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46)화 (46/220)

45화

“가출하셨습니다.”

“외출?”

“가출이요.”

“잠시 외박?”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행동 말입니다. 가. 출.”

체드란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가? 언제는 지켜 주겠다며? 자신도 노헤스카도 이제 본인의 것이니 지켜 주겠다며?

일주일 전 파티 날 기사처럼 손등에 입을 맞춘 게 누구지?

그런데 뭘 해?

“아니, 대체 왜?”

“그게 말입니다…….”

마든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대공 전하가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아셨습니다.”

“그걸 어떻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체드란은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정말 맙소사였다.

“어디로 갔는지는?”

“그게 아직…….”

“예상되는 곳은?”

“그건 몇 군데 생각해 놓긴 했습니다.”

한숨을 푸욱 내쉰 체드란은 아까 떨어트렸던 물건을 천천히 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물을 받고 기뻐할 나엘라를 생각했었는데, 가출 중이라니.

“일단 씻고 나오지. 영지의 경비대나 순찰대 연락해서 나엘라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고 예상되는 곳도 상세히 적어 놓게.”

물건을 들고 터벅터벅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는 체드란은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였다.

*

가만히 앉아 있던 나엘라는 갑자기 떠오르는 말에 주먹을 들어 옆의 벽을 가격했다.

쿵─

벽에 금이 가진 않았지만 돌 부스러기가 우르르 떨어졌다. 벌써 열다섯 번째 주먹을 내지른 터라 나엘라의 주먹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대체!”

몇 시간째 혼자 몸서리치는 나엘라를 두고 보던 집주인이 결국 벌떡 일어났다.

“대체 왜 남의 대장간에서 그러시는 겁니까!”

조알론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이번이 벌써 열세 번째라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그가 화장실 간 사이 쳤던 두 번은 못 본 모양이었다.

“다 사정이 있다.”

“그 말씀만 몇 시간째입니까?”

“그대가 뭘 알겠느냐. 그대는 알지 못할 일이다.”

“대체 뭔데요!”

“서른여덟 살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해 본 자네가 뭘 알겠나.”

“어억……!”

조알론이 바들바들 떨며 나엘라를 향해 손가락질했지만 애처롭게 흔들리는 검지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그러는 단장님도 연애 한 번 못 해 보셨잖습니까!”

“대신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 그대는 아직 노총각이고.”

“억……! 아버지 못난 자식 먼저 갑니다……!”

목덜미를 부여잡은 조알론은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아 이를 갈았다.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조알론이 목소리를 낮추곤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사정은 묻지 않겠습니다. 단장님도 사정이 있겠죠. 대신 왜 이곳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뭐가 말인가.”

“왜 여기로 오셨냐는 말입니다.”

“그야 노헤스카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지 않은가?”

“훅─ 훅─ 아, 잠시 심호흡 좀. 훅─ 훅─.”

겨우 숨이 진정되자 조알론은 다시 물었다.

“크흠, 그럼 여관으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거기가 훨씬 편할 텐데요.”

“괜히 대공비인 게 알려졌다간 소란이 일지 않겠나. 생각보다 이곳에 내 외모 정보가 많이 퍼져 있다네.”

“그럼 주변 영지로 가면 되지 않습니까? 근처에 휴양지로 머물기 좋은 영지가 꽤 있습니다.”

“휴양할 기분이 아닐세.”

“여기도 휴양지는 아닙니다!”

“대장간만큼 마음 편한 곳이 얼마나 되겠나.”

더는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알았는지 조알론은 머리를 싸맸다. 아까는 심호흡이었다면 지금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신세야…….”

“자네 이제 말 좀 그만 걸면 안 되겠나. 정신 사납네.”

강물에 빠진 거 건져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고, 딱 나엘라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갑자기 쳐들어와 남의 대장간 벽을 가격하지 않나, 알 수 없는 신음은 본인이 흘려 놓고 주인에게 조용히 하라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혼자 왔으면 별말도 안 한다. 그녀를 따라 지안과 제니, 호위 기사 몇이 줄줄이 따라와 대장간에 자리 잡고 있으니 문제였다.

노헤스카에 납품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고 있을까.

생각보다 양이 많아 대장장이 마을 전체가 달려들어야 했다. 다 같이 먹고 살면 좋은 거지만 조알론이 전체적인 관리를 해야 해서 매우 바빴다.

그뿐만 아니라 본인의 할당량도 채워야 해 이리저리 신경 쓸 것이 많았다.

“단장님…….”

“말 걸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 제 대장간에서 나가 주시죠.”

“딱 한 질문만 받겠네.”

“그래도 표정이나 옷차림이 조금 변하셨길래 성격도 좋은 쪽으로 변하셨을 줄 알았습니다. 인제 보니 예전과 다를 게 없으시네요. 단장님께서는 본인이 혼인하고 무엇이 변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빙자한 욕인가?”

“여전히 눈치도 빠르시고요.”

“음…… 혼인을 하고 변한 것이라…….”

본인이 욕을 먹은 건 알면서 신경은 쓰지 않는다. 조알론은 여전히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타격도 없는 뻔뻔함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혼인하고 변한 것…….”

나엘라는 마지막 질문을 성의 있게 답하고 싶은지 한참을 고민했다. 고개도 갸웃거리고 여러 이름을 되뇌는 걸 보니 노헤스카에 오고 나서 한 일들을 되새기는 모양이었다.

“내 것들이 늘어난 것과 해야 할 일이 늘어난 것 외엔 없는 것 같군.”

전부 안 좋은 것투성이인데 그럴 거면 혼인은 왜 했는지……. 연애 한 번 못 해 봤다며 나엘라가 지적하던 것이 떠올라 조알론은 열이 받았다.

하지만 나엘라와 오래 말해 봤자 본인 속만 터진다는 걸 알기에 다시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여기 얼마나 계실 겁니까?”

“한 사흘은 조용히 생각할까 고민 중일세.”

“사, 사흘?!”

사흘이라니! 세 시간도 아니고 사흘이라니!

조알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자네 질문 하나 더 한 거 알고 있나?”

“어억! 여기 잘 곳이 어디 있다고 이러십니까!”

“그것도 질문인가? 그대의 집이 있지 않은가?”

“제집에 단장님 잘 곳이 어디 있습니까!”

“왜 이러나. 고된 야행도 아무렇지 않게 했던 몸이네. 바닥에 천 하나만 깔아도 잘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천 하나라는 말에 번쩍 고개를 드는 지안이 보였다. 매섭게 쏘아보는 눈빛이 혹여 진짜 바닥에서 나엘라를 재운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이러다 자신이 맨바닥에 천 하나 덮고 자게 생겼다. 저는 뭔 죄를 지어 나엘라에게 방도 뺏기고 침대도 뺏겨야 하는가!

“그럼 다른 사람은요? 우리 집은 이 사람들을 다 수용할 공간이 없습니다!”

지안이 벌떡 일어나 자신도 바닥에 천 하나만 덮고 자면 된다며 소리쳤다. 제니도 마찬가지라며 싱긋 웃었다.

“그, 그럼 호위 기사분들은요?”

갑작스럽게 모두의 눈길을 받은 기사들은 분위기상 잘 넘겨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저희는 거실에 모여 자겠습니다. 한참 훈련 심할 때는 나무 위에서도 자 봤습니다.”

“으아아─!”

조알론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괜히 힘만 좋아서 엄청난 괴성을 질러 대는 조알론 때문에 나엘라가 살짝 인상을 썼다.

“어쨌든 자네 벌써 질문이 다섯 개째네. 그대라서 봐준 것이야. 마든이 봤으면 팔짝 뛰었을 걸세.”

마든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봐준 게 감사하지도 않았다.

“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말도 통해야 대화를 하는 법이다. 이건 뭐 소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었다. 맥이 탁 풀려 버린 조알론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무시고 싶은 곳에서 주무시고 가시고 싶을 때 가십시오. 뭐 언제는 제가 요청한 대로 하셨습니까.”

“사흘간 함께 지내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하게나. 알다시피 내가 그런 부분에서는 공정하지 않나. 대공비를 사흘이나 재워 줬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네.”

“사흘이 지나면 반년은 이곳에 오지 마십시오.”

“그럼 자네가 대공저로 올 텐가?”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고새 잊어버렸다.

“정신 사납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는 말 걸지 않겠습니다. 아까처럼 벽 치시던 거 마저 치십시오.”

조알론이 진 빠진 표정으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엘라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작업을 다시 할 예정이었다.

옛날 검 실력이 막혔다고 생각했을 때 자주 하던 것들이었다. 일명 심신 수련이라고 할까.

“저…… 대공비 전하…….”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 때 또 누군가가 그녀를 방해했다. 평온하던 정신이 순간적으로 팍 깨지자 나엘라가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아까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던 기사였다.

“중요한 일인가?”

“그게…… 대공 전하께서 오신 것 같습니다.”

나엘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던 조알론이 엉거주춤 멈춰 섰다.

“무슨 소리인가?”

“밖이 소란스러워 내다봤더니 마을 입구 쪽에 대공 전하로 보이는 남자가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는 못 봤지만, 체구가 딱…….”

나엘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번뜩이는 감이 그녀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나엘라가 숨을 곳을 찾아 구멍이라는 구멍은 다 찾아 헤맸다. 찾다 못해 화로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조알론이 온몸을 던져 막아 내었다.

“안 됩니다! 거기 아직 온도도 다 안 내려갔다고요!”

“버틸 수 있네!”

“거기서 사람 죽으면 찝찝해서 일 못 합니다! 귀검 만들 일 있습니까!”

“이거 놓게나!”

어찌나 힘이 센지 조알론이 질질 끌려갔다. 자꾸 화로로 향하는 나엘라의 모습에 호위 기사들도 기겁해서 달라붙었다.

“이거 놓으란 말이다!”

호위 기사들과 조알론, 나엘라가 서로 몸싸움을 하던 그때 대장간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이들이 몸싸움하던 화로 앞은 하필 문에서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온 체드란은 난해한 장면에 입을 열지 못했다.

바지와 셔츠만 간단히 입고 도망가려는 모양새의 나엘라와 그녀를 붙잡고 포박하려는 듯한 모양새의 남자들.

순간적으로 몇 가지의 오해가 뒤엉키는 것을 눈치챈 기사들이 후다닥 떨어져 나갔다. 타이밍을 놓친 조알론만 어색하게 천천히 팔을 내렸다.

“흠흠.”

체드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마든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았다.

“대공비 전하,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눈을 도르륵 굴리던 나엘라는 순식간에 표정을 정리하고 아무렇지 않게 툭툭 옷을 털었다.

“일주일 만에 뵙습니다.”

아까의 고민과 몸부림들은 어디 갔는지 평온한 척 체드란을 맞이하는 태도에 조알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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