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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44)화 (44/220)

43화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보아하니 어디 아픈 덴 없나 보군. 그래서, 노헤스카에는 언제 왔지?”

“얼마 안 됐습니다.”

“여기서 자네를 보게 될지 몰랐네. 안 그래도 한번 연락을 넣으려고 했거든.”

“뭐…… 반갑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네, 일거리 많은 거 좋아하지 않나? 여기 잔뜩 쌓여 있다네.”

“도대체 제가 언제……!”

조알론이 벌떡 일어나자 론체가 바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화를 꾸욱 삼킨 조알론은 이를 아득바득 갈며 다시 앉았다.

“일을 잔뜩 갖다 주니 실성한 것처럼 웃으며 망치질을 하던 자네가 잊히지 않았네.”

“그건 진짜 미쳐서 실성한 거였습니다.”

“저런, 얼마나 좋았으면.”

“좋아서 실성했겠습니까? 루엔 단장님께서 저를 전쟁터까지 끌고 가셨잖습니까!”

더는 저 중년의 기사가 검을 뽑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예민한 대장장이를 전쟁터 한복판까지 끌고 간 사람이 눈앞의 이다. 심지어 모닥불에서는 검을 수리할 수 없냐는 망언까지 했었다.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망치와 도구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기습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날린 일도 허다했다. 인제 와서 기사들이 무서울 리가 있겠나.

“대장장이를 전쟁터에 끌고 가셨습니까?”

“루엔 단장이요?”

다행히 중년의 기사와 집사는 다른 말에 더 꽂혔는지 조알론의 태도를 탓하지 않았다.

“아아, 내 가명일세. 신경 쓰지 말게.”

나엘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내저었다.

“가명도 쓰셨습니까? 근데 단장이요? 기사단 단장이셨습니까?”

론체는 단장이라는 단어에 눈을 크게 떴고, 마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알론과 반가운 인사도 나누고 이야기도 좀 해야 하는데 방해자가 너무 많았다. 밀려오는 짜증에 나엘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든, 반트모어 경, 내가 옛 지인과 잠시 이야기 좀 나눠도 되겠나?”

나엘라의 언짢은 기분을 눈치챈 론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마든도 얼른 입을 다물었다. 더군다나 조알론을 지인이라고 지칭했다. 나엘라와 동등히 대우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조알론은 달갑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그대는 요즘 일 좀 하고 있나? 여기는 마호세르디와 달라 일하기가 수월하지 않을 텐데.”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 수도 출신입니다. 마호세르디가 고향이 아닙니다.”

“마음을 주었으면 그곳이 고향이지. 자네 마호세르디 좋아하지 않았나. 그것도 아니라고 할 텐가?”

조알론은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마호세르디를 좋아했던 이가 어디 자신뿐이던가.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곳이다.

마호세르디 가문 아래서 모든 직업은 존중받았고 대장장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위 귀족 가문이 운영하는 영지답지 않게 차별이 없던 곳이었다.

다만 자신만 존중받지 못했다. 대장장이를 전쟁터로 끌고 가다니, 아직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단장님과 다시 일할 생각, 없습니다.”

“그래?”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그렇군.”

나엘라가 손에 턱을 괴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근황이나 얘기하지. 그래도 오래도록 붙어 있던 사이가 아닌가.”

“제 의지는 아니었죠.”

“내가 그대를 좋아해서 그랬지. 그대만큼 검에 애정이 있던 이는 없었으니까.”

“크흠.”

조알론은 괜히 민망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도구들을 발로 쓱 밀었다. 여전히 사람의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이였다.

“그런데 정말 몰랐군. 전쟁터에서 그렇게 힘들어했을 줄은 몰랐어.”

그간의 제 주장은 어디로 들은 건지. 조알론은 울컥했으나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엘라는 정말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어쩌겠는가, 결국 따라간 것은 자신인데.

하필 가장 혈기왕성할 때 나엘라를 만났고, 그녀가 왜 그렇게 대장간을 들락날락했는지 알아서 문제였다.

아직도 나엘라를 처음 만났던 날이 선명하다.

검을 잘 쓰고 싶으니, 검에 대해 공부하고자 찾아왔다며 무턱대고 엉덩이를 붙였다. 온종일 덥지도 않은지 화로 옆에서 얼굴이 시뻘게진 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검을 이해해 보겠다고 했었나.

그 말에 대장간 한쪽을 허락한 것이 문제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전쟁터였다.

전쟁터에서 그때그때 검을 수리하고 갑옷을 관리해 주면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지 않겠냐고 했던가.

그 말에 홀려 조알론은 나엘라의 뒤를 따랐다.

그래, 그래도 갑옷이나 검을 더 잘 아는 이가 수리도 하고 관리도 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갑옷이 조금 더 튼튼하게 유지가 되면, 칼이 조금 더 날카롭게 유지되면, 그럼 한 명이라도 더 살지 않을까. 되지도 않게 나엘라의 생각에 물든 것이다.

하지만 전쟁터는 예상과 판이하게 달랐다.

매번 죽은 이들의 검이 수급됐다. 죽은 이들의 흔적을 지우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리했다. 정말 사람이 할 짓이 못되었다.

그래서 따지러 갔었다. 더는 못 하겠다고, 마호세르디로 돌아가겠다고. 대장장이가 매일 죽은 이들의 피를 닦기만 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하필 그때 죽은 부하를 보며 무릎을 꿇고 있는 나엘라와 마주했다. 눈물조차 없이 묵묵히 앉아 있는 모습에 뒤돌아왔다.

과연 전쟁터에서 저가 도움이 됐을까. 그때 자신은 몇 명이나 살렸을까.

고쳐서 다른 이에게 주라며 전해 준 갑옷이 하필 오랫동안 나엘라를 지켰던 기사의 것이어서.

하필 그 갑옷을 물려받은 이가 갑옷 덕에 생명을 구했다고 그리 말해서.

“조알론.”

살며시 웃는 나엘라의 얼굴이 전쟁터에서 보았던 표정과 달라서 안심했다.

“내가 노헤스카 대공과 결혼한다는 것이야 온 제국에 퍼졌으니 그대도 알았겠지.”

“뭐…… 알긴 알았습니다.”

“내 성격에 한 번쯤 대장간을 돌아다닐 거라는 것도 알았겠지.”

“아니 그다지…….”

그녀가 노헤스카에 있고, 노헤스카에 있는 대장간을 돌아다닐 걸 알았다고 한들 뭔 상관일까.

“노헤스카에 날 따라왔나?”

한 번쯤 만나리란 생각을 하긴 했었다.

조알론은 괜히 아까 망쳐 버린 검을 툭툭 쳤다. 얘기하는 동안 딱딱해져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녹여 처음부터 작업해야 할 것 같았다.

“전쟁터에 다녀온 것을 그대가 그렇게 힘들어했을 줄 몰랐네.”

조알론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래서 나엘라가 싫은 거다.

전쟁터가 지긋지긋하다고 그 한마디를 못 한 채 계속 있었겠는가.

자신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나엘라의 모습에 말할 수가 없었다. 매번 시신들을 하나하나 챙기는 얼굴이,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 아등바등하는 꼴이, 혼자 돌아가겠다는 조알론의 마음을 만류했다.

“이번에도 전쟁에 따라가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두 번 다시 갈 생각 없습니다.”

그래도 나엘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또 부탁해 오지 않을까?

조알론은 어쩌면 머지않을 제 미래를 떠올렸다.

그럼 또 차디찬 땅바닥에서 천 하나만 깔고 자거나 아무 강물이나 떠먹다 탈이 나는 경우도 있겠군.

아니지, 이때까지 고생한 게 있는데 그때와 똑같을까. 훨씬 만반의 준비를 하겠지.

“대신 노헤스카에서 다시 한번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조알론은 인상을 팍팍 찡그렸다.

대장장이라고 믿고 따를 주군이 없는 줄 아나. 결혼하게 됐다는 말만 틱 내뱉고 사라졌을 때 얼마나 충격받았었는지 알기나 할까.

섬세한 듯하다가도 무심한 저 성격이 얄밉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신이 나엘라를 아는 만큼, 나엘라도 저를 훤히 알아 더 문제였다.

나엘라가 씨익 웃었다.

“내일 대공저에 들리게. 그대는 당사자를 보아야 무기나 갑옷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기사들을 소개해 주지.”

하여튼 나엘라를 만난 후로 일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 평생 일하다 죽을 운명인 모양이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시 함께 일하게 되어 반갑네.”

“저는 그다지요.”

나엘라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체드란이 자리를 비운 지 이레째.

나엘라는 그동안 조알론을 데리고 다니며 기사들과 인사시켰다. 그러고는 정문을 지키는 호위병들이나 다른 사용인들에게 그를 보아도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 놓았다.

마호세르디의 유명한 장인이라고 하니 기사들은 기뻐하기 바빴다. 사용인들도 별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조알론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기에 대장장이 마을에서 괜찮은 사람을 더 차출했다. 추천받은 이들이 흔쾌히 받아들여 다행히도 수월히 진행되었다.

그 외에는 부부가 함께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티 파티에 다녀왔다. 자수 모임, 독서 모임, 음악 연주회 등 온갖 모임이 있었지만, 그곳들은 도저히 나엘라가 낄 수 없는 자리였다.

최소한으로 골라 연달아 열리는 두 가문의 티 파티에 참석했다. 하나는 줄리 부인의 티파티였고, 하나는 가신 가문 중 하나의 티 파티였다.

두 곳 다 대화의 주제는 비슷했다. 수도 사교계 근황, 근처 영지 근황, 요즘 유행하는 옷과 장신구 얘기들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빠질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대공비 전하를 그렇게 좋아하신다면서요?”

“뭐…… 조금 따라다니긴 하더라고요.”

“저번에 자수정 커프스를 하셨던데 대공비 전하의 눈동자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제가 악몽을 꾸는 게 걱정된다며 악몽을 쫓아 주는 보석까지 잔뜩 선물해 줬죠. 나중에는 온 방 안을 채워 준다고 하더라고요.”

“보석으로 방 안을 가득 채워 준다고요? 세상에!”

“조금 과하긴 하죠?”

“전혀요! 이렇게 로맨틱할 수가.”

파티에서 응대한 말이 어떻게 와전된 건지 수도에도 체드란이 엄청난 애처가라는 이야기가 잔뜩 퍼지고 있단다. 그가 이 소문을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절 좋아하는 건 맞지만 소문은 부풀다 못해 넘쳐흘렀다. 줄리 백작 부인의 말로는 죽고 못 산다더라 하는 말과 대공비가 없으면 불안해한다더라는 소문까지 돈다는데…….

어느 정도는 와전되길 바라기도 했고, 유도한 것도 맞긴 했으나 이쯤 되자 나엘라도 소문의 수위가 염려되었다. 체드란이 자리를 비운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소득이 아예 없진 않았다. 중간중간 나엘라의 귀를 열게 만드는 이야기도 있었다.

“살라만 후작가가 요즘 조용하네요.”

“살라만 후작가요?”

“아, 대공비 전하께선 결혼 전 마호세르디 저택에만 지내셔서 모르시겠군요.”

“그…… 황후 마마의 친정이시죠?”

“맞아요. 한동안 떠들썩했잖아요. 살라만 부인이 돌아오셔서.”

“그게 무슨 소리죠?”

사교계와 먼 삶을 살았던 나엘라로서는 황후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흥미가 다인 척 이야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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