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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53)화 (53/220)

52화

사피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따라 심기 불편한 일이 있었는지 다리를 꼬고 비딱하게 앉아 있는 모양새가 심히 거만하고 불량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 자수정 같은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 사람 앞에 있는지, 그녀가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름이…….”

“처음 뵙겠습니다. 사피오라고 합니다.”

“아아, 평민이군요.”

“말 높이지 마십시오. 제가 불편합니다.”

“음? 나를 알고 있나?”

정체는 모르더라도 그녀의 태도나 자세만 보면 바로 귀족인지 알 것이다. 거기다 놓으란다고 바로 놓는 말투도 보통이 아니었다.

“노헤스카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에 대해서는 이 근처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 듣고 있습니다.”

“태도가 꽤 침착하군.”

“……감사합니다.”

“상단 일을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결혼은?”

“아직 어립니다.”

“몇 살이지?”

“스물셋입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자신이 대체 왜 이런 질문을 받고 있어야 하지?

사피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줄리 부인을 완강히 거절하기만 했더라면 이것보다 훨씬 좋은 아침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들었겠지만 우리는 지금 대공령의 행정을 전담해 줄 관리를 구하는 중일세.”

“예?”

사피오는 지금 뭘 들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노헤스카 대공령의 행정 관리를 왜 내게?

“줄리 부인에게 듣지 못했나 보군.”

“아……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 상단 행정 업무를 했다고?”

“예에…….”

“보통 무슨 일은 했나?”

“행정 업무라고는 말하기 애매합니다. 저는 계산이나 세금 같은 업무보다는 거래 대응과 총괄 업무를 했습니다.”

“나쁘지 않군. 예산 업무는 다른 이들이 보조해 주면 될 테고, 상단과 영지 경영은 조금 차이가 있겠지만 줄리 부인이 똑똑하다 했으니 금방 감 잡겠지.”

“저…… 죄송하지만 저는 대공령에서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상단을 그만둔 것도 아니고요.”

“몇 달간 쉰다고 들었네. 그동안만 일해 주면 돼.”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동부 쪽에서 상단의 다음 계획도 진행해야 하니 미리 확인할 겸 가는 것도 있고요.”

사피오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말 한마디가 틀어지는 순간 제멋대로 군다. 귀족의 제안을 평민이 거절한 셈이니 그녀가 조금 더 안하무인이라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런 고민이 무섭게 나엘라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본인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줄리 부인이 이곳의 오전을 모두 비워 뒀다니 식사라도 하고 가시게.”

너무 쉬운 수긍에 조금 더 언쟁이 오갈 거라 생각했던 사피오는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엘라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보도록 하지.”

“조, 조심해서 가십시오.”

사피오가 엉거주춤 일어났으나 나엘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방을 나갔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만남에 사피오는 나엘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떨떨하다 못해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는 아침이었다.

*

“이건 버려 줘.”

나엘라가 쪽지 하나를 건네자 제니는 잘게 찢어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 이들은 식당에서 걸어 나가 자연스럽게 마차에 올랐다.

“나쁘지 않네.”

줄리 부인이 사피오 몰래 전해 줬던 쪽지에는 ‘대공비 전하께서 찾으시는 인재에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실력은 보증하겠으나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줄리 부인이 직접 보증했으니 실력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오가며 거래를 해 봤으니 장담을 했겠지.

다만 얼굴이나 한번 볼 겸, 신상 조사 좀 해 볼 겸 만나자고 했을 뿐이었다. 멋모르고 사람을 구했다가 괜히 문제가 생기는 것보단 나았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호위 기사들이 묻자 나엘라는 예정대로 영지 시찰을 명했다. 마차에 앉아 처리할 것들을 확인했다.

“오후에 조알론에게 대공저로 들르라 해. 계획을 전부 앞당겨야 하니 언제까지 가능할지 상의해 봐야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든에게 내년 예산 계획서 가져오라고 하고. 사피오가 일하게 된다 해도 당장 중요한 것들은 맡기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사피오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조사해 보면 알겠지.”

“능력은 확인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줄리 부인이 장담했는데 뭐. 우리가 수도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전반적인 관리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상단에서 쉽게 나올 것 같진 않던데요.”

“나오게 만들어야지. 조사할 때 상단주랑 어떻게 알게 됐는지, 얼마나 일을 잘하길래 상단 총괄 업무를 하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전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단이니 사피오에 대한 것도 좀 알려져 있지 않겠어?”

“아, 그리고 수도에 있는 노헤스카 명의의 저택을 새로 단장한다고 마든이 전해 왔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한다네요. 혹시 원하시는 거 있으신가요?”

마든의 이름이 나오자 제니와 나엘라는 무의식적으로 지안을 한 번 바라보았다. 눈치를 보는 둘과 달리 오히려 지안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괜히 머쓱해졌다.

“음…… 체드란과 한 침실을 쓰겠다고 전해 줘. 물론 체드란에게도 동의를 구하고.”

“네?”

“거기부터는 저택에도 감시가 따라붙을 거야. 거기다 수도는 사용인들의 신상까지 일일이 확인해 볼 수도 없어. 그럴 시간도, 그런 인력도 없으니까. 세기의 로맨스라면 로맨스답게 행동해야지.”

이번에는 혼자 오해하는 것 없이 충분한 동의를 구하고 행동할 것이다.

체드란이 불편해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승낙한다면 나엘라가 손끝 하나 건들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써야지 어쩌겠는가.

“그리고 나머지 일들도 빨리 확인하는 게 좋으니까 마든에게 검토할 자료들 전부 가져오라고 해. 내가 1차로 확인하고 체드란에게 보내는 게 낫겠지.”

“대공 전하께서도 그게 편하시겠죠?”

“그리고 며칠 내로 대공저에서 파티 하나 열어야겠어.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하는 건 어려워 보이니 내가 눈도장을 찍고 수도로 올라가는 게 낫겠지. 수도 사교회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에 올라갈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움직여도 좋고. 내 편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파티 목적은 뭐라 할까요?”

“연말 파티. 딱 그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초대 명단은요?”

“주변 영지 모두. 귀족파, 황제파 가리지 말고.”

나엘라는 주변 영지들에게 회유와 협박, 그 사이의 무언가를 적절히 조정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를 고민했다.

“아, 체드란의 선물을 하나 사야겠군.”

“선물이요?”

“체드란의 사람들을 빌려 줘서 고맙다고.”

체드란의 사람들이란 노헤스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첩자들이었다.

현재 나엘라는 마호세르디의 첩자들이 가져오는 정보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걸러진 정보임이 확실해졌으니 당분간은 체드란의 사람들을 빌리기로 했다.

첩자 교육이나 체계에 관해 나엘라가 자문해 주기로 답하자 체드란 또한 반겼다.

오늘도 사피오에게 사람을 붙이기 위해 체드란에게 사람 하나를 요청한 참이었다.

물론 일차적으로 체드란에게 정보가 들어가겠지만 차라리 마호세르디보다 나았다. 적어도 그가 나엘라에게 정보를 숨길 일은 없을 테니.

마차 밖의 영지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엘라는 어느새 다가온 수도 생활을 하나둘 셈하기 시작했다.

*

저녁 식사 전, 사용인들이 한창 바쁠 시간에 지안은 자신의 일을 프리야에게 맡겨 놓고 휴게실로 들어왔다.

다행히 다들 바쁠 때라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휴게실 중 가장 구석에 있는 곳이어서 자주 오는 이도 없었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녀는 곧이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든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평소처럼 미소 지었다.

“이렇게 빨리 답을 내릴 줄 몰랐습니다. 저는 천천히 답을 달라 했는데…….”

당연히 거절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마든의 말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오래 끄는 성격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예외이길 바랬습니다.”

그리 대답하면서도 마든은 착실하게 지안의 앞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중 지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나엘라 님을 가장 싫어하던 사람이었어요.”

마든은 뜬금없는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내용에 정말 크게 놀랐다. 지금의 지안을 보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왜 싫어했습니까?”

“나는 살고 싶었는데 주변에서 죽기를 바랐고, 나엘라 님은 죽고 싶었는데 주변에서 살기를 바랐거든요. 처음 만났을 적의 나엘라 님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감정이 격해지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든은 또다시 놀랐다. 지안도 그렇지만, 나엘라도 지금의 모습과 예전의 모습이 너무 달랐다.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는 하나 큰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사정인지 궁금하죠?”

지안의 물음에 마든은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고백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인데 지안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해 꼭 듣고 싶었다.

“네, 매우 궁금합니다.”

솔직한 것이 정답이었을까? 지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안 말해 줄 거예요.”

“예?”

“지금은 이런 이야기들을 가만히 나눌 때가 아니잖아요. 수도에서 돌아오면 그때는 집사장님의 이야기도 제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요.”

“아…….”

“제 이야기는 조금 신파긴 하지만…… 어떤 이야기든 신파가 빠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죠. 삶은 더 억지스러운 감동이 많거든요, 억지스러운 불행이 많은 만큼.”

“지안의 이야기가 신파가 아닐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오고 간 내용엔 충분한 답변이 담겨 있었다.

“여름이 기다려지겠네요.”

“노헤스카의 여름은 굉장히 덥다면서요?”

“뭐든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할 겁니다.”

“큰일이네요. 저 더운 거 엄청 싫어하는데.”

“시름시름 앓고 있는 지안을 보게 되겠네요.”

“너무 짜증 내도 이해해 주세요. 더우면 예민해져서.”

“여기 사람 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당당하게 얘기하던 것과 달리 쑥스러움이 찾아왔는지 지안의 귓가가 불그스름했다.

누군가 함께 있는 상상을 하고 미래에 함께 있다는 상상을 한다. 서로가 어떤 행동을 하리란 상상 하나로 정체 모를 달콤함이 두 사람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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