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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51)화 (51/220)

50화

내일 아침부터 영지 시찰을 나가겠다는 나엘라를 위해 지안은 분주히 움직였다. 일단 종이를 하나 가져와 챙겨야 할 것들을 적었다.

많이 걸어야 할 것 같으니 편한 구두, 예비 구두. 불편하지는 않으나 대공비의 품격을 보여 줄 활동성 높은 드레스. 중간에 간식으로 먹을 과자들과 손수 만든 에이드.

물론 더운 날씨지만 혹시 체온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담요 두 개와 두를 숄 하나, 외투 하나. 영지를 돌아다니며 거리낌 없이 여기저기 만지고 아무 데나 앉을 나엘라를 위해 손수건 20개.

그리고 언제 나엘라가 머리를 묶겠다고 할지 모르니 머리끈 색깔별로 하나씩…….

“무슨 손수건을 20개나 챙겨요?”

머리끈을 쓰던 지안은 갑자기 귀 옆에서 들리는 소음에 그만 볼펜을 쭈욱 미끄러뜨렸다. 덕분에 메모지부터 하녀들이 쓰는 휴식실 탁자에까지 볼펜 자국이 생겨 버렸다.

“그리고 뭐 한다고 머리끈을 색깔별로 갖고 가요? 매번 외출 때마다 이걸 다 챙기는 거예요?”

아까부터 얼쩡거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제 할 일을 하던 지안은 이를 악물었다.

“신경 쓰지 마시죠, 집사장님.”

“아니, 이유가 궁금해서 그랬죠. 그런데 정말 이 많은 걸 어디다 쓴다고 다 챙기는 거예요?”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매번 마차 서랍 칸에 짐이 잔뜩이었구나.”

“할 일이 없으세요?”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매번 옆에서 쫑알대더니 오늘도 역시나 말이 많았다. 얼마 전 일로 마든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말라고 나엘라가 한마디 했기에 지안은 충실히 따랐다. 테이블 위에 있던 메모지를 차곡차곡 접어 하녀복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이 정도면 주인에 대한 애정이 과한 거예요. 대공비 전하께서 목숨이라도 살려 주셨어요?”

“할 일 하시죠.”

“잠깐 쉴 시간은 있어요.”

마든은 어느새 옆에 있던 의자에 궁둥이까지 붙이며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서야 지안과 눈높이가 맞았다.

단정한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새삼 마든이 키가 크다는 것이 느껴졌다. 매번 체드란과 붙어 있어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진짜 지안과 대공비 전하는 어떻게 만난 거예요?”

“모르셔도 됩니다.”

“뭐지? 요즘 들어 지안이 차가운 느낌인데.”

“그러니까 말을 조심하고 다니셨어야죠.”

“헉! 설마 대공비 전하께서 제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럼 진짜 충격인데.”

“본인이 한 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잊으셨나 봅니다.”

“에이, 전 진짜 대공비 전하에 대한 충심에서 한 말이라니까요.”

“모시는 분에 대한 말조심은 가장 기본이죠. 집사장님은 체드란 님의 이야기나 나엘라 님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하셨잖아요.”

“결과는 좋았잖아요. 대공비 전하도 본인 성격대로 하셨는데 결과가 좋으니 다 좋던데요?”

지안은 마든의 엄청난 수다에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마든은 왜 이리 말이 많은 걸까. 전생에 묵언 수행이라도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한동안 깊은 고민을 하느라 조용할 때가 나았다.

기사로 살지, 집사장으로 살지 내내 고민하더니 답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끔히 해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지안은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뭘 물어야 하는데요?”

“대공 전하에 관한 것도 있고 노헤스카에 대한 것도 있잖아요.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한테는 안 물어보고 맨날 어디서 그렇게 알아 오는 거예요?”

“제니가 다른 하녀들이랑 친해서요.”

“아하, 그럼 지안은 거의 대공비 전하의 전담이고 제니가 정보를 알아 오는 쪽인가?”

“후…… 집사장님.”

“넵!”

“하실 말씀 있으세요?”

마든이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잠시 머뭇거리기도 하고 다시 지안과 눈이 맞추고는 또 실없이 웃었다.

그 모습이 묘해 지안은 인상을 썼다.

“우와, 사람이 웃는데 인상을 쓰는 게 어디 있어요.”

“지금 집사장님의 모습이 매우 꺼림칙합니다.”

“역시 대공비 전하를 닮아서 눈치가 좋구나.”

“대체 할 말이 뭔데요? 괜히 뜸 들여서 이상한 분위기 만들지 마세요.”

“지안은 너무 차가워요.”

“집사장님께 따뜻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할 말 없으시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 전 바빠서.”

지안이 벌떡 일어나는 순간 다급하게 손목을 잡아 오는 거친 손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지안이 순식간에 마든의 손을 쳐 내고 뒤로 물러났다.

제 행동에 마든도 놀랐는지 얼른 물러나며 두 손을 펼쳐 위로 들었다. 마치 항복 자세와 같아 우스꽝스러웠지만 둘의 사이엔 어느새 두 걸음의 거리가 생겼다.

“미안해요. 지안이 접촉을 싫어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무슨…….”

“사람과 닿는 거 싫어하잖아요. 아니에요?”

“…….”

지안은 입을 다물며 마든을 노려보았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마든도 제 주인을 닮았는지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매번 제 손을 쳐 냈잖아요.”

“갑자기 손대니까 그렇죠.”

“이럴 때 보면 지안은 대공비 전하나 같은 하녀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랑은 잘 안 어울리는 거 티 나요.”

“무슨 소리예요?”

“일반적인 사람은 넘어지는 걸 부축해 줬다고 기겁하며 사람을 쳐 내지 않습니다.”

“놀라서 그랬을 수도 있죠.”

“지금도요?”

“갑자기…… 갑자기 붙잡으니까…….”

치부를 들키기라도 한 양 지안은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급속도로 차가워진 분위기에 마든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음……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저는 진짜로 가 보겠습니다.”

“지안! 잠깐만요. 진짜로 할 말이 있어요.”

진짜 마지막이라는 듯 지안이 시선을 돌렸다. 괜스레 쭈뼛거리던 마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할 말은 아니었는데…….”

“용건만 하세요.”

“우와, 나 요즘 그 말 되게 많이 듣는데. 다른 게 아니고…… 조만간 대공비 전하를 따라 수도로 올라가시잖아요.”

“그런데요?”

“저는 여기에 남기로 했으니 여름이 오기 전까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봄 한 계절만 못 보는 건데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 석 달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그러니까…… 지안의 눈에는 제가 바보처럼 보이겠죠?”

“갑자기요?”

“그냥 궁금해서요. 지안의 눈에는 제가 어떻게 보일지.”

“…….”

“지안이 그랬잖아요. 버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그랬죠.”

“지안도 알겠지만 저는 원래 기사였습니다.”

“알고 있어요.”

“저는 도망친 자입니다.”

지안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마든이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지, 왜 저렇게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자꾸만 손등을 매만지는지를.

다만 계속 이 얘기를 들어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그 당시, 기사들끼리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실 저였습니다. 대공 전하께는 기사들이 질렸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건 변명이었죠.”

“전부 솔직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는 법이죠.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저도 싫었지만 가장 싫었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검을 든 제가 무섭고 사람을 죽이는 게 두려웠습니다.”

지안은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는 말을 삼켰다. 그런 말이 도움이 됐으면 마든이 이리 오래 고민했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강하다고 말하는 나엘라조차 생사에 관해선 예민해진다. 누군가가 죽는 것이 무서워 강박적일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쓸 만큼.

어떤 이는 대단하다고 박수를 치지만 어떤 이는 피곤하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사람 밑에 있으면 진짜 피곤하겠다고.

물론 그렇게 말한 놈들은 지안의 손에 모두 두들겨 맞았다.

“지금도 무섭나요?”

“네. 무섭습니다.”

“누군가의 목숨이란 무거운 겁니다.”

“그리고 그걸 버티는 사람들이 강해지는 거고요. 대공비 전하처럼.”

“그렇죠.”

“이렇게 살아도 상관없겠다 싶었는데…… 조금 부끄럽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떠올리면 자책만 하게 되니까요.”

“그럼 저번에는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셨어요?”

“음, 대공비 전하께서 자신의 검을 보내셨을 때 있잖습니까.”

“시론 부단장님 말이군요.”

“네. 그때 대공비 전하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멋있더라고요. 스스로가 너무 못나 보였습니다.”

“진짜 바보 같은 생각이네요.”

“그러니까요. 그때 저도 딱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언제부터 나 자신에게 실망하며 살았지? 어쩌다 익숙해졌지?”

지안은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을 놓았을 때부터더라고요. 어리석은 선택과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스스로 알았던 겁니다.”

“이유를 알았으니 고민의 답도 알았겠네요.”

“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럼 선택하셨겠어요.”

“했습니다. 아직 대공 전하껜 말씀 못 드렸지만요.”

“그 선택이 집사장님께 옳은 길이길 바랍니다.”

“그런데 안 물어보네요. 왜 이런 얘길 하는지. 지안도 눈치챈 거죠?”

살며시 웃는 마든이 낯설게 느껴졌다. 평상시의 장난스럽고 수다쟁이 같던 그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지안은 버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했죠?”

“…….”

“그럼 제가 버티고 또 버티면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네요?”

“뭐…….”

“그럼 저도 지안의 눈빛을 조금이나마 받을 수 있을까요?”

“집사장님이 강한 사람이 되는데 제 인정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필요하다면요? 정답을 찾기까지 지안이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살짝 떨리면서도 직시하는 마든의 눈빛에서 더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가 무슨 말을 뱉기 전에 지안이 먼저 다급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요?”

“갑자기 아닌데…….”

“그럼요?”

“저는 티 낸 것 같은데 지안이 전혀 눈치 못 챘잖아요.”

“대체 왜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굳이 말하자면 지안에게 반해서? 식당 앞에서 버티는 사람이 강한 거라 말하는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결국 피하려던 말과 조우했다.

어렴풋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굳이 나설 생각은 없었고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만 해 왔다. 마음을 접든, 계속 주위를 맴돌든.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 본 것이 처음도 아니건만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지. 지안은 대꾸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어쩐지 피하기 어려웠다.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제 생각이 난다면 기회를 줘요. 내 빈자리를 느끼길 바라 줄기차게 붙어 있던 거니까.”

매일매일 웃는 그를 보았는데 지안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마든의 볼에 보조개가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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