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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52)화 (52/220)

51화

어젯밤, 노헤스카에 돌아온 가린에게 들은 말은 ‘마호세르디에서 모든 정보를 막았다’는 것뿐이었다.

첩자 관리는 주로 나엘라가 맡아서 하던 일이라 가린 또한 권한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입구부터 막혀 아예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고 전했다.

심지어는 도착한 날부터 가린이 지내는 곳 주변에는 사용인 하나 얼씬하지 않았단다.

이 정도로 정보를 통제한다면 마호세르디 전체에서 무언가 나엘라에게 숨기는 것이다.

그것도 큰 건일 게 분명하다.

이상한 낌새에 가린이 기사단과 연무장을 급습했지만 모두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다른 정보라도 얻을까 며칠을 버티며 친했던 하녀들을 만났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두 울상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만 전했을 정도였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가린은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나엘라가 본격적으로 체계를 잡고 관리했던 곳에서 어찌 이럴 수 있는가. 그들의 거절이 큰 충격이었는지 그 침착하던 가린이 살짝 눈물까지 보였다.

가린을 달랬으나 나엘라에게도 충격적이었다.

한참 이유와 가능성을 따져 보던 나엘라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마차 안이 유난히 조용했다.

지안의 표정이 멍한 것이 어쩐지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그 옆에 있는 제니에게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자신도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저녁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기다렸건만 더는 못 참겠다.

“지안.”

“…….”

“지안!”

“네, 네?!”

“무슨 일 있어?”

화들짝 놀란 지안이 손에 있던 모자를 떨어트렸다. 본인이 더 놀라 얼른 주워 들더니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일인데?”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지안이 나한테 무언가를 숨기다니…….”

“아니에요! 진짜 별일 아니라서 그래요!”

“무슨 일이 있는 건 맞네.”

“아, 그게…….”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에 나엘라가 더욱 닦달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걸 공유했는데……. 지안이 나에게 숨기는 게 생기다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실망이야.”

어쩔 줄 몰라하던 지안은 결심을 한 듯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 마든 집사장님에게 고백받았어요.”

“뭐……? 마든 집사장? 내가 아는 그 마든 집사장?”

“네……. 대공 전하께서 노헤스카로 돌아오시는 날, 집사는 그만두고 다시 기사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셨거든요. 그렇게 되면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해 줄 수 없냐고…….”

나엘라는 올라오는 혈압에 잠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마든이 유난히 지안의 옆을 맴돈다 싶었다. 워낙 오지랖이 넓고 여기저기 끼어들기 좋아해 그런가 넘겼던 일이다.

그런데 고백이라니, 우리 소중한 지안에게 고백이라니!

절대 안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옆에 있던 제니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이 얼굴에 한가득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 입을 열진 못했다. 저렇게 고민하는 지안의 모습을 처음 본 탓이다. 우물쭈물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말문을 막았다.

그동안 지안에게 고백한 남자들이 여럿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점잖고 잘생긴 기사도, 평민이라도 상관없으니 결혼해 달라는 귀족도 있었다.

성질이 사나워서 그렇지 지안이 어디 누군가에게 꿀리는 외모이던가.

그런데 하필 마든이라니. 그 촐싹 맞은 인간이라니.

나엘라는 결사반대를 외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고개 숙인 채 귀가 빨개진 지안을 보며 답답한 마음을 겨우겨우 눌러 참았다.

“지안은…… 크흠, 왜 목이 메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지안은 고백 듣고 무슨 기분이 들었는데?”

“목이 메이시면 음료수라도 드릴까요?”

“아니야. 그래서 메이는 거 아닌 것 같으니까.”

“……조금 놀랐어요.”

“갑자기 고백해서?”

“그것도 있지만, 제가 사람과 닿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걸 알고 있더라고요.”

“대체 얼마나 건드렸으면…….”

“부축하거나 휙 돌아서 가려는 저를 붙잡는 정도였어요. 어떻게 알았는지도 놀랐지만 왜 싫어하는지도 안 묻더라고요. 그래서 은근히 배려가 많구나 싶기도 하고…….”

“신이시여…….”

“그리고 이런 말 하면 조금 그렇지만 은근 나엘라 님이랑 비슷한 면이 있더라고요.”

마든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자신이 그렇게 촐싹거린다고?

나엘라는 충격으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설마 지안의 눈에는 그동안 자신이 그렇게 비치고 있었나 걱정이 엄습했다.

“뭐, 뭐가 비슷한데……?”

“은근히 약한 거요.”

“응……?”

“나엘라 님은 사람을 잃는 걸 무서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그러시잖아요. 나엘라 님과 조금 다르지만 집사장님은 남을 탓하기보단 자신을 탓하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목숨의 무게를 아니 무서웠겠죠.”

“지안…… 대체 마든을 언제부터 그렇게 이해하고…….”

“그냥 갑자기 이해가 됐어요. 그래서 옆에서 알짱거릴 때 매몰차게 내쫓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누가 지금 나엘라의 마음을 알까.

일곱 살에 만나 평생을 함께 지냈던 지안이다. 그런데 웬 놈에게 잘못 걸려 단단히 홀린 것 같았다. 정말 불한당 같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마든에 대한 나엘라의 평가가 실시간으로 바닥을 쳤다.

“그…… 지안, 그러니까 말이야…….”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 집사장님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요. 저도 싫어했으니까요.”

세상에, 이제는 하다 하다 마든의 편을 든다. 나엘라는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집사장님이 버텨서 강해지겠다고 기회를 달래요.”

“이미 결정한 건 아니지……?”

“사실 조금 전까지 고민했었는데 나엘라 님께 얘기하면서 정했어요. 한 번쯤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당장 뭘 하자는 것도 아니고…… 수도에서 돌아오면 제대로 얘기하기로 했거든요.”

“왜, 왜 그런 결정을 했는데……?”

“충분히 강한 사람이 스스로를 회피하는 게 싫었는데, 그게 또 마음이 가는 이유가 됐어요. 좋아한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기회를 주고 싶어요. 버티고 강해지겠다는 그 마음을 격려해 주고도 싶고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

“제 주변을 가장 오래 맴돌았던 사람이기도 하고요. 아시잖아요. 제가 차갑게 굴면 다들 일주일도 안 되어 마음을 접었던 거.”

“그건 끈기가 없거나 마음이 작았던 게 아니야. 하일모라를 봐서 알잖아.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보면 집사장님한텐 처음 들은 거니까 거절한 적이 없던 셈이네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때까지의 남자들은 고백하고 주변을 맴돌다가 지안의 차가운 태도에 마음을 접었었다.

그런데 마든은 주변을 맴돌다가 고백해 차인 적도, 마음을 접을 이유도 없었다.

가만 생각하던 나엘라는 약은 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반하자마자 고백했다면 차였을 게 뻔하니 버티다 지른 것이다. 심지어 당분간 떨어지게 될 지금.

열이 확 올라온 나엘라는 그놈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안은 처음이라 이놈의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언제나 다짐했었다. 지안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마음껏 응원해 주자고. 언제나 지안의 편이 되어 주자고 말이다.

지안이 이미 결정을 내렸는데 뭐라 말을 얹는단 말인가.

지안에게 모진 말을 할 순 없으니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마든을 아무도 모르는 야산에 묻는다.

“그래. 지안, 나는 언제나 너를 응원할 거야.”

나엘라가 살며시 웃으며 끌어안자 지안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지안의 등 뒤로 제니와 나엘라가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

자신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디부터 문제였을까!

사피오는 검지로 자신의 안경테를 쓰윽 끌어 올리며 꿀꺽 침을 삼켰다.

시작은 도이네 백작령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부터였다. 아니, 진행하던 일이 어긋나면서부터였던 게 분명하다.

사피오가 소속되어 있는 곳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어디든 손을 댔다. 정보, 암살자, 상단, 밀수품까지 가리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상단을 운영하는 주군 밑에서 보좌한 지 어언 2년째였다.

그런데 얼마 전, 군수용품을 밀수로 팔아 치우려던 것을 들켜 문제가 생겼다.

그날따라 운이 안 좋았는지 평소 정찰도 없던 시간에 갑작스럽게 정찰병과 마주친 데다 바로 줄줄이 끌려간 것이 문제였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지?”

굳은 눈으로 노려보는 사피오에게 다른 이들이 더 큰 문제를 꺼냈다.

“문제가 하나 더 있는데…….”

“뭐지?”

“아랫놈들이 절대 건드리지 말라던 마호세르디의 물건까지 건드렸습니다.”

화가 난 사피오는 늘 침착하던 태도를 집어던지고 책상까지 주먹으로 내리쳤다.

마호세르디는 보안도 철저하고 밀수품에 대한 추격도 심하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기어코 누군가 일을 친 모양이었다.

이걸 주군에게 어찌 보고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중간 다리를 하던 놈이 잡히자마자 발 빠르게 국경 근처에 있던 조직들을 와해시켜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바로 얼마 뒤에 마호세르디의 기사들과 노헤스카의 기사단이 각 영지 근처 은신처에 다녀가기까지 했다.

‘이걸 어찌 보고해야 할지…….’

심지어 주군께서 마호세르디 쪽에 걸리면 끝장이니 관련된 장소, 사람은 모두 피하라고 직접 말했었던 터라 다음 정기 보고가 걱정되었다. 뭐라 변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걱정을 끌어안은 채 조직을 정리한 후 사피오는 자기 할 일을 하던 중이었다. 상단 일을 마무리할 적에 줄리 도이네 백작을 마주쳤다.

평소 거래를 하던 곳이기에 작별을 고했다. 당분간은 동부에서 생활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때 도이네 백작 부인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던 것이 문제였다.

“왜 동부로 가는 거죠?”

“잠시 휴식을 하려고 합니다.”

“상단은요?”

“다른 사람이 맡아 줄 겁니다.”

“그럼 당분간 일이 없다는 거네요?”

“그렇죠……?”

“좋네요. 그럼 내일 나랑 어디 좀 가요. 내가 사피오를 참 좋게 보고 있었거든요.”

부인은 무척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사피오가 거절하기도 전에 자리를 피하듯 휙 나가 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득달같이 찾아와 그를 재촉했다.

사파오는 난처한 표정으로 시간을 빼긴 힘들 것 같다는 말을 전했지만, 그녀는 만만찮았다.

“어머, 다른 직원에게 사피오가 오늘 일정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개인적인 일이라…….”

“오늘 온종일 집에 있을 테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그게…….”

“아침에 몇 시간만 내어 주면 돼요. 이미 사피오를 위해 분위기 좋은 카페 하나를 통으로 예약했답니다.”

결국,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교묘히 말을 돌리며 목적지도 알려 주지 않던 그녀는 대공령에 있는 중앙 광장 한복판에서 사피오를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본인은 수도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한다며 식사 맛있게 하라는 말을 끝으로 휙 사라졌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줄리 부인이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 굴었던 적이 없기에 사피오는 헛웃음만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식당 앞에서 사피오는 한참을 생각했다. 식당을 통째로 빌렸다고 했는데 그냥 가야 하나, 그래도 맛이라도 보고 갈까 고민하던 찰나, 웬 기사가 다가와 이름을 물었다.

“그대가 사피오인가?”

“그렇습니다.”

“따라오게.”

그리고 지금, 사피오는 귀빈 전용 방에 앉아 한 여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도 주군으로부터 절대 마주치지 말라 전해 들었던 마호세르디의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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