엘라의 목검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그녀를 멈추게 한 말이 있었다. 제대로 된 사고도 이뤄지지 않을 만큼 멈춰 버린 머릿속에 강렬하게 꽂힌 말이었다.

“그렇겠지. 나엘라는 조금만 노력한다면 이 아비도 뛰어넘을 거야.”

“검은 방패 기사단으로 들어와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호세르디를 수호하는 멋진 여기사, 어떻습니까?”

나엘라의 검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자 평소처럼 대화하던 이들이 나엘라를 보며 흔들리는 눈빛을 보냈다.

평소와 다른 패턴이었다. 나엘라가 무언가에 반응한 것이다. 그녀의 입술이 작게 열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징후에 모든 이들이 말도, 행동도 멈췄다.

“기사가 되면…….”

콜록콜록─

반년 만에 말을 해서일까, 겨우 몇 마디에 나엘라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늘 침착하던 집사가 당장 물을 가져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엘라에게 밥을 먹이겠다고 울고불고했을 때 이후로 처음 이성을 잃은 날이었다.

기침이 자꾸 터져 나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나엘라는 꼭 물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기사가 되면 누군가를 지킬 수 있어요?”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나엘라의 초점이 또렷이 돌아왔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

붉어진 눈매를 하고 아버지가 천천히 다가왔다. 모두가 숨죽이며 반년 만에 대화를 나누는 부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지키며 살고 싶으냐.”

“내가 검의 천재예요?”

“그래. 누구보다 강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거다.”

“……미리 검을 배웠다면 어머니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두 팔을 살짝 붙잡은 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연무장 흙바닥 위로 물 자국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강하던 아버지가 그동안 얼마큼 무너졌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무감했다.

“아니야……. 아니다, 나엘라. 그것은 모두 이 아비의 죄다. 그러니…….”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앞만 생각하며 살아라. 강한 기사가 되면 네게 소중한 많은 이들을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젠 소중한 사람이 없는데요?”

“앞으로 생길 것이다. 이 아비가 네게 소중한 이들을 많이 만들어 주겠다.”

“어머니만큼이요?”

“어머니보다 더 소중한 사람도 생길 거다.”

정말일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엘라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근거 없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대가 가슴 한구석에 피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나를 믿어다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검을 들어다오. 밥을 먹어서 건강해지고 건강한 몸으로 검을 휘두르렴. 그렇게 강해지면 된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다.

나엘라에게 검이란 무엇인가를 알려 줬던 말이었다. 왜 강해져야 하는지, 왜 검을 휘둘렀는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처럼 지키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분명 아버지가 소중한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번만큼은 믿고 싶었다. 그러니 미래에 만날 인연을 지키기 위해서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일곱 살 끝자락에서 나엘라를 다시 살게 한 말이 되었다.

소중한 것을 잃어 봤으니 다신 잃지 말아야지. 검을 열심히 훈련해서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지켜야지.

그러니 약속을 지켜 주세요.

“아버지.”

뒤에 선 다나한은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울면서 웃는 그런 모습이었다.

“저 밥 먹을래요.”

입을 뗐다 다시 악물길 반복하던 아버지는 간신히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고맙다. 살아 줘서 고맙다, 나엘라.”

아버지는 결국 나엘라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

그때의 감정이 올라와 목이 메는지 다나한은 작게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었다.

“그 뒤로도 마음을 금방 열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많이 노력하셨죠. 다만 검에 관해선 열심히 노력하더군요.”

“그럼 천재라는 말은…….”

체드란의 물음에 다나한은 작게 웃었다.

“나엘라가 힘을 내도록 만드는 말입니다. 천재니까 할 수 있다고, 어렵지 않다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고 다독이는 거죠.”

“그렇군요.”

“뭐…… 솔직히 검에 재능이 있긴 했지만 천재까진 아니었습니다. 나엘라는 정말 엄청난 노력파입니다. 검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검 말고 다른 것에 더 뛰어난 것 같던데.”

“아아, 엄청나게 똑똑하죠? 그날의 영향인지 자기감정에는 엄청 둔합니다. 그런데 머리가 좋아 다른 사람의 감정은 잘 읽는 편이죠.”

“본인은 조금 좋은 편이라고 하던데요?”

다나한이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아버지는 나엘라가 똑똑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책을 몇 번 보고 모두 외워 버리는 나엘라에게 놀라 책을 모두 찢어 버린 일도 있었죠. 그래서 계속 세뇌하듯 말했습니다.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나중에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잘 안 믿더라고요. 천재라 말하면 공부까지 얼마나 더 노력할지 몰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공작께서 대공비가 똑똑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건 어렸을 때 냉대받던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다나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겁니다. 방법을 몰랐습니다. 지켜야 할 건 많은데 황제는 교활했죠. 황제의 계략으로 단제 형님이 황실 기사단에 입단을 해 모두의 약점이 되었습니다. 사실 검의 진짜 천재는 형님이셨으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보여 황제가 탐을 냈습니다.”

“거절을 못 하도록 만들었겠군요.”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검은 방패 기사 단장의 자리는 원래 형님 것이었죠. 그땐 아버지도 제정신이 아니셨습니다. 저까지 뺏길까 봐 평생 쥐었던 검을 놓으셨습니다. 더는 체력이 안 된다는 핑계로 자리를 제게 물려주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마호세르디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야 황제가 포기할 테니까요.”

“여러 사람에게 지독한 늙은이죠.”

체드란의 말에 다나한은 찡그리듯 입꼬리를 올렸다. 많은 감정이 섞여 보기에도 무척 썼다.

“저는 형님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검만 휘둘렀고, 아버지는 사랑받지 않는 자식이어야 약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택에 있는 가족들에게 나엘라를 챙기지 말라고 하셨죠.”

“공작부인께서는 그걸 못 하셨겠군요.”

“못 하셨죠.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요. 지키기 위함이니 사랑을 주지 말라는 게. 형님은 모든 문제의 시작이 본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제고 책임을 지겠다 각오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약점이 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하셨어요. 누구든 형님이 잡히면 제대로 못 움직일 테니까요.”

“마호세르디도 말 못 할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황제의 대한 욕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체드란은 울분과도 비슷하다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각자 정신이 나가 있었죠. 변명은 아닙니다. 제가 오롯이 안고 갈 죄입니다. 용서받을 생각도, 이해받을 생각도 없습니다.”

“대공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강한 기사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무언가 잘못됐다고 아버지께서 처음 느끼셨을 때, 저희를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나엘라만은 지켜야겠다고, 마호세르디가 처음으로 황권에 반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때가 계기였군요.”

공작의 다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제국과 함께 역사를 쌓았던 마호세르디가 그 모든 역사를 반하는 행동을 맘먹은 것이다. 마호세르디가 제국의 칼로서의 오랜 명예와 자부심을 내려놓겠단 결심이었다.

“처음에는 나엘라가 무엇이라도 하려는 것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난 후에는 생각이 달라졌죠. 만약 우리의 일이 실패할 경우 나엘라라도 혼자 도망칠 수 있도록 교육시키겠다고요.”

“대공비가 과연 도망갈까요? 제일 먼저 죽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요. 그때는 몰랐는데…… 너무 과하게 잘 컸습니다.”

“너무 잘 커서 대공비는 노헤스카도 열심히 키우는 중입니다.”

다나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엘라를 처음 겪은 이들이 얼마나 곤란해했을지 눈에 훤했다.

“그러고 보니 지안이나 프리야는 잘 있습니까?”

“지안은 자주 보지만 프리야라는 하녀는 이름이랑 얼굴만 아는 정도입니다.”

“평상시 프리야는 좀 조용하죠. 조심하십시오. 그 둘이 가장 유별나니까요. 대공이 나엘라에게 잘못하는 순간 가장 먼저 검을 뽑을 독종들입니다.”

“지안은 그럴 것 같긴 했는데 프리야라는 하녀는 잘 모르겠군요. 말 한마디 나눠 본 적이 없습니다.”

“유별날 수밖에 없는 사정들이 있습니다. 지안은 자신의 부모를 직접 죽였고, 프리야는 아버지를 죽여 주기로 약속받았죠. 자세한 이야기는 나엘라에게 들으십시오.”

“대충 들어도 가벼울 수 없는 내용이네요.”

“처음에는 그저 나엘라를 지키기 위해 검이나 가르치려고 모았는데,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둘은 대화를 멈추어야 했다. 막사 밖에서 한 기사가 체드란을 불러 나가 봐야 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체드란은 그대로 막사를 빠져나가려다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공작부인을 살해한 암살자는 누가 보낸 겁니까?”

다나한은 살며시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어떤 각오와 살기가 뒤엉켜 있었다.

“나엘라도 모르는 비밀이라 대공께도 비밀입니다. 다만 대공께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말씀드리자면 페트론 황자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고만 알아주십시오.”

체드란은 그때의 날들이 떠올라 실소가 나왔다. 페트론이 보낸 암살자에게 시달리던 시기와 마호세르디의 참극이 일어난 시기가 같다니. 암살자들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다루던 이들이야 뻔하다.

황제, 황후, 페트론. 셋 중 하나일 터.

“대공비가 죽어 가고 있을 때, 저도 같이 죽어 가고 있었겠군요.”

딸을 애지중지하는 공작이 자신과 나엘라를 혼인시킨 것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같은 적을 두고 같은 분노를 품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나 동질감을 느껴서.

“나엘라가 보고 싶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다나한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웃었다.

“편지 하나 쓰지 않는 오라비인데 과분한 사랑을 받습니다. 저도 많이 보고 싶다고 전해 주십시오.”

체드란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나섰다.

그는 문득 나엘라가 보고 싶어졌다. 단순히 애정이나 호의가 아닌 살아 있는 나엘라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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