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나엘라는 생각보다 제가 검은색 옷이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고 소식에 지안도 기가 막힌 얼굴을 했지만, 곧 다른 이들을 불러 정신없이 나엘라를 꾸몄다.
장례식장이니 단정해야 하고 수수해야 한다. 동시에 나엘라가 수도에서 하는 첫 활동이니 남들에게 꿀려서도 안 됐다.
한참 나엘라에게 이 옷 저 옷을 대 보던 지안은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첫 활동이 장례식장이라니! 황후가 나엘라 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해요!”
뭘 이런 걸로 벌써부터 화를 내냐며 겨우 지안을 달랬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 자리가 황후에게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수도는 원래 그런 곳이다.
아니, 원래 그런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만든 이들이 문제였다.
나엘라는 단정한 검은색 드레스에 검은색 장갑을 착용하고, 검은 면사포를 드리운 모자까지 썼다. 맘껏 꾸미지 못할 바에는 제대로 보여 주지 않겠다며 지안이 꽁꽁 싸맨 결과였다.
체드란은 최대한 장식이 없는 검은 옷으로 갖춰 입었다. 제니가 아직 풀지도 않은 그의 옷 상자를 뒤져 꺼내 온 것이다. 애초에 검은 옷들이 많아 고르기도 쉬웠다.
“첫 활동이 장례식장이라 상심이 크겠군.”
아무래도 지안이 소리 지른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나엘라는 상관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 말고 그대의 하녀들 말일세.”
뜬금없는 말에 나엘라는 설핏 웃고는 마차에 올랐다. 방향은 살라만 후작가였다.
*
살라만 후작저는 황후의 가문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화려함의 끝을 달렸다. 건물 중앙 로비부터 놓인 그림들은 명작이라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일렬로 걸려 있었고, 그림과 그림 사이 틈에는 조각상들이 빼곡히 자리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안쪽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런 사치품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체드란과 나엘라가 가장 늦게 도착했는지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체드란이 조용히 속삭였다.
“과하면 조잡하다는 것을 모르나 보군.”
나엘라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안내해 주던 하인이 돌아보기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살라만 후작가에서 원한 대로 돈을 바른 느낌은 확실히 전해졌으니 의도가 손상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뭘 얼마나 빼돌려야 돈이 이렇게 많을까 정도.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살라만 후작가의 가장 안쪽 별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장례식은 이미 진행 중인지 사제로 보이는 자가 앞에서 기도문을 읊고 있었다. 사제는 또 얼마나 높은 사람을 데려왔을 것이며, 그런 사제를 초빙하는데 돈을 얼마나 들였을까 궁금했다.
체드란과 나엘라는 가장 뒤쪽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다만 체드란의 외모가 너무 튀어선지 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처음에는 근처에 있는 이들만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나중에는 꽤 앞쪽까지 은근슬쩍 돌아보았다.
면사포가 달린 모자를 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지안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나엘라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자세를 굳혔다.
슬쩍 앞을 훑는 나엘라의 시야에 한눈에 보기에도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저렇게 선명한 붉은 색은 살라만 후작가가 유일하다고 했던가.
황후가 바테니 살라만이던 시절, 그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로 많은 남자를 울렸다고 들었다. 나이가 든 지금도 젊은 시절이 연상될 만큼 미모가 출중하다 소문이 자자했다.
나름 그 외모가 궁금해 붉은 뒤통수를 주의 깊게 보던 나엘라는 문득 깨달았다. 옆에 또 다른 붉은 뒤통수가 있다는 것을.
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지고 태어났다던 파르로시 황녀인가.
나엘라는 옆에 있던 체드란을 슬쩍 훑었다. 파르로시 황녀가 체드란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같이 와도 괜찮았던 걸까.
대충 다른 쪽을 살펴보니 다른 백금발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황후와 파르로시 황녀만 있다는 말이었다. 황제도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한 번에 다 상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나엘라는 마음을 접었다.
얼마 뒤 사제가 축언을 줄이며 장례식이 끝났다. 아무래도 끝마무리쯤에 도착한 것 같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관 앞에 꽃을 놓거나 고인의 가족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고인에게 꽃 하나는 놓고 와야겠죠.”
물론 그보다 싫은 일은 황후에게 인사도 하고 가야 한다는 거지만. 나엘라는 곧장 집에 가고픈 마음을 애써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드란은 별로 탐탁지 않아 했지만, 마지막 가는 길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냐며 나엘라의 뒤를 따랐다.
“미리 말하지만 난 얼굴도 모르네.”
“그럴 수도 있죠.”
나엘라라고 살라만 부인을 봤겠는가.
단지 죽음조차 이용당하는 것이 안쓰러워 꽃이라도 올려 주려는 것이다. 거기다 한눈에 보기에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니 더 확인하고픈 이유도 있고.
나엘라와 체드란이 천천히 관 앞으로 향하자 하나둘 시선이 쏠렸다. 황후의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둘은 철저히 적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한 건지 장례식장에 오기 전 체드란이 먼저 물어 왔었다. 참석을 거절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당연히 나엘라는 단칼에 거절했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체드란도 그렇게 나올 것 같았다며 예의상 물어본 것이라 답했다.
나엘라가 꽃을 관 앞에 놓은 뒤 잠시 기도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나 죽음 후에는 편안하시길.
짧은 기도를 끝내자 나엘라에게 맞춰 기도를 끝내는 체드란이 보였다. 분명 애도 따위는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기도가 너무 짧다며 괜한 트집이 잡힐까 최대한 천천히 돌아선 나엘라는 황후와 파르로시 황녀를 찾아 고개를 들었다.
보고 싶은 것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그랬던가.
찾으려던 붉은 머리카락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하늘색 머리카락만 눈에 들어왔다. 면사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도 정확히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옆에는 주황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의 이도 있었다.
사방이 적인 곳에서 너무 그리운 이를 만난 탓일까, 나엘라는 면사포가 달린 것에 안도했다. 아니었으면 감정이 요동치는 표정을 들켰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오래 보지도 못했다. 혹시나 다른 이들이 눈치챌까 몸을 돌려 곁눈질로 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어느새 사람들에 가려져 있었다.
“보았나 보군.”
체드란이 나엘라의 어깨를 감싸고 살짝 고개를 숙여 말했다.
“체드란도 봤어요?”
“그래. 사람들에 가려져 있군. 저 인파를 헤치고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군. 생각 같아선 그냥 가고 싶기도 하고.”
나엘라는 서로 다른 이를 말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잃었다. 체드란은 황후와 파르로시 황녀를 먼저 본 모양이었다.
설마 체드란이 보고 싶었던 이가 그 둘이었나.
“빨리 인사하고 빨리 가는 게 좋으니 한번 가 보죠.”
체드란과 나엘라가 천천히 황실 모녀를 향해 다가가자 웃기게도 사람들 사이에 길이 만들어졌다. 그들과 가까이 있던 이들이 대공 부부를 발견하고 길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길을 비키자 어느새 황후 앞까지 이어졌다.
나엘라는 그 길 끝에 서서 손수건을 쥔 황후를 보았다. 붉은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채 담담히 있는 모습이 딱히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황후도 연기해 가며 슬픈 척을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사람들이 조금 더 길을 비키자 살짝 가려져 있던 파르로시 황녀도 보였다.
황후와 다르게 반 묶음을 하고 있지만, 그 선명한 붉은빛의 머리카락이 눈에 확 띄었다. 눈동자 색은 분명 같은 푸른색임에도 체드란의 눈동자와는 다른 느낌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오목조목 예쁜 이목구비이긴 하나 나엘라에게는 3황녀인 지엘라가 훨씬 예쁘게 느껴졌다.
파르로시의 시선은 신기할 정도로 체드란에게만 꽂혀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절절하기 그지없어 보이리라.
체드란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미색이라는 것도 알고, 무뚝뚝한 표정이 여자의 무언가를 자극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나엘라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파르로시의 시선이 곧이어 나엘라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까지 내려왔다. 순간 눈꼬리가 휙 올라가며 눈동자가 확 불타기에 나엘라는 마치 남의 남자라도 뺏은 기분이 들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체드란의 반응이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 미동이 없어 괜히 제가 다 민망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체드란이 먼저 황후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실 예법을 지키지 않는 그에게 조금 놀랐지만, 뒤따른 말들에 나엘라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안 본 사이에 예절을 잊은 모양이구나. 확실히 황가를 나선 지 오래되었지.”
“아들로 부르신 줄 알았더니 귀족 중 하나로 부르셨나 봅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참석하지 않았을 텐데요.”
황후가 선제공격을 한 줄 알았으나 유효타는 체드란의 것이었단 느낌이었다.
사고를 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대부분 나엘라의 몫이었다. 체드란이 하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기에 무감한 성격인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하긴 황후에게 얼마나 많이 괴롭힘당했던가. 그 정도면 세상 착한 사람도 들이박을 만했다.
“모자 사이에도 예의는 있단다. 유의해 주려무나.”
황후는 의외로 부드럽게 웃으며 따뜻한 사람인 척 연기했다. 언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진 않아도 성격 좋은 황후란 평은 놓치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황후가 한발 뒤로 물러나자 체드란도 한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체드란에겐 복병이 하나 더 있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오라버니…….”
파르로시의 인사야말로 예의 따위 없는 가족 같은 인사였다. 체드란이 황가의 권리나 계승권을 포기한 지가 언제인데, 황후는 여전히 이용하고 황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니.
모녀의 작태에 점점 더 어이가 없어지던 그때, 나엘라는 문득 무시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어 모른 척 끼어들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제대로 예를 지키지 못함을 용서하세요. 나엘라 노헤스카입니다, 황후 마마.”
만나서 영광이라는 인사를 장례식장에서 어찌하겠는가.
나엘라의 인사에 파르로시가 도끼눈이 되어 나무랐다.
“제가 아직 오라버니와 인사 중입니다.”
진짜 오라버니라 생각했다면 나엘라도 윗사람으로 대우해야 맞다는 건 알고 있는 걸까?
나엘라가 뭐라 대꾸할까 고민하던 찰나 황후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자리가 자리니 그냥 넘어가거라.”
나엘라의 실수를 너른 마음으로 보듬는단 태도였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아 지켜보는 사이 황후가 말을 이었다.
“대공비가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아는 이가 없겠구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거라.”
대공비의 자리는 아무리 황실이라도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나엘라를 제 아래로 보는 태도가 아닌가.
오는 대거리를 피할 나엘라가 아니었다. 웃는 낯으로 한마디 쏘아 주려던 찰나, 예상하지 못한 인물들이 들이닥쳤다.
저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데테로아 황태자와 아버지가 나타났다.
뜻하지 않은 지원군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