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대체 아까 그 모습들은 뭐였단 말인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조알론은 새삼스럽게 느꼈다. 제 주군은 정말 뻔뻔함으로는 하늘을 뚫을 사람이었다.
“오랜만이군…….”
나엘라가 당당하게 나오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체드란은 결국 어색하게 인사를 전했다.
일주일 만에 돌아오니 부인이 가출한 것도 모자라 사내들과 이상한 꼴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신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까.”
“아직 진행 중일세.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에게도 그대가 보고 싶어 한다 전했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그대가 집을 나갔다기에…….”
나엘라가 도끼눈으로 마든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마든이 얼른 체드란의 등 뒤로 숨는 것이 보였지만 차마 욕 한마디 내뱉을 수가 없었다.
“집을 나갔다니요. 마든이 요즘 허황한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잠시 외출이었습니다.”
“외출?”
“잠시 무기 제작 현황을 살펴보러 왔습니다. 보고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서 있는 조알론이 앞으로 노헤스카의 모든 무기와 갑옷을 책임져 줄 자입니다. 마호세르디에서부터 믿고 맡기던 자였으니 실력은 제가 보장합니다.”
체드란의 시선은 조알론에게로, 조알론의 시선은 나엘라에게로 향했다.
이곳으로 오는 중 체드란은 마든에게 그동안의 일을 들었다. 나엘라의 오랜 지인이며, 단장님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그 외의 여러 사담이 덧붙어 있었지만, 그저 나엘라가 신뢰하는 자이니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궁금했다.
조알론은 조알론 나름대로 다른 말에 놀랐다. 앞으로 노헤스카의 모든 무기와 갑옷을 책임진다니, 그런 말은 없지 않았나.
기껏해야 대공저에 주둔 중인 기사단 몇 개인 줄로만 알았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양이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노헤스카의 모든 무기랑 갑옷이라고? 호위병, 경비대, 국경군, 기사단 등 그 모든 인원을?
심지어 군수용품도 대량으로 사용하는 군사 경계 지역에서?
물론 마호세르디에서도 많은 양을 하긴 했지만, 그곳은 워낙 오래된 장인들도 많고 명장들이 몇 대째 이어져 오는 대장간도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젊은 사람치고 실력이 좀 있는 장인, 그 정도였다.
“뭐 하는가, 조알론. 대공 전하께 인사드리게.”
조알론은 억울해 미치겠는데 한마디도 할 수 없으니 울상인 얼굴이 되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저는 마호세르디에서 일해 온 대장장이, 조알론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평민인데 꽤 예법에 능숙하군.”
“단장님을 자주 따라다니다 보니…….”
단장님이라는 호칭에 체드란의 시선이 나엘라에게 옮겨졌다.
나엘라를 부르는 호칭 중 단장님이라는 것만큼 체드란에게 어색한 것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대공비 전하라고 불렀고, 직속 하녀들처럼 조금 친하다 싶은 이는 나엘라 님이라고 불렀다.
생각해 보면 대공비 전하라는 호칭은 결혼 후의 나엘라를 뜻한다. 결혼 전의 나엘라를 부르던 호칭은 아니었다.
단장님이라는 단어 또한 그녀를 구성하는 삶의 호칭 중 하나였을 텐데.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나 보다. 자신은 여전히 나엘라를 잘 모른다고 알려 주는 것 같아 체드란은 그 호칭이 더 낯설게 다가왔다.
“단장님이란 호칭은 처음 듣는군. 올 때 마든을 통해 듣긴 했었다.”
나엘라는 억지로 조금 웃으며 미래를 계획했다. 이제 정말 마든을 교육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그렇게 아첨을 하며 붙어 다니더니 아무래도 감시였던 모양이다. 무슨 일만 있으면 죄다 체드란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마든은 체드란의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여러모로 열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 잠시 맡았던 직책입니다.”
“어느 기사단이었나?”
나엘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단장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조차 자신 밑에 있던 기사들밖에 없었다. 그 인원도 많지 않아 소속원 외에는 정확히 아는 이가 없다.
옆에 서 있던 조알론은 제 호칭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미안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쓸데없이 덩치만 큰 조알론은 말은 사나워도 마음이 여려서 문제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나엘라가 입을 열었다.
“이름도 없던 기사단이었습니다. 인원도 서른 명 정도밖에 안 됐고요.”
“서른 명? 이름이 없는 기사단이 말이 되는가.”
“아버지께서 제가 하도 돌아다니니 마호세르디에 마음 붙이고 있으라고 만들어 준 기사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맡은 첫 기사단이었겠군.”
“네. 그렇습니다.”
“그럼 애정이 많았겠군.”
“그렇죠…….”
“그런데 이름이 없다라……. 그 기사단 소속이었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뭐…… 아직 기사를 하는 이들도 있고 다른 곳에서 터전을 잡은 이들도 있습니다.”
“기사가? 마호세르디의 기사단이었던 이들이?”
“…….”
나엘라는 말문이 막혔다. 체드란은 쓸데없이 예리해서 문제였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계속 질문을 던지는데, 또 그 질문들이 굉장히 날카로웠다.
하긴 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긴 했다.
직접 맡은 첫 기사단인데 나엘라의 성격상 이름도 붙여 주지 않았다는 건 누가 봐도 어색할 터였다.
거기다 긍지 높은 마호세르디의 기사들이 다른 곳에서 터전을 잡고 산다는 것이 쉬이 납득되겠는가.
체드란이 무언가 눈치챈 것 같아 나엘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지 마시고 다른 곳에서 얘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디서?”
“바로 옆 건물이 조알론의 집입니다. 다른 이들은 밖에 대기시키고 단둘이 얘기하시지요.”
다른 이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도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엘라가 제집인 양 먼저 걸음을 옮겨 조알론의 집으로 향했다. 작고 아담한 집의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이 보였다.
거실 한가운데 마주 보고 놓인 소파에 나엘라가 먼저 앉았다. 이사하면서 장만했는지 새것처럼 보이는 소파였다.
이 와중에도 나엘라는 의문이 들었다. 대체 조알론은 마호세르디에서 벌어들였던 돈을 다 어쩐 거지?
아버지가 조알론의 실력을 마음에 들어했으니 분명 돈을 넉넉히 줬을 텐데.
“차를 내어 드릴까요?”
“괜찮네.”
사실 차가 어디 있는지까지는 나엘라도 몰랐다. 집에 들어온 것이 처음인데 어찌 알겠는가.
체드란도 반대편에 앉아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체구에 딱 맞는 크기라고 해야 할지 꽉 찼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흐음, 일단 제가 단장으로 있던 기사단은 말입니다.”
“되었네.”
“네?”
“이름이 없다는 건 수면 위로 올라와선 안 되는 기사단이었다는 뜻이겠지. 그대가 첫 기사단을 이름도 없이 내버려 뒀겠는가.”
“아…….”
“인원이 소수였다는 것은 믿을 만한 이들로 말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는 의미도 되고 인원이 많을 필요가 없는 일에 투입한다는 뜻도 되지.”
역시 예리하다. 나엘라는 눈앞에 앉은 남자가 전쟁 영웅임을 새삼 깨달았다.
“체드란이 전쟁광이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좋아하는 건 아닐세. 정치보다는 전쟁이 났던 것이지.”
“보통은 정치를 택할 겁니다. 정치가 더 쉽지 않습니까.”
“기사들은 전쟁을 택하는 이가 더 많을 걸세. 그리고 대체 정치의 어디가 쉽다는 건지 모르겠군. 너무 그대의 기준일세.”
“아무튼, 그럼 안 물어보고 넘어가시는 겁니까?”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모두 한 임무를 수행 중인가?”
“임무라니요?”
“기사단을 해체했다는 말은 안 하지 않았는가.”
“단장 자리는 놓았습니다.”
“다른 임무를 하고 있긴 하군. 혹시 그들이 수도에 있는가?”
“…….”
나엘라는 말문이 턱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체드란에게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딱히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말로도 금세 정황을 파악하는 것만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수도에 있습니다만 근황은 모릅니다.”
“연락을 주고받으면 지장이 생길 일을 하고 있나 보군. 이름도 없고 인원도 소수고. 어지간히 비밀스러운 기사단이군.”
“기사단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곳입니다.”
“기사가 아닌 이들도 섞여 있나?”
“캐물을 생각은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체드란은 어깨를 작게 으쓱거리며 알겠다는 몸짓 후 소파에 기댔다.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태도에 그냥 넘어가겠다는 뜻임을 눈치챘다. 나엘라도 그제야 볼을 긁적거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체드란은 대공비답지 않은 옷을 입은 채 남의 집에서 편히 앉아 있는 그녀가 조금 웃기게 느껴졌다. 이 집에서 단둘이 얘기하자던 말에 황당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조알론을 봐서는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녔던 것 같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미지수인 이름 없는 기사단의 단장, 어쩔 땐 마호세르디 군의 참모, 마호세르디의 보안을 새롭게 갈아엎은 이.
전부 체드란을 만나기 전의 나엘라였다. 그것이 내심 신기하면서도 어색했다.
물론 나엘라가 노헤스카에 와서 했던 행동들을 보면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공비로서의 나엘라와 공작 영애로서의 나엘라는 느낌부터 다른 법이었다.
아니면 자신이 다르게 생각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자신의 부인인 나엘라와 자유로웠던 어린 나엘라?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은 그 애매한 감정들이 낯설고 기꺼웠다.
가만히 앉아 있던 체드란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입을 열었다.
“원래는 어젯밤에 도착할 예정이었네.”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나엘라가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른 일로 조금 늦어졌지 뭔가.”
“다른 일이요?”
“고대에 사라진 왕국의 보검으로 유명했던 검이지. 왕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사라졌으나 얼마 전 지하 경매장에 비밀리에 올라왔네. 그것을 마침 지나가던 내가 샀다네.”
나엘라의 눈동자가 크게 떠지며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체드란이 푸른 눈동자를 반으로 접으며 씨익 웃었다.
“설마…… 검 한 번에 기사단 하나를 양단하고 검 두 번에 대지를 가르며 검 세 번에 바다를 가른다던……?”
“그, 그건 아니고……. 그건 전설 속에 나오는 검이지 않나?”
“아아, 그럼 제국 초대 황제가 썼다던……?”
“그건 황실 보고에 있네만…….”
“그럼 옛날 대륙 전쟁 때 쓰였다던……?”
“후…… 그건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전해지지 않던가……?”
“그럼 대체 뭘 사 오신 겁니까? 이상한 거 사기당한 거 아닙니까?”
나엘라의 얼굴에 급격히 실망감이 드리우자 체드란은 오히려 황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