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가 구매한 검은 제국의 시조가 되는 고대 왕국이 멸망할 적에 왕이 도망가며 빼돌렸다고 전해지는 명검 중 하나였다.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겨우 구한 것이다.
심지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참가한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을 비밀 경매장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런 태도라니.
“그게 아니라 빛을 잃은 검이라 불리는 흑색의 검일세. 들어 보지 못했는가?”
“빛을 잃은 검……? 흑색의 검?”
“검은 머리인 자네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왔네만…….”
“아! 들어 본 것 같습니다. 그 검이군요!”
이제야 무언가 떠오른 건지 다시 설렘에 물들어 나엘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래……. 이제라도 생각났으니 다행이군…….”
“그 검을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대단하시네요.”
체드란을 요리조리 살펴보는 모양새가 지금 소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기사에게 있어 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던가. 나엘라에게도 분명 분신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그걸 샀는데 말이야…….”
“그래서요? 본인이 쓰려고 산 건 아닐 거잖아요.”
“얼마 전에 나를 지켜 주겠다던 기사가 있었네. 그래서 그 기사에게 선물하고자 구해 왔는데 돌아와 보니 사라졌지 뭔가.”
나엘라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그 기사가 돌아온다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일이고, 검도 원래 가려던 주인에게 잘 선물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기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그 검은 내 기사 단장에게 가겠군. 반트모어 경이 그 검을 받고 훨훨 날아다닐 것이 눈에 선해.”
나엘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외출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든의 말로는 가출이라던데?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당분간이 얼마나 되는 줄 알고요? 저한테 당분간은 고작 몇 시간입니다.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마든이 헛소리했다는 건가?”
“마든의 헛소리가 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당장 처벌해야 합니다.”
나엘라는 분한지 눈을 이글이글 빛내며 마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
처음 나갈 때의 자신은 생각도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본인조차 속이는 뻔뻔함이 정말 대단했다.
“그럼 나와 같이 돌아가면 되겠군. 마침 나도 대장간들을 둘러봐야겠으니.”
“한번 보시려고요?”
“무기와 갑옷을 전부 바꾸는데 얼마나 큰돈이 드는 줄 아는가? 마든이야 기사였으니 좋다고 찬성했겠지. 하지만 노헤스카의 행정관이 기절하는 소리가 들리네.”
“그렇게 큰돈인가요?”
“마호세르디가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군.”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검을 쓰다 허무하게 죽는 것보단 낫습니다. 기사 하나의 생명, 병사 하나의 생명값이 그것보단 높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나를 또 부끄럽게 만드는군. 그럼 그냥 시찰로 하지.”
재정 관리와 영지 관리의 차이가 크다는 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영지는 결국 영주가 추구하는 방향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안전을 중요시한다면 그곳에 예산을 쓰고, 발전을 중요시한다면 그곳에 예산을 쓰면 된다.
노헤스카가 마호세르디보다 돈이 없을 뿐, 실제로 그리 가난한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었다.
“그런데…….”
나엘라가 처음 보는 모습을 보였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니,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든에게 들었습니다. 체드란이 절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게 제 착각이었다고요. 난처하게 만든 것에 사과드립니다.”
조금 더 뻔뻔하게 굴거나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냐며 화를 내도 될 것을 나엘라는 진정성 있는 사과를 전했다.
잠깐의 창피함으로 가출을 시도했지만, 막상 또 마주하면 피하지는 않는 것이 나엘라다웠다.
“그대는 연애해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나 또한 인생의 반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나머지 반은 황실에 지내며 매 목숨이 위태로웠네.”
“그냥 해 본 적 없다고 하면 되지 변명이 깁니다.”
“진지한 분위기 좀 만들어 주게나. 이곳으로 오며 계속 생각했던 말이니.”
“알겠습니다.”
하여튼 나엘라는 말이 엇나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네. 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죠.”
“그런 이유로 그대도 잘 모르지 않겠나 싶네만.”
“음…… 이제껏 제가 잘 모르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잘 모르긴 하네요.”
“그러니 서로 잘 모르는 것이라 치고 생각해 보게나.”
“무엇을요?”
“그대는 감이 좋은 편이지 않던가.”
“그렇죠.”
“그렇다면 나는 그대의 감을 믿겠네. 어차피 자네도 자네의 감을 믿지 않던가? 왜 갑자기 남의 말에 흔들려서 집을 나가는 등 안 어울리는 짓을 했는지 모르겠군.”
“다시 말하지만 외출이었습니다.”
“말해 보게. 그대의 감은 뭐라고 말하는지.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던가, 사랑하지 않는다던가.”
나엘라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소파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체드란이 왜 절 좋아한다고 오해했었나.
그때 했던 고민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았다.
“왜 제 주변을 맴도셨습니까?”
“그대와 같은 이유라고 해 두지. 궁금했네. 왜 그렇게 강한 성격이 되었는지, 평상시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검을 잘 쓰는지.”
“그럼 왜 제게 목걸이처럼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셨습니까?”
“그대가 이곳에서 잘 지내길 바랐고, 그대의 악몽이 신경 쓰였네.”
“자수정 커프스는요?”
“그대의 눈동자 색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지. 장신구로 달아도 괜찮을 만큼.”
말을 하던 나엘라는 잠시 멈칫했다. 체드란의 눈동자는 여전히 곧았다.
“그럼 왜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대가 벌인 사고들?”
“딱히 사고 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도, 결과도 이해했기 때문이네. 그대가 노헤스카에 보내는 관심과 그로 인한 변화가 고마웠네. 그래서 그대의 방식을 인정했지.”
“저희 아버지는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체드란은 안 그랬습니까?”
“나도 아팠네. 그대와 나는 다르지 않은가. 내 기준에 그대는 골치 아픈 사람이 맞아.”
나엘라 때문에 일도 많아지고 그녀의 행동도 예측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요?”
“하지만 그건 결혼 전의 기준일세. 그대가 결혼한 후 더 많은 이를 품고 바꾼 것처럼, 나 또한 기준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제게 기준을 맞추셨습니까.”
“나만 맞춰 갔겠는가?”
“저도 맞췄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왜 마호세르디에서처럼 매일 검 연습을 하지 않지?”
한참 나엘라가 훈련하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녀를 알고 싶어 지켜보긴 했지만 본의 아니게 깨닫게 된 것이었다.
“마호세르디에 있을 때를 잘 모르니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는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 중 하나를 포기했다는 건 알지.”
“그게 검이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대는 이제 기사가 아니라 대공비니까. 기사로서의 나엘라 마호세르디가 아니라 대공비로서의 나엘라 노헤스카가 되고 싶었던 것 아닌가?”
“검 훈련을 안 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전의 일 중에도 마음에 걸리던 것이 있었다.
“그로우 영식 때의 일, 생각나나?”
“대공령으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죠.”
“그때 자네가 그렇게 말했다지. 기사 나엘라 마호세르디로서 결투를 신청한다고.”
“별걸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검을 들고 있는 그대가 기사 나엘라 마호세르디라면, 검을 들고 있지 않은 그대는 대공비 나엘라 노헤스카라고 생각한 것 아닌가.”
“…….”
“한때는 검이 그렇게 그대의 전부인가 싶었네. 검 하나에 인생을 담았다고 말이야.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대는 나엘라 마호세르디를 내려놓고 나엘라 노헤스카로 살려 한 것이 아닌가 싶어졌지.”
나엘라는 잠시 침묵했다.
제 검에는 자신의 삶이 담겨 있는 게 맞다. 모든 기사가 그럴 것이고 검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그럴 것이다.
또한, 나엘라 노헤스카의 속에는 나엘라 마호세르디가 담겨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저 이제는 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싸우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책임져야 하는 노헤스카를 보며 예전처럼 살면 안 되겠다고, 조금은 옛날 모습을 버려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가장 컸던 검을 놓았다.
“다시 묻겠네. 그대의 감은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던가, 사랑하지 않는다던가.”
나엘라가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으나 차마 뱉지 못했다. 사랑인 것 같기는 한데 확신하자니 무언가 부족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군. 그럼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려 보는 건 어떤가?”
“음.”
“세크게라인 후작과 영지전을 할 뻔했을 때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어서 움직인 것이라고. 그럼 확신이 들고 나서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사랑이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다시 행동하게나.”
나엘라의 손가락이 다시 톡톡 소파 손잡이를 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가출은 보류하자는 이야기일세. 사랑이라면 그대의 생각이 맞은 것이고, 아니면 창피한 일을 벌인 게 맞을 테니.”
“외출이었습니다.”
“그래. 점심도 안 먹은 것 같은데 대장장이들을 보고 점심이나 같이하지.”
체드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확히 결론 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나엘라는 이 대화가 나쁘지 않았다. 답은 못 정했음에도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진 것을 의아해하던 나엘라는 체드란을 따라 일어서다 잠시 멈칫했다.
“아!”
나엘라가 생각난 듯 급히 체드란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서 제 검은 어디 있습니까?”
푸른 눈이 점점 가늘어지며 나엘라를 내려 보았다.
“아직 안 줬으니 내 검일세.”
“선물하려고 산 검이라면서요? 주인이 이미 정해진 검을 가지고 치사하게 구십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주인이 바뀔 수도 있네.”
“매우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깐 차마 표현이 안 되어 말하지 못했습니다.”
“엎드려 절 받기군.”
“그래서 제 검은 어디 있습니까?”
“누가 보면 내가 뺏어 간 줄 알겠군.”
“어디 있냐고요.”
“집.”
체드란은 마치 삐진 것처럼 나엘라에게 붙잡힌 자신의 팔을 쓱 빼냈다.
“그대가 일주일 만에 만난 남편보다 검이 더 중요하다 하니 어쩌겠는가.”
나엘라는 체드란이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해 눈썹만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