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체드란은 다나한의 서신을 훑어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다나한의 서신에는 그들이 조사하던 조직에 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잡아 왔던 범인들이 실토한 것 중 확인된 장소들을 급습했으나 이미 모두 사라진 후였단다. 어떻게 마호세르디의 군수물품을 얻었는지와 그 경로를 찾아내려 역추적 중이라고도 했다. 주변 탐문, 흔적 조사로 꼬리 잡기 중이란 이야기였다.
이때까지 확인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생각보다 오래된 조직이라는 것이다.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큰 건 아니지만 뒷세계에서는 손가락 안에 들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돈 되는 것은 가리지 않으며, 매번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결정적인 정보는 아니었다. 이것도 그저 건너 들었던 자료였다.
다나한은 작은 정보도 놓치지 않으려 소문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나마도 마호세르디와 서부 주변에서만 자유로울 뿐 동부나 북부는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헌데, 하필이면 마호세르디에서는 해당 조직이 제대로 활동하지 않아 얻을 만한 것이 적은 게 문제였다.
사실상 쓸 만한 정보가 많지 않아 고심하던 그는 종이를 꺼내 제가 아는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뒷세계에서 그 조직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와 그 수장을 본 이는 한 명도 없다는 것, 매번 은신처가 바뀐다는 것, 수도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무언가를 한참 더 고민하던 체드란은 쪽지를 봉투에 넣어 밀봉했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마든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대공비 전하께서 사람을 붙여 달라고 했던 자, 말입니다.”
“아, 총괄 업무에 고용한다고 했나? 어떤 사람이지?”
“톨레로 상단의 관리라고 합니다. 이름은 사피오, 평민이고 스물세 살입니다. 직함은 없으나 상단주의 측근인지 거의 상단주 대리로 일해 왔다 합니다.”
“톨레로 상단의 사피오?”
체드란의 눈이 천천히 깜박였다.
“도이네 백작 부인의 추천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조사 결과가 조금 이상합니다.”
“어떻길래?”
“일단 두칸과 제국인의 혼혈입니다. 그래서 야만족의 거대한 체구나 까만 피부 같은 특징이 안 나타난 것 같습니다. 어릴 땐 두칸 쪽에서 생활한 것 같은데 워낙 폐쇄적인 곳이니 그 차별을 못 참고 제국으로 숨어 들어온 모양입니다.”
“가끔 그런 이들이 있지.”
“온갖 일을 하다가 상단주와 우연히 인연이 닿은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상단주의 후원으로 고등 교육을 받았고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상단에 뛰어든 것 같습니다.”
“꽤 일을 잘하는가 보군.”
“평범하던 상단을 제국 전역에 확대한 장본인이라네요. 아직 수도까지 진출한 것은 아니지만 외곽까지는 이름이 알려졌답니다.”
“그런 이가 과연 이곳에서 일하려고 할까?”
“대공비 전하의 이야기로는 잠시 휴식 겸 일을 쉰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쉬는 동안에만 일시적으로 고용할 생각이라고요.”
“어떻게 고용할 생각이라던가?”
“안 되면 되게 하면 된다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상상도 안 되는군.”
“상단을 샅샅이 조사하라고 하셨으니 무슨 방법이 있으시겠죠.”
체드란은 보고서를 넘겨받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것은 조사원들이 대공 전하께 바로 전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체드란은 잘 밀봉된 서신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든이나 다른 이를 거치지 않고 보고해야 할 사항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충 뜯어 내용을 확인한 체드란은 그것을 다시 접어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나 더 확인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뭐지?”
“오늘, 수도의 노헤스카 저택이 보수와 새 단장을 시작했습니다. 대공비 전하께 따로 필요한 것이 있나 물었더니, 먼저 대공 전하께 동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말하게.”
“수도 저택에서는 한 침실을 쓰는 게 어떠신가 여쭤보라고…….”
보고서를 확인하며 듣느라 아래에 고정되어 있던 체드란의 시선이 단번에 위로 올라왔다.
“지금 뭐라고?”
“아무래도 수도이니 사람들의 시선을 좀 더 신경 써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침실을 함께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요.”
“그래서 한 침대를 쓰겠다고?”
“다행히 한 침대는 아닙니다. 수도 저택의 주인 부부가 쓰는 방은 침실이 응접실을 기준으로 각각 나뉘어 있습니다. 복도로 나가려면 응접실을 필히 지나야 하지만요.”
다행히 한 침대를 쓴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단장이 끝나기 전에 마주칠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
잠시 당황스러움을 내비쳤던 체드란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럼 그리 자주 마주치지는 않겠군.”
“그건 모르는 일이죠. 대공비 전하도 이르게 일어나시는 편이고 대공 전하께서도 영지 시찰이나 경계 지역을 나가지 않는 이상 새벽에 일어나진 않으시잖아요. 침실이 붙어 있으면 아침 식사도 같이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체드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나엘라는 상관없다 하던가?”
“그러니 물어보셨겠죠?”
“방이 어떤 구조인지도 얘기했는가?”
“그건 안 했습니다.”
“그럼 그녀는 한 침대를 쓴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가서 말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굳이…….”
“말하지 말까요?”
“아닐세. 말하고 오게나.”
체드란은 순간 한 침대를 써도 상관없으리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음흉한 목적이 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어차피 소문과 첩자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라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또, 뭐하러 번거롭게 이 방 저 방을 다 쓰나 싶기도 했다.
제 시중을 들 하녀 따로, 나엘라 하녀 따로 쓰지 않아도 문제없지 않을까?
여러모로 한 침대가 낫다는 생각을 하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말을 물렀다.
“일단 나엘라에게 알았다고 전해 주게.”
“그럼 방을 합친다 답하겠습니다.”
마든이 집무실을 나간 후 체드란은 들고 있던 펜을 내팽개쳤다. 손으로 눈을 가리자 어느새 뜨끈뜨끈하게 올라온 열이 느껴졌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
나엘라는 손에 들린 보고서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든의 말에 따르면 체드란에게 간 보고서와 자신에게 온 보고서가 동일하다 했으니 다른 걱정은 없었다.
하나씩 살펴보던 나엘라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상단인데 상단주에 대한 정보가 이렇게 적어?”
나엘라에 의문에 볼일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온 지안이 대답했다.
“마든 님에게 살짝 들었는데 어떤 보고가 밀봉되어 대공 전하께 올라갔답니다. 이건 절대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보고서를 뒤적거리던 나엘라는 손을 딱 멈추고 애매한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먼저 집사장에서 마든 님으로 바뀐 호칭에 대해 물어봐야 할까, 주군에 대한 비밀 사항을 날름 불어 버린 마든부터 탓해야 할까.
왠지 두 가지 다 의미 없다는 생각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체드란은 밀봉된 보고를 확인했대?”
“네. 그러고 아무 말도 없으셨답니다.”
“내게 무언가를 전하라는 말은 없었고?”
“나중에 따로 전할 생각이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사피오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시 사항을 보고한 걸 수도 있고요.”
탁, 소리와 함께 보고서를 내려놓은 나엘라는 팔짱을 끼고 팔 안쪽을 톡톡톡 두드렸다.
“이상할 만큼 상단주에 대한 정보가 없네. 여태껏 거래를 어떻게 한 거지? 귀족들이나 큰 거래처들이 상단주도 보지 않고 거래를 했을 리가 없는데.”
“귀족 중 한 명이 뒷배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답니다. 상단 본 건물이 그 귀족의 영지에 있기도 하고요.”
“어떤 귀족?”
“우부라 자작입니다.”
“처음 듣는데?”
“그자도 진짜 상단주가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황후와 황태자 쪽에 한 발씩 걸쳐져 있는 인물이고, 우부라 가문 자체도 옛날부터 황실 행정을 담당해 왔습니다. 똑똑한 이들이 많다네요. 장남은 현재 황실에서 일하고 차남이 상단을 도맡아 처리한답니다. 황실에 친인척이 늘 있으니 특혜라거나 특약이 있을 거라는 오해를 받기 싫어 일부러 수도엔 진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 정도의 인물이면 진짜 상단주일 만도 한데, 왜 가짜라는 이야기가 돌지?”
“소규모로 운영되던 톨레로 상단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게 2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우부라 가문의 지출은 얼마 변하지 않았답니다.”
“돈을 벌었는데 쓰지를 않았다고?”
“네. 그러니 이상하죠. 그 외에는 더 조사를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이상함을 느낀 나엘라가 다시 보고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상단은 10년 전부터 소규모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사피오의 손이 닿으며 사업이 확장됐다.
황실에서 일하는 관리 가문이라면 청렴함이 기본일 텐데 대체 기본 자금은 어디서 났을까? 그동안 소규모로 운영했던 것은 황실 눈치를 보던 것이 아니었나?
“갑자기 세를 불린 것이 이상해. 분명 황제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을 텐데. 게다가 능력이 좋다 한들 사피오 혼자 상단을 키우는 건 무리야. 귀족들이 쉽게 응했을 리도 없고.”
나엘라는 의문이 드는 부분들이 적힌 보고서를 책상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장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가 보고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연결하며 생각하던 나엘라는 어느 한 부분에서 손가락을 멈추었다.
우부라 자작가.
이곳에 분명 뭔가 있다.
톡─ 톡─ 톡─
사피오, 상단주 대리, 2년 전, 돈의 행방.
톡, 톡, 톡.
우부라 자작가, 황실 행정 관리, 톨레로 상단, 차남.
톡톡톡.
사피오의 고등 교육, 상단주와 우연한 만남, 두칸에서의 밀입국.
톡!
손가락을 빠르게 두드리다 어느 순간 딱 멈추곤 보고서에서 천천히 떼어 냈다.
가만히 의문점들을 돌아보던 나엘라는 곧이어 잠시 숙였던 허리를 폈다.
“지안, 상단주에 대해 더 알아보고 내가 적어 주는 거 프리야에게 전해.”
“뭔가를 아셨습니까?”
“확인해 봐야 되겠지만 가능성이 있어서 말이야.”
“뭘 확인하라 할까요?”
“일단 황후와 연관이 있는지부터.”
“그리고 하나는…….”
곧이어 나오는 이야기에 지안의 눈동자가 잠시 동그래졌다. ‘에이, 설마요’ 하고 답변하면서도 묘하게 납득이 간다는 눈치였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우리는 무조건 사피오를 고용한다. 톨레로 상단 본 건물에 바로 편지 보낼 준비해.”
나엘라는 산뜻하게 웃으며 뭐라고 보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