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나엘라가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고 귀를 매만졌다.
“누가 내 욕을 하는 것 같아.”
그녀를 보좌하던 지안과 프리야가 연달아 말했다.
“누군지만 알면 당장 칼을 들고 찾아가는 건데.”
“그럴 리가요. 세상에 나엘라 님을 욕할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
가장 붙여 놓으면 안 되는 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떠올린 나엘라는 조용히 다시 편지를 들었다.
안에는 베르에티가 곧 황후의 사람들과 접선할 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신 접선 장소에는 루부스 후작이 직접 나간다고 적혀 있었다.
루부스 후작이 딸을 위해 진심으로 움직일 마음을 먹었나?
나엘라 측에선 환영할 만한 결과였다. 후작 영애가 나서는 것보다 후작 본인이 나서는 것이 황후에겐 더 믿음이 갈 테니까.
대신 루부스 후작은 바쁘다는 핑계로, 베르에티를 자주 황후 측 모임에 오가게끔 이야기를 해 놓겠다고 전했다.
황후도 루부스 후작보다는 베르에티를 만나는 것이 대외적으로 자연스럽다 여길 터였다. 그럼 그녀가 후작과 황후의 연락책인 척하면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나엘라는 편지지에 앞으로 주의할 점과 어떻게 행동할지를 적어 넣었다.
“이 정도면 루부스 후작가는 얼추 됐군.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나엘라가 이것저것 가늠하고 있을 때 지안이 얼른 대답했다.
“기사단 보수입니다.”
“저택이나 기사단 숙소 보수는 마든이 알아서 하기로 하지 않았나?”
“국경군과 영지에 주둔할 기사단들의 갑옷이나 검들을 보수하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지. 그건 내가 직접 하기로 했지.”
나엘라는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손봐야 할 곳이 자꾸만 보여 걱정이었다.
황가의 일을 처리하려면 체드란은 오래 자리를 비워야 한다. 그사이 영지에 문제가 없어야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 게다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노헤스카 기사단은 계속 전시 체제를 유지해야만 했다.
체드란이 없는 노헤스카를 노릴 두칸도 대비해야 하고, 여차하면 영지군이 수도로 진격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했다.
“갑옷이나 검은 직접 봐야 하는데…….”
“노헤스카 내에 군사들을 모두 감당할 대장간이나 장인들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 마호세르디에 남는 물자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군. 갑옷이나 검은 마호세르디를 따라갈 곳이 없으니까.”
“그럼 마호세르디 군수 관련 담당자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말 나온 김에 노헤스카에 있는 대장간들을 둘러봐야겠어.”
나엘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안과 프리야가 빠르게 움직였다.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중앙 현관 앞에서 대기하던 마차에 올라탔다. 그새 소식을 들은 건지 론체가 호위기사를 자처하며 마차 옆으로 따라붙었다.
아롱인지 다롱인지 하는 부단장은 지금 기사단 개편 때문에 엄청 바쁜데 어딜 가시냐며 눈물지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의아한 것은 마든도 따라가겠다며 얼른 마부 옆자리를 꿰찬 것이다. 무슨 집사가 저택을 비우는데 이리 거리낌이 없는지.
“노헤스카의 지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대장간으로 안내하죠.”
그 한마디에 나엘라는 마든의 직무 유기를 묵인했다. 곧이어 영지 외곽에 있는 대장간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이곳이 대장장이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아무래도 군사 경계 지역에 있는 대장간의 특성상 늘 일이 많습니다. 물량을 맞춰야 하니 서로 모여 작업하는 게 편할 테고요. 그래서 노헤스카도 대장장이 마을이 따로 있습니다.”
마차 안과 연결된 마부석 창으로 조잘조잘 들려오는 마든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대장장이나 대장간에 대한 건 마든보다 나엘라가 훨씬 잘 알았다. 거기서 한동안 살다시피 한 적도 있는데 설마 기본적인 생리를 모를까.
나엘라가 시끄럽다는 티를 내자 지안이 인상을 쓰며 마부석 창을 확 닫아 버렸다. 갑자기 닫힌 창에 코가 잘릴 뻔했다며 징징대는 소리가 벽 너머로 들려왔다.
더 이상 그 소음을 참아 주기 어렵다 생각했을 때쯤, 마차가 멈추었다.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나 보다. 론체가 얼른 나엘라를 에스코트했다.
“여깁니다.”
마을 끝에서부터 확 풍겨 오는 열기와 쇠 냄새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나엘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지안과 프리야, 호위 기사들과 마든까지 얼른 따라붙었다.
그 와중에도 마든은 나엘라의 옆에 붙어 열심히 말을 했다. 오랜만에 외출이라 들뜬 건지 깊게 끌던 고민을 끝낸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 온 대장장이가 한 명 있습니다. 대공비 전하의 마음에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호세르디에서 온 대장장이랍니다. 엄청난 실력을 갖췄다는데, 덕분에 다른 대장장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마호세르디의 기술을 볼 기회니까요.”
나엘라가 잘 가던 걸음을 뚝 멈췄다.
“마호세르디에서 왔다고?”
“예! 역시 흥미가 생기시죠?”
“대체 왜?”
“예?”
“마호세르디가 지원도 훨씬 좋고 돈도 훨씬 많이 벌 텐데 뭐하러 노헤스카에?”
“그, 그렇죠?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뭐지?”
“뭐라더라…… 조페론? 조알론?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망할 조알론! 제정신 아닌 인간 같으니라고!”
난데없이 버럭 소리친 나엘라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아니, 어딘지 아시고 가십니까?! 그리고 그자가 누군데요?!”
놀란 마든이 얼른 따라잡으며 외쳤다.
“조알론이 살 곳이야 뻔하지! 가장 구석, 마을과 조금 떨어진 대장간!”
얇은 원피스를 한 손에 틀어쥐고 뛰는 나엘라는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마든은 더 물어보지 않고 그저 열심히 따라 뛰었다.
*
대장장이들은 의외로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터프한 이미지완 다르게 엄청나게 예민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온도로 쇠를 달궈 모루 위에 올리고 망치로 쇠를 내리쳐 모양을 잡는 단조 작업은 섬세함, 예민함,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조알론 또한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그 성격은 작업 중일 때 가장 극에 달했다.
1차 단조, 2차 단조, 계속 이어지는 단조 작업은 엄청난 열기를 내뿜으며 이루어진다. 검이나 갑옷의 모양, 용도, 착용자의 습관, 거기에 체구까지 고려해 섬세히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조알론은 마호세르디에서도 손꼽히는 장인이었다.
물론 조알론의 명성이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절대 만나선 안 되는 이를 만나 오래도록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조알론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기사단 하나에 달하는 작업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의 감시 속에서.
그것이 예민한 사람에게 얼마나 피 말리는 압박이 되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환경들이 조알론을 성장시켰다. 나중에는 감시 따위나 주변 환경에도 미동 없이 망치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워낙 척박한 환경에서 작업을 많이 했기에 온도를 조절하는 온갖 편법, 쓰레기 같은 도구만 있을 때의 대처법 등을 익혔다.
결국, 조알론은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따위의 칭호를 하사받으며 눈물 흘린 적도 있었다. 척박한 환경을 버틴 자신이 너무 대견했다.
망할 계급 사회, 망할 지배 계층, 망할 귀족.
늘 조알론이 달고 사는 말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지옥 같던 마호세르디를 벗어나 다른 군사 경계 지역인 노헤스카에 정착했다. 아무래도 하던 가락이 있는지라 일반적인 영지는 성에 차지 않았다. 수요와 공급이 많은 지역을 고르다 보니 자연히 노헤스카를 선택한 것이다.
사실 노헤스카밖에 없었다. 동부와 북부는 바다와 맞닿아 조알론의 방식으로는 해상 전투에 걸맞은 무기들을 만들 수 없었다.
탕─ 탕─
오늘도 조알론은 물아일체의 경지를 느끼며 망치와 하나가 되고 있었다.
후욱─ 후욱─
망치질할 때 잠시 멈췄던 숨을 몰아쉬곤 마지막 단조에 들어갔다. 완벽한 두께와 완벽한 형태를 위해 점점 집중력과 감각을 예민하게 가다듬을 때였다.
이제 딱 한 번, 마지막 망치질을 위해 힘껏 내리치려던 순간─
쾅─!
누군가가 발로 찬 듯 굉음과 함께 대장간의 문이 부서졌다.
“조알론!”
탕─!
마지막 망치질이 누군가의 부름과 함께 잘못된 곳을 가격했다. 곧은 선을 갖고 있던 검이 한순간에 고철이 되었다.
“조알론! 왜 대답을 안 하나!”
단조 작업장은 대장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와야만 보인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인간은 찾지 못했는지 연신 소리만 질렀다.
조알론은 천천히 망치를 내려놓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 때문에 익숙하던 공간, 익숙하던 마호세르디가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지옥 같던 그 시간도……!
“여기 있었군.”
대장간을 뒤져 조알론을 찾아낸 불한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헬렐레 풀어 헤쳐 놓아 조알론의 눈에는 더 귀신같이 보였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보라색 눈동자도, 반갑다며 제 팔뚝을 있는 힘껏 내리치는 힘도 여전했다.
보라색 눈동자의 기사님이 너무 멋있다고, 당시 마을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렇게 떠들어 댔었다.
저 눈동자가 어떤 귀족을 뜻하는지도 모를 만큼 평범한 여인들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저 속에 감춰진 지독함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랬을까.
귀신같은 인물의 뒤를 따라온 하녀들도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이었다. 대장간에 상주하다시피 들락거리던 나엘라를 찾겠다며 자기들 마음대로 들락거리던 인물들이었다.
“흠흠, 노헤스카 대공저의 집사 마든입니다. 대장간 문의 수리비는 청구해 주십시오.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앞이네. 행색을 말끔히 하도록. 당장 옷을 찾아 입게.”
거기에 웬 이상한 잿빛 머리 쭉정이와 중년 기사까지 추가됐다니.
왜 이 사람 주변에는 이상한 인간들만 가득할까. 친구라던 하일모라라는 귀족 영애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노헤스카에는 언제 온 건가?”
가만 보니 나엘라는 늘 익숙하던 훈련복이 아닌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더러운 의자를 꺼내 털썩 주저앉아서일까. 나엘라의 태도가 여전해서일까.
물론 여전한 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나엘라가 앉기 전 빛의 속도로 손수건을 까는 모습조차 뻔한 수순이었다.
“인사는 합시다.”
툴툴거리는 말투에 론체가 인상을 썼지만, 나엘라가 손을 내저었다. 조알론은 모르는 듯했으나 태도가 여전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