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황후 마마의 언니분이세요. 바로아 살라만 후작 영애였다가 결혼 후 살라만 후작가를 떠났었죠. 그런데 석 달 전인가? 이혼하시고 살라만 후작가로 돌아오셨어요.”
“그래서 살라만 영애가 아니고 살라만 부인이라고 부르는군요.”
“본인이 그렇게 불리길 원했다네요. 결혼했을 때 이름은 버렸으니까요.”
황후에게 친자매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지만, 결혼 후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온 것과 살라만 후작가가 조용한 것이 무슨 상관일까.
나엘라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 부인이 몸을 낮추고 조용히 말했다.
“이건 비밀이에요. 저도 살라만 후작가의 먼 친척과 친한 사이여서 들은 이야기인데…….”
나엘라가 그녀를 따라 고개를 살짝 낮췄다. 함께 앉아 있던 이들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황후 마마가 첩의 자식이라면서요?”
“그거야 뭐, 아는 이들은 아는 이야기인데…….”
“그 뒤가 더 대박이에요. 그래서 바로아 살라만 부인이 어렸을 때부터 황후 마마를 엄청나게 싫어했대요. 들리는 이야기로는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손찌검?”
“네! 살라만 부인이 먼저 결혼한 후에 황후 마마께서 황제 폐하와 결혼하셨잖아요. 그러니 돌아온 살라만 부인을 황후 마마가 가만두겠어요? 그래서 다들 한바탕 난리가 날 거라 예상했는데…… 봐요, 조용하잖아요.”
나엘라에게는 뜻밖의 소식이었다.
귀족들은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졌기에 관계들이 이리도 복잡하단 말인가. 또 한편으로는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계산속에 넣었다.
물론 세상일이 생각하는 대로 굴러가겠느냐마는 사실 확인을 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 외에도 여러 소문을 들었지만 실속은 없었다. 대부분 누가 바람을 피웠네, 누가 사교계에서 무슨 실수를 했네, 추문만 가득했다. 남의 실수를 어찌나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침실 소파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하던 나엘라는 제니를 불렀다.
“황후와 바로아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마호세르디 쪽으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그리고 가린에게 마호세르디에 한번 다녀오라고 말해 줘.”
“뭐 때문에 그러세요?”
“요즘 마호세르디에서 자꾸 정보를 통제하는 것 같아. 가서 분위기는 어떤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오라 전해 줘.”
번지고 있는 사건들에 비해 나엘라에게 직접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적었다. 시론 후작가 이야기뿐만 아니라 살로만 가의 이야기도 몰랐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더 시키실 일은요?”
“귀족파가 움직이고 있으니 황제도 뭔가 조처하고 있을 거야. 그걸 확인해야 하는데…….”
“마호세르디에서는 알고 있을 겁니다. 가린에게 함께 확인해 보라고 하겠습니다.”
“가린에게도 정보를 주지 않을 수 있어. 황실 정보를 캘 다른 방법이 필요해.”
“그럼 프리야에게…….”
“그건 절대 안 돼. 아무튼, 다른 방법들을 생각해 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문제가…….”
“왜?”
“마든 집사장님이 자꾸 나엘라 님의 이전 소속을 물어봅니다. 어느 기사단 단장님이셨냐고요.”
나엘라의 입에서 절로 질렸다는 한숨이 나왔다.
오랜만에 조우한 탓에 호칭을 생각 못 했다. 조알론과 미리 만났다면 말을 맞췄을 텐데.
마든이 대장간에 돌아오는 길 내내 캐물어 함구령을 내렸더니, 그걸 제니한테 물어본 모양이었다.
그나마 제니가 말해 줄 것 같았나?
이름도 붙이지 않은 기사단을 어찌 명명한단 말인가.
“이름 없다고 하지.”
“안 믿습니다.”
“그럼 그냥 몰라도 된다고 해.”
“직급이 낮아 정보를 공개할 수 없다고 해도 되나요?”
“그 얘기를 들은 마든의 얼굴이 상상되네.”
분명 충격받은 표정일 게 뻔했다. 제니도 쉬이 대꾸하는 성격이 아닌데 마든이 어지간히 귀찮게 했나 보다.
그때 방문 근처에서 나엘라의 슬리퍼 위에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고 있던 지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옵니다.”
“누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든 집사장입니다.”
아니, 얼마나 주변에서 얼쩡댔으면 지안이 마든의 발소리까지 외웠을까. 나엘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 초 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든입니다.”
“들어오게.”
안으로 한 발짝 내디딘 마든은 깜짝 놀라 나엘라에게까지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방문 근처에서 지안이 그를 향해 바늘을 겨누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지안은 없던 일인 양 딴청을 피우며 자수판에 바늘을 꽂았다.
“흠흠, 좋은 아침입니다. 밤새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오늘 아침 식사에 제가 일부러 대공비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포도를 올리라고 했습니다. 그 포도로 말할 것 같으면 동부 바닷가 지방에서 해풍을 맞으며 키워 낸 포도로 단짠단짠의 극을…….”
“그만! 본론만 간단히 말하게.”
대체 포도가 달고 짜다는 게 무슨 말인가.
게다가 나엘라가 좋아하는 건 새콤한 청포도다. 오늘 올라온 포도는 지극히 평범한 맛의 보라색 포도였다.
아침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인사조차 줄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다름이 아니라…… 제가 오늘 어떤 소문을 들었는데 말입니다…….”
“말을 늘이지 말고 똑 부러지게 말하도록.”
“대공 전하께서 대공비 전하에게 미쳐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말입니다…….”
신기할 만큼 소문을 잘 주워 오는 자다. 나엘라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길래 말이 그렇게 험해졌는지 모르겠군.”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혹시 대공비 전하께서 그 소문에 일조하신 겁니까……?”
“나는 받은 선물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네. 내 주위에서 맴도는 것도 그렇고.”
실제로도 과장하거나 부풀려 답하지 않았건만 소문은 알아서 몸집을 키웠다.
“그러셨군요…….”
“대체 용건이 뭔가?”
변명을 늘어놓던 마든은 점점 찌그러지는 나엘라의 미간을 보곤 자세를 바로 했다.
“저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매우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대가 느끼는 것이 내게 중요한가?”
“더군다나 오늘 아침에 대공 전하께 연락이 왔습니다. 점심 식사 전에 돌아오실 것 같다고요.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 이 소문을 접하시기 전에 대공비 전하를 찾아온 겁니다. 두 분께서 말씀을 나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마지막 경고일세. 본론만 말하게.”
“대공 전하께서는 대공비 전하를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툭─, 지안이 들고 있던 슬리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좋아하지 않는단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사랑은 아니다 이거죠. 반트모어 경에게 들은 바론 대공비 전하께 이 얘기를 하면 어떻게 행동하실지 몰라 매우 난감해하셨답니다.”
나엘라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멍하니 마든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저 대공비 전하의 충신으로서, 나중에 민망할 일이 생기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마든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힘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진짜로 저는 충심에서 드리는 말입니다! 절대 두 분 사이를 갈라놓겠다는 못된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문으로 끌려 나가며 한마디라도 더하려고 발악하기에 제니까지 나서서 그를 쫓아냈다.
방문이 쾅 닫혔다. 바깥에서 마든이 열심히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엘라는 멍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동안 했던 말들을 되돌아보았다.
“체드란 님이 절 좋아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체드란 님도 저랑 닿고 싶으십니까?”
“만지고 싶고 잠자리를 함께하고 싶으시냐 여쭌 겁니다.”
“우리는 부부 사이이니 당연한 의무라고도 생각하고요. 안주인의 권리를 누리려면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미리 말씀해 주세요. 제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약과였다. 그날 저녁에 잠자리 문제와 후계 문제까지 논하지 않았던가.
문득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던 체드란의 간절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나엘라는 옆에 있던 쿠션을 주먹으로 ‘퍽!’ 내리쳤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져 화끈거렸다.
맙소사! 정말 맙소사!!!
인생을 통틀어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나, 나엘라님…….”
제니와 지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간편한 옷과 말을 준비해.”
“예? 뭐 때문에……?”
“당분간 다른 곳에서 지낸다. 그렇게 알도록.”
도저히 체드란을 볼 자신이 없다.
당장 몇 시간 뒤면 체드란이 올 텐데 뭐라 말한다 말인가.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자신이 했던 말은 잊어 달라고?
지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나엘라 인생 처음으로 가출 아닌 가출을 시도했다.
*
체드란은 말안장에 걸려 말이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물건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더 속도를 높였다.
이 물건 때문에 어젯밤에 도착했어야 하는 일정이 오늘 점심까지 미뤄졌다. 곧 식사 시간이니 가자마자 먼지 좀 씻어 내고 나엘라와 함께 점심 먹으며 물건을 전해 주면 될 터였다.
꽤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오랜 여정으로 말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속도를 줄이진 않았다. 바로 앞에 저택이 보였다. 자신을 발견한 호위병이 다급하게 대문을 열었고, 체드란은 그대로 지나쳤다.
저택 입구까지 내달린 체드란은 속력을 이기지 못한 말이 단번에 멈추지 못하고 미끄러지자 훌쩍 뛰어내렸다.
겨우 멈춘 말을 토닥이고 안장에서 물건을 풀어 낼 즘 뒤따라오던 기사들도 하나씩 도착했다.
저택에서 다른 이들이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지만 상관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나엘라는?”
뛰어나오던 마든에게 묻자 어색한 웃음이 뒤따랐다.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이다 싶어 체드란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얌전히 있을 리가 없다.
“이번엔 무슨 사고를 쳤지?”
빨리 씻기 위해 침실로 올라가는데, 그 옆을 따르던 마든이 대답은 하지 않고 우물쭈물 뜸을 들였다.
침실 바로 앞까지 와서도 아무 말이 없는 마든이 이상해 체드란은 걸음을 멈췄다.
“큰일인가? 얼마나 큰 사고를 쳤길래?”
“그게……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진 않습니다.”
“무슨 소리지?”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충신으로서 대공 전하의 난감함이 걱정되어 대공비 전하께 말씀드린 겁니다.”
“용건.”
마든의 머릿속에 몇 시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급히 나가려는 나엘라를 붙잡았더니 당분간 돌아오지 않겠다며 뛰쳐나갔다. 그 와중에 호위 기사들도 데려가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 다행이라고 할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사실 자신도 따라가고 싶었는데 체드란이 올 예정이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야 할 보고도,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도 많았다.
“대공비 전하께서 가출하셨습니다.”
체드란이 들고 있던 물건들이 투둑 떨어졌다.
“뭘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