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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55)화 (55/220)

54화

파르로시 테샤.

황후의 둘째이자 현재 남은 유일한 황녀로 알려진 자식이다. 황후를 닮은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과 황제를 닮은 푸른 눈동자로 유명했다.

하지만 데테로아 황태자나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처럼 선명한 푸른색은 아니기에 황실의 피가 옅다고 다들 수군댔다.

신기한 것은 화려한 붉은 머리와 푸른 눈의 조합이 묘하게 어색하단 점이었다. 모두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화려한 눈매나 붉은 입술만 칭찬하는 실정이었다.

그 때문인지 철저히 황후의 사람이 아니면 잘 만나지 않았는데, 페트론 황자의 죽음 이후에는 더했다. 황실 주체 파티 외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유일 뿐 그녀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이라면 알고 있었다. 황후가 그녀의 파티 참석을 막았다는 것을.

“체드란이 수도로 온다는구나.”

수도에는 체드란과 나엘라 대공비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수도에 있는 노헤스카 저택이 단장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대공 부부가 올라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애처가라는 대공과 비밀에 쌓인 대공비의 이야기이니 다들 흥미진진해하며 연신 떠들어 댔다.

“네, 들었어요. 어머니.”

고개를 푹 숙인 파르로시는 한눈에 보기에도 겁에 질려 있었다.

끼리릭─

황후의 기다란 손톱이 테이블을 긁고 지나가자 파르로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들었는데 너는 대체 뭘 하는 게냐.”

“하, 하지만……!”

짜악─

황후의 손이 그대로 파르로시의 얼굴을 내리쳤다.

“어디서 말대답인지 모르겠구나. 너도 내가 우스운가 보구나.”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어머니.”

황급히 소파에서 내려온 파르로시는 황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얼굴은 오랫동안 학습된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짜악─

“누가 그렇게 교양 없이 목소리를 높이라 했느냐. 네가 요즘 맞지를 않았더니 모두 잊었구나.”

“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으나 황후는 한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파르로시를 내려다보았다.

차갑기보단 오히려 혐오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도저히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뒤에 티 파티가 있으니 채찍은 들지 않겠다. 다만 저녁 식사 후 내 방으로 건너오거라.”

“어, 어머니……!”

파르로시의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음에도 황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방 밖에선 이미 시녀들이 얼음찜질을 준비 중이었다.

“똑바로 행동하거라.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잊지 마.”

“알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은 울음을 참아 낸 파르로시가 겨우 대답했다. 지금 울면 체벌이 더욱 심해질 뿐이다.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느라 드레스가 모두 구겨졌지만, 어차피 방 밖에 있는 시녀들은 황후가 찾아온 순간 여분의 드레스까지 준비해 놨을 터였다.

“어차피 체드란은 널 좋아하지 않는다. 그 행동들은 모두 가식이라고 얘기했잖니.”

“어머니…….”

“늘 잊지 말아라. 가지지 못하면 부숴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내가 언제든 도와주마. 사랑하는 딸을 위해 어미가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니.”

파르로시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다르다는 이유로, 황후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일곱 살이 되어서야 처음 체드란을 만났다.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었고 잊으려고 해 본 적도 없었다. 단 한 번의 온기가 그녀를 뒤흔들어 놨기에.

“쯧. 멍청하기는.”

황후의 질타에도 파르로시는 고개만 숙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나마 황후가 체드란과 관련된 일만큼은 봐주었기에 대답하지 않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체드란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파르로시의 감정을 봐주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하고, 마음을 묵인해 준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만 나가 보거라. 난 조금 뒤에 갈 테니.”

제 방이었지만 늘 있던 일처럼 파르로시는 군말 없이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곳이 어디든 황후의 의사가 있는 한, 그곳이 황후의 방이었다.

파르로시가 방문을 나서 빠른 걸음으로 다른 방을 향했다. 여분으로 준비해 놓은 침실로, 황후 때문에 방이 엉망이 되면 그곳에서 잠들곤 했다.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얼음주머니와 새 드레스를 든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누군가 얼굴에 얼음주머니를 갖다 대자 파르로시는 그것을 매섭게 쳐 냈다.

“저리 치워!”

짝─

시녀의 손등이 빨개지며 얼음주머니가 날아갔지만, 그녀들은 곧 아무렇지 않게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웬 하녀가 끌려 들어왔다. 시녀는 자연스레 파르로시에게 채찍을 건넸다.

“황녀님의 방을 청소하는 하녀입니다. 베개에 솜을 제대로 채워 넣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황녀님! 잘못했습니다!”

건장한 하인들의 손에 끌려온 하녀는 겁에 질려 연신 잘못을 빌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양손은 침대와 천장에 연결된 봉에 묶이고 있었다.

곧이어 완전히 결박되어 하녀가 움직이지 못하자 파르로시는 주저 없이 채찍을 쥐고 휘둘렀다.

짜악─

“아악! 화, 황녀님 살려 주세요! 황녀님!”

짜악─ 짜악─

연달아 채찍이 날아와 하녀의 옷을 찢고 연한 살을 갈랐다. 파르로시는 독기 가득한 눈동자로 이를 악문 채 있는 힘껏 채찍을 내리쳤다.

얼마나 정신없이 채찍을 휘둘렀을까, 중간중간 기절한 하녀를 물을 부어 깨운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숨을 몰아쉬는 파르로시에게 조용히 시녀 하나가 다가와 채찍을 회수해 갔다.

지친 듯 소파에 주저앉자 하인들이 하녀를 풀어 끌고 나갔다. 재빠르게 다가온 시녀들이 얼음주머니로 달아오른 파르로시의 볼을 식혔다.

파르로시는 소리 지를 힘도, 채찍을 휘두를 힘도 없었다.

“티 파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단장하셔야 합니다.”

시녀의 말에 파르로시는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 파티에 늦었다가는 황후가 또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억지로 일어나 드레스를 갈아입고 시녀들의 손길을 말없이 받았다. 역시나 오늘도 드레스고 장신구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직접 고를 시간이 없었다.

장신구를 착용하고 머리를 고치는 동안 얼음주머니를 댄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붓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붓기가 빠르게 가라앉는 체질이 복인지 독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가시죠.”

붉은 기까지 화장으로 모두 가린 파르로시는 늘 그렇듯이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티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가는 내내 파르로시의 머릿속에는 체드란만 가득했다.

그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정말 소문이 진짜일까.

정말 둘은 애틋한 사랑을 하는 중일까.

정말 체드란은 나엘라 마호세르디에게 푹 빠져 있는 걸까?

거짓말.

소문들은 마호세르디에서 만들어 낸 거짓말일 것이다.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런 여자를 체드란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분명 마호세르디에 도움을 받기 위해 잠시 그런 척하는 거겠지. 솔직히 마호세르디가 재력이나 군사력 빼면 볼 것이 뭐가 있나.

“어머니, 제발…… 제발 부탁드릴게요.”

간절히 빌고 빌어서 어머니의 사람을 빌려 두 사람 사이를 알아보았을 땐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그나마 둘이 식당에서나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다 했다.

파르로시도 체드란의 결혼식 때 나엘라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마호세르디의 특징인 검은 머리와 보라색 눈동자. 황가는 가장 앞줄에 앉기에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본 것이다.

절대 체드란이 그녀를 사랑할 리가 없다.

그녀는…… 그녀는…….

파르로시는 이를 악물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조금 도와주마.”

또다시 어머니의 힘을 빌렸으나 변변찮게 끝났기에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때 죽어 버렸으면, 두 번 다시 얼굴 들고 살지 못하도록 해 줬다면…….

“곧 화원입니다.”

파르로시는 겨우 표정을 관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 티 파티는 황궁에서 자랑하는 제1 정원이 아니라 제4 정원에서 진행된다. 이 모임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기도 하고, 황후에게 하사된 정원이라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파르로시가 화원 안으로 들어가자 앉아 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났다.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부인들이나 영애들은 모두 황후가 친분을 다져 놓으라 했던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얼마 전에 알게 된 베르에티 영애도 있었다.

그녀는 친분이 있다는 하일모라 부인 옆에 앉아 있었다. 서부 군사력을 쥐고 있는 루부스 후작가이기에 황후가 유난히 신경을 쓰라던 영애였다.

“오늘 드레스가 잘 어울리네, 영애.”

베르에티에게 첫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자 여기저기서 인사가 들려왔다. 파르로시는 턱을 꼿꼿이 들고 간단하게만 답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곧이어 티포트와 디저트 트레이들이 놓이며 파티가 시작되었다. 가볍게 근황을 묻고 차림새를 칭찬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아직 황후가 오기 전이라 모두 진지한 화제를 피하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 눈치 없이 뒤로 미뤄 두었던 이야기를 먼저 꺼내었다.

“곧 대공 부부가 올라온다죠?”

모두의 시선이 말을 꺼낸 베르에티에게 옮겨 갔다. 베르에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저번 파티에서 체드란이 대놓고 황제파와 교류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사람들 사이에 파다했다. 이 중대한 사안을 함부로 언급했느냔 사람들의 책망 어린 시선이 이어졌다.

물론 이들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체드란에 대한 파르로시의 집착을 알기 때문이었다.

“영애는…… 자네 아버지를 조금 더 생각하지 그러나?”

날카로운 파르로시의 말과 표독스러운 표정을 본 베르에티가 놀란 듯 죄송하다며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황후가 직접 명을 내리긴 했지만, 정작 파르로시가 독선적으로 행동해도 딱히 말리진 않았다. 그녀가 패악을 부리면 황후가 자애로운 척 다독여 와 대부분 속사정을 몰랐다.

황후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파르로시는 자제하지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황후의 앞에서는 쥐새끼처럼 벌벌 떨어도 다른 이들에게는 참지 않았다.

“나는 나엘라 마호세르디 공작 영애가 수도로 빨리 올라오기를 바라고 있네.”

나엘라를 공작 영애라 지칭하는 것은 명백히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녀가 체드란 대공을 믿고 안하무인 행동할 것이 너무 뻔하지 않나. 나는 그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네.”

파르로시가 황후와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도가 어떤 곳인지 알려 줘야 하지 않겠나.”

파르로시는 나엘라에게 어떤 모욕을 줄지 상상하며 흡족한 기분에 젖었다.

모두 그런 그녀에게 집중하느라 하일모라가 고개를 숙이고 살짝 눈을 감은 것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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