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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49)화 (49/220)

Chapter 6. 마지막 준비

48화

하일모라는 마차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연한 분홍빛으로 칠한 입술이 이에 뭉개지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초조해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마음과 다르게 마차는 착실히 움직였고, 마차 밖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 모두 자신의 할 일이 있겠지.

자신도 그렇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언제나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서였다는 믿음이 있었다.

다만 이번만은 예외로 쳐야 할지,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고쳐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하일모라 님.”

앞에 앉아 있던 베르에티가 그녀를 불렀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하일모라는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러실 만도 합니다. 충분히 이해하고요. 다만 입술에서 피가 납니다.”

베르에티의 손수건을 황급히 건네받은 하일모라는 입술을 쓱 닦았다. 정말 상처가 난 것인지 하얀 손수건에 피가 묻어 나왔다. 그제야 따끔거리기 시작한 입술에 헛웃음이 나왔다.

“손수건은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손수건이야 집에 가득하니까요. 손수건으로 이불을 채워도 될 정도입니다.”

실없는 농담이 하일모라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베르에티의 배려임을 알고 있었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하일모라는 잘 정돈되어 있던 하늘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 약한 분 아니시잖아요.”

“……나엘라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엘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상상이 안 되네요.”

베르에티는 나엘라를 떠올렸다. 테라스에서 벨벳 소파에 앉아 당당히 자신을 보던 보라색 눈동자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를 본 순간 하일모라가 왜 찾아가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이는 강한 이를 찾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강렬히 흔적을 남겼다. 특히 무릎 꿇은 자신에게 건넨 ‘내게 무릎을 꿇을 만큼 원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겠지’라던 말이.

누가 그리 당당히 얘기할 수 있을까.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게 행동한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만큼.

“황후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하일모라가 입술을 손수건으로 누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그 질문의 답은 베르에티도 알 수 없었다.

나엘라의 지시대로 수도로 올라왔던 베르에티는 아버지가 보낸 서신을 들고 황후를 찾아갔다.

황후는 만족스러워했고 가끔 그녀를 식사 자리나 티 파티에 초대하고는 했다. 그 자리에는 하일모라도 있었고 황후 측 사람인 귀족파 부인들과 영애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오늘도 그런 자리였다.

하일모라와 베르에티가 예전부터 친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황후는 그 둘이 함께 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만찬에 참석한 두 사람은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이야기와 뜻하지 않은 인물들을 만났다. 그것은 예상조차 못 했던 문제였다.

“나엘라 님에게 함부로 편지를 보낼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엘라 또한 수도로 올라가면 편지를 보내지 말라 당부했었다. 수도 전체가 황실의 감시하에 놓인 곳이니 사방에 눈과 귀가 있다면서.

그러니 친구인 하일모라와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것이 아닌가.

“편지를 보낼 수 있다 한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나엘라가 얼른 수도로 올라와야 할 텐데.”

“언제쯤 올라오실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혹시 나엘라에게 들은 것은 없나요?”

“얼핏 봄쯤에 다시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럼 얼마 남지 않았네요. 이제 겨울도 물러나는 중이니.”

하일모라는 마차 벽에 머리를 살며시 기댔다. 좋은 마차긴 하지만 벽을 타고 길을 지나는 진동이 조금씩 느껴졌다.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많이 보고 싶으세요?”

“친구니까요.”

하일모라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나엘라를 처음 만났던 날과 나엘라, 에스토, 그리고 본인까지 셋이 돌아다녔던 추억이 생생했다.

뒷골목에서 도망쳤던 일, 마호세르디에 양아치들이 일시적으로 사라질 만큼 크게 시비가 붙었던 일, 나엘라와 에스토가 54번째 대련을 하고 에스토가 54번째로 패배했던 일.

마호세르디의 하루하루는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보고 싶은 친구들. 언제까지도 행복하고 즐거우리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의 앞에는 왜 이리 거센 파도가 밀려오는 걸까.

“나엘라가 편지로 뭐라 말했다 했죠?”

하일모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일단 수도로 올라가면 자신에게 편지를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을 찾아가라고도 했고요.”

“그놈의 기사단은 참 끔찍하게 챙기네. 하긴, 게네도 유별나게 사고 쳤었는데…….”

“그리고 또 황후와 황제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으라고 하셨죠.”

“여전하네요. 자기만 일 잘하는 줄 아는 거. 그건 이미 다 하고 있는 건데…….”

“그 외에 이것저것 말씀하셨는데 그건 편지를 직접 보여드릴게요.”

“수도에 가지고 왔나요?”

“원본은 태웠고 저만의 방법으로 적어 두었습니다.”

“베르에티 영애만의 방법이요?”

“어렸을 때 이상한 그림으로 메모해 두는 걸 좋아했거든요.”

“제가 그걸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림이 형편없어서 아무도 못 알아봐요. 대신 제가 하나씩 설명해 드릴게요.”

“영애도 참 특이하네요.”

“아, 이건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하일모라 님께 보고 싶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똑같이 전해 줘야겠네요.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

하일모라가 작게 웃자 베르에티도 함께 웃었다.

나엘라는 잘 해낼 것이다. 나엘라가 하일모라를 믿는 것처럼 그녀도 나엘라를 굳게 믿었다.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일을 하면 되겠죠?”

“그렇죠. 아─ 우리 남편 보고 싶다.”

하일모라는 남편인 세레노피 백작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 지금쯤 자신을 기다리며 일을 처리하고 있겠지.

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유독 보고 싶은 그런 하루였다.

*

대공저로 돌아온 나엘라와 체드란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었다. 물론 그전에 체드란이 가져온 선물을 강탈하듯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을 만났을 때와 너무 다른 반응에 조금 괘씸했지만 나엘라가 너무 좋아하는 것이 보여 체드란은 기분을 풀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수프를 떠먹던 체드란은 나엘라에게 물었다.

“혹시 나에게 또 말하지 않은 것은 없나?”

샐러드를 입에 넣은 나엘라가 이것저것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말했다.

“제가 그때 하일모라 세레노피와 친구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가산 백작의 파티에서 베르에티 루부스 후작 영애를 만났을 적의 이야기였다. 그날 저녁, 파티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서로 논의하다가 하일모라의 이름이 나왔었다.

“그랬었지. 기억하고 있네.”

잘 기억하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는 엄청난 내용을 툭 내뱉었다.

“하일모라가 절 짝사랑했습니다.”

“쿨럭─ 뭘─ 쿨럭쿨럭─.”

먹던 물이 잘못 넘어가는 바람에 체드란은 거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다급히 옆에 있던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뭘 했다고?”

“짝사랑이요.”

“어떻게? 아니 왜? 아니지, 지금 이런 질문이 맞는 건가?”

“그땐 남자 같은 가명을 쓰고 있기도 했고 머리도 짧았습니다. 맨날 갑옷을 입고 다녀 체형도 가려져 있었고요.”

“아무리 그렇다 한들…….”

체드란은 그때의 나엘라를 보지 못했으니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일모라도 검을 들고 갑옷을 입은 기사가 여자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답니다. 하필 첫 만남 때 검은 머리와 보라색은 마호세르디의 표시란 걸 하일모라가 한눈에 알아차렸습니다. 정체가 들켰다는 생각에 저는 남자인 척을 계속했죠.”

“그래도 목소리가 다르지 않나?”

“말을 안 했습니다. 도망 다니기도 했고요.”

말을 안 했다고?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떻게 만났길래?”

“강도들에게 습격당하던 것을 제가 구해 줬습니다. 그 뒤로는 아예 마호세르디에 눌러앉더군요. 한동안은 비상이었죠.”

“그대를 마호세르디 중 누구라고 생각했나?”

“아버지께서 다나한 오라버니를 국경으로 보냈습니다. 현장 경험을 하고 오라나 뭐라나. 덕분에 다나한 오라버니만 고생했죠. 저는 다나한 오라버니인 척을 했고요.”

“어떻게 들켰나?”

“에스토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엘라라고 불렀거든요. 마침 하일모라는 병약하다는 막내 공녀를 궁금해하던 중이었고요. 그나마도 저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한 달이나 걸려 들킨 겁니다.”

그 한 달 동안 얼마나 많은 추격전을 했는지 아느냐며 나엘라는 너스레를 떨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대단한 건 하일모라죠. 그녀는 사랑에 관해 불같거든요. 좋아한다고 야외 훈련까지 따라와 산행도 한 적 있습니다. 구두를 신고 오는 바람에 아주 난리가 났었죠.”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엘라는 피식 웃었다.

한 달 동안 매일같이 하루 다섯 번은 고백했고 첫눈에 반했다며 졸졸 따라다녔다. 나엘라는 말을 할 수 없어 답답했고, 하일모라는 왜 한마디도 안 하냐며 그렇게 싫어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온갖 생떼를 부렸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진저리를 친다.

에스토가 말실수로 나엘라의 본명을 부른 날에는 차라리 해방된 기분이었다. 소문이 나든 말든 에라 모르겠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싶었다.

하지만 제 걱정과 다르게 하일모라는 어쩐지 이상했다며 친구나 되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부터 나엘라의 친구는 두 명이 되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나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 건 하일모라의 영향이 클 겁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서요.”

“보통 불같이 사랑하고 불같이 끝나나?”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죠. 제가 여자인 걸 들켰을 때 너무 아무렇지 않게 친구가 되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한 일주일을 아침마다 두 눈이 퉁퉁 부어서 나타났습니다. 제가 너무 어이가 없어 물었죠.”

“뭐라던가.”

“안 되는 걸 강요할 생각도 없고, 남자였어도 제가 싫다는 말 한마디만 제대로 했으면 바로 물러났을 거랍니다. 다만 마음 정리는 자신의 몫이니 그냥 두라고요.”

하일모라가 그 정도였다면 나엘라에게 인상 깊을 만했다.

“진짜 사랑했던 모양이군.”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검을 잘 쓰거나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멋있다고 여겼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검도 안 쓰고 체력도 약하고 싸움도 못하는 여자가 멋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떠올라 나엘라는 작게 웃었다.

하일모라는 유난히 눈이 잘 붓는 체질이다. 원래도 아침마다 조금씩 붓는 편인데 그 일주일은 정말 개구리 왕눈이처럼 부어서 다녔다.

딱 일주일이 지난 후에는 마호세르디에 더 있어도 되냐며 이렇게 된 거 새로운 친구랑 실컷 놀겠다고 선언했다. 괜히 미안했던 나엘라는 한동안 그녀에게 끌려다녔다.

그 시절이 그리워 나엘라는 다시 웃었다.

“수도에 올라가면 체드란도 하일모라를 보게 되겠네요.”

“혹시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있나?”

체드란은 아무래도 나엘라의 친구니 괜스레 걱정이 들었다.

“음…… 아! 절대 남편에 대해 험담하면 안 됩니다.”

“세레노피 백작?”

“하일모라가 제게 검을 조금 배웠습니다. 그것만 알아 두세요.”

체드란은 살짝 멈칫했다.

검을 배운 게 무서운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하일모라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나엘라도 체드란에게 이기지 못하는데 그 실력이 무서울까.

진짜 무서운 것은 나엘라에게 다른 것을 배웠을까 겁이 났다.

“만날 날이 기대되는군…….”

“그렇죠?”

나엘라는 작게 웃으며 허밍을 시작했다.

착잡한 체드란의 마음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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