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56)화 (56/220)

55화

사피오는 잔뜩 표정을 굳힌 채 들고 있는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원래 오늘 일정은 남부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상단의 본 건물이 있는 우부라 자작령으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급보로 전해진 한 통의 서신이 그를 붙잡았다. 그곳에는 한동안 노헤스카 대공령에 머무르며 대공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신을 보낸 이는 우부라 자작가의 차남이지만 상단주의 명령인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연달아 노헤스카 대공령에서 보내온 서신도 도착했다. 내용은 이번 연말 파티의 필요한 것들을 모두 톨레로 상단에서 구입할 예정이며, 사피오가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사피오는 바로 나엘라를 떠올렸다. 분명 그녀가 벌인 짓이다. 상단의 어떤 흐름을 눈치챘고, 상단주에게 거래를 청했든 협박을 했든 무슨 행동을 했으리라.

정확한 사정을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는 적혀 있었지만, 문제는 상단주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였다.

위험한 것을 뻔히 알면서 대체 왜? 설마 모든 것을 들킨 것일까?

만약 들켰다면 서신 자체가 오지 않았을 텐데.

혹시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것이 있었나? 애초에 나엘라와 얘기를 나눴어야 실수도 하지 않겠는가.

몇 마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눈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되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사피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노헤스카 대공저로 가야 했다. 심지어 파티는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일정을 강행하는 것만 봐도 대공비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허나 급한 건 이 일을 맡게 된 자신이다. 그사이에 모든 준비를 마치려면 시간이 무척 부족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피오는 고생길이 훤해 축 처진 어깨로 건물을 나섰다.

*

나엘라는 며칠 동안 바쁜 시간을 보냈다. 검토할 것도, 처리할 것도 너무나 많았다.

그사이 프리야가 건네준 보고서를 훑어본 후 톨레로 상단주에게 서신을 보냈다. 상단의 본 건물로 보냈으나 일하는 이들이 빠릿빠릿 움직였다면 진짜 상단주도 서신을 확인하고 결정을 내렸겠지. 그건 사피오가 오면 확인될 것이다.

서신에는 별 내용을 적지 않았다. 그저 사피오를 잠시 고용했으면 좋겠다는 것과 그 대가로 노헤스카와 남부 영지들의 거래를 연결해 주리란 것, 상단의 얼굴이 되어 줄 의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상단주가 표면적으로 나서지 않으니 자신이 대신 보증을 선다면 앞으로의 거래가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거기다 거래처를 확보해 주겠다는데 누가 이것을 거절할까.

나엘라는 일반적인 상단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못할 조건들을 제시했다. 거절한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테니 잠깐은 나엘라의 손을 잡으리라.

사피오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니 이런 나엘라의 태도도 납득할 터다. 평생 고용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인데 이 정도 대가는 나쁘지 않았다.

다른 이가 봤다면 대가가 후하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딱히 이 일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엘라도 믿는 것이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마든이 고개를 내밀었다.

“사피오라는 이가 찾아왔습니다.”

“응접실로 가지.”

“알겠습니다.”

사피오가 생각보다 일찍 온 것을 보니 상단주의 결단이 빨랐던 모양이다. 느긋하게 움직인 나엘라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먼저 앉아 있던 사피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물셋답지 않은 침착한 표정을 마주한 나엘라는 새삼 이 상황이 재밌었다.

“그대도 궁금한 것이 있을 테니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이야기하지. 상단주에게 들은 것이 있는가?”

사피오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령에서 일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좋군.”

나엘라가 만족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나?”

“혹시 거래를 청하신 겁니까?”

“그대를 두고?”

“네.”

“그랬지. 그대를 고용하는 대가를 치르기로 했네.”

“하지만 그때 만났을 때는 별말 없이 돌아가셨잖습니까.”

“그때는 그랬지. 그것에 대해 변명을 해야 하는가?”

“그건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그대의 능력이 꽤 자자하더군. 그때 그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네.”

전혀 후회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나엘라를 두고 사피오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온 김에 파티 준비와 대공령에서 할 업무에 대해 듣고 가게나. 우리 집사장이 알려 줄 걸세.”

“잠시만요!”

대화가 짧아도 너무 짧았다.

나엘라는 순전히 자기 할 말만 내뱉고는 또다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 모습에 놀라 붙잡으려 했지만, 나엘라는 그 손길을 가볍게 피했다.

“더 물을 것이 있나?”

“그래도 자세한 것들을 알려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일단 저를 왜 믿으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대공령의 정보를 상단에 넘기면 어쩌시려고 이리 쉽게 맡기십니까?”

“그럼 그렇게 하게나.”

“예?”

“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말했네.”

사피오를 믿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도대체 뭘 믿길래. 하지만 사피오는 더 입을 떼지 못했다. 나엘라의 당당한 표정을 보니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인가 싶어졌다.

“더 질문할 것이 없으면 가 봐도 되겠나? 봐야 할 서류가 산더미네.”

사피오는 더 붙잡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렇게 얘기하는 상대에게 무엇을 더 물을 수 있을까.

“없습니다…….”

“좋군. 그럼 이만.”

나엘라는 들어온 지 몇 분 만에 바람처럼 휙 사라졌다.

저번 만남과 이번 만남을 합쳐 10분은 넘었을까?

사피오는 그런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

대공저에서 연말 파티가 열린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남부의 영지들에 초대장이 전달되었다.

문제는 파티 일자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남부의 디자이너들이 모두 피를 토했고, 보석상들은 일시적으로 전량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파티 참석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비록 세력이 다르다고 한들 남부의 실세가 파티를 연다는데 누가 가지 않겠는가.

심지어 노헤스카에서 열리는 몇십 년 만의 파티였다. 그 전 노헤스카 백작부인이 죽고 나서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남부에 활기가 돌았다.

그리고 파티를 준비하며 몇몇 이들은 눈물을 보였다. 행정 관리들은 살인적인 일정을 함께할 사람이 늘었다는 것에 행복해서 울었고, 사피오는 왜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울었다.

파티에 필요한 것들만 빠르게 조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몇십 년 만에 열리는 파티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언제 파티가 열릴지 몰라 나엘라가 온 뒤로 마든이 조금씩 준비를 해 놨다는 것이다. 사피오는 안 그래도 노안인데 하루하루 빠르게 늙어 갔다.

말도 안 되는 일정에도 파티는 열렸고 귀족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모두 남부에 영지를 두고 있는 귀족들이라 안면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얼추 시간이 지나 모든 이들이 참석했다고 느껴졌을 때 홀 입구에 있던 시종이 대공 부부의 입장을 알렸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 전하와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 전하 드십니다!”

모두 홀 입구에 시선이 모이고 체드란과 나엘라가 입장했다.

체드란은 늘 하던 것처럼 백금발을 깔끔하게 넘겨 무뚝뚝한 눈매와 가지런한 이마를 드러냈다.

다만 목을 모두 가리는 형태의 카라가 있는 셔츠를 입고 타이를 꽉 매어 놓았다. 화려한 장신구도 모두 빼고 검은색의 예복을 입어 금욕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반면에 나엘라는 눈동자 색이랑 똑같은 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평상시 딱 붙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던 것과 달리 오늘은 소매가 팔목까지 오는 엠파이어 드레스였다. 다만 목 부분과 등이 깊게 파여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대공 부부가 다정히 입장하자 사람들이 길을 내어 주었다. 대공저의 두 주인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곧 부부가 단상 위로 올라가고 나엘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하는 것을 본 적 있는 이들은 여전히 대공이 애처가라는 생각을 했고, 처음 보는 이들도 소문의 진위를 확인했다며 눈을 빛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엘라 노헤스카입니다.”

담담히 흘러나오는 나엘라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그리고 형식적인 인사가 뒤따랐다.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든의 잔소리에 거의 외우다시피 한 말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엘라에게는 더 중요한 본론이 있었다.

“저희 부부가 이렇게 자리를 비우는 것이 처음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머리에 나엘라가 원하는 것을 박아 넣을 기회인데 어떻게 쉬이 보내겠는가.

“그래서 제 가문의 기사단을 노헤스카에 주둔시킬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나엘라는 언제든 마호세르디의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음을, 그 정도로 권한이 많고 여전히 마호세르디 공작이 아끼는 자식임을 전했다.

“하지만 남부의 일에 서부를 끌어드리는 것은 체드란 님에게 좋지 않겠더라고요. 우리 남부도 충분히 강하니까요. 그저 제 걱정이 과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본론을 말해야 사람들이 너무 놀라지 않을까.

“우리는 언제나 야만인들을 상대하고 있고 노헤스카는 그에 대한 대비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다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야만인들은 그 점을 모른다는 것이죠. 괜한 호기로움으로 노헤스카에 피해가 온다면 저는 수도에 있는 내내 마음을 놓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야 나엘라가 무언가 원하는 게 있음을 사람들도 알아차렸다.

“그래서 각 영지에서 기사단을 지원받고자 합니다. 야만인들을 견제하기에 하나 된 남부를 보여 주는 것만큼 더 좋은 본보기가 있을까요?”

사람들은 술렁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나엘라의 말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헤스카가 기사단들을 감당하기 어려우리란 걱정은 하지 마세요. 군수 물자를 책임져 줄 마호세르디의 장인도 있고, 톨레로 상단과 함께 그 외 물자들을 지원할 겁니다.”

돈을 안 받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영주들이 혹할 만한 것들을 던져 주었다. 거기다 톨레로 상단주에게 거래처를 찾아 주겠다던 약속도 지키고.

“절대 강요는 아닙니다.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보호받고 싶다면 책임을 다하라.

이것이 포장된 강요임을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미 던져졌고, 앞으로 그들의 행동이 처우를 결정할 것이다.

그녀는 받은 만큼 철저히 돌려주는 사람이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