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황후 마마.”
데테로아 황태자가 느긋하게 걸어와 황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체드란과 같은 백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지만 인상은 완전히 달랐다. 체드란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다.
체드란도 나엘라처럼 갑작스레 등장한 두 사람을 보고 꽤 놀랐는지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무덤덤한 표정 밑에 번진 당황스러움이 전해졌다.
파르로시 황녀 또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만큼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들이었다.
이곳에서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는 척하는 인물은 황후뿐이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황태자가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황후는 시종일관 성격 좋은 윗사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문에 부고가 생겼는데 어찌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서운합니다.”
아들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체드란을 불렀으니 데테로아에게도 명분이 생김을 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가 절대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거나.
옆에 있던 공작도 인사를 건네 왔다.
“사위의 어머니시니 사돈 가문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저 또한 서운합니다. 우연히 황태자 전하를 만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참석도 못 할 뻔했습니다.”
마호세르디 공작의 말은 왜 내 딸을 이런 곳에 불렀느냐는 항의에 가까웠다.
황후가 억지를 부려 체드란을 불렀으니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굳이 오지 않아도 됐는데. 이곳에 나엘라가 불려 왔다는 소리에 기겁하고 쫓아왔을 공작이 눈에 선했다.
결혼식 이후 처음 보는 아버지인데 어찌 반갑지 않을까.
비록 황후에게는 한마디도 못 했지만 이보다 더 통쾌할 수가 없었다.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 해 나엘라는 애써 입매를 굳혔다.
마호세르디 공작이 바로 옆에 있는데 그가 애지중지한다는 막내딸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을까.
오늘 황후의 계획이 뭐였든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어찌 보면 황태자와 체드란, 마호세르디까지 모두 한편이라 눈치챌 수도 있어 나중이 걱정되었지만 나엘라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아버지가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올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황태자의 물음에 파르로시는 분한 얼굴로 입을 꾸욱 닫았다.
중상모략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황실에서 태어난 사람이 저렇게까지 감정을 선명히 표현하다니. 심지어 감출 생각도 없어 보여 나엘라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한 것은 황후가 제지하려는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둘의 모습이 묘하게 어색하다면 나엘라가 예민한 것일까.
“그저 걱정했을 따름입니다. 대공 부부가 오늘 막 수도에 올라와 아는 이가 없지 않습니까.”
누가 보면 진짜 걱정이라도 한 줄 알겠다. 공작도 나엘라의 생각과 같았는지 황후의 말을 단칼에 끊어 냈다.
“제가 많은 이들을 소개해 줄 텐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안 그래도 오늘 막 수도에 올라와 어색할 딸아이와 대공 전하를 위해 모레쯤 조촐한 만찬회를 열려 했습니다. 친한 이들을 소개할 예정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지요.”
오늘 막 올라온 만큼 부부가 피곤할 테니 모레나 되어 식사할 예정이었다는 말을 돌려 전했다.
아버지가 이런 귀족적인 화법도 잘한다는 걸 새삼 깨달은 나엘라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애도를 위한 자리이지만 제가 속이 좁아 불편한 이들이 조금 눈에 띄는군요. 딸 부부와 먼저 돌아가고 싶은데 윤허해 주시겠습니까?”
이곳은 온갖 귀족들이 모인 본거지다. 공작이 먼저 저자세로 나오며 부탁하는데 황후가 쉬이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분할 텐데도 황후는 끝까지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히 돌아가라 전했다. 체드란과 나엘라에게도 푹 쉬고 다음에 보자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저는 조금 더 머무르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가겠습니다.”
황태자는 조금 더 있다 가겠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황후와 친분이 있는 자들만 있지만, 그중에는 황태자의 사람이었다가 황후에게 붙은 이들도 있었다.
데테로아는 그들과 꼭 인사를 하고 갈 작정이었다.
체드란과 나엘라는 황후에게 인사를 건넨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작과 후작저를 나섰다. 정말 황태자와 함께 왔는지 가문의 마차도 없어 공작은 나엘라와 같은 마차를 타야 했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후작저의 대문을 나서자마자 나엘라가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떻게 황태자 전하와 함께 오셨어요? 마차는 또 어쩌시고요? 당연히 뒷일은 생각하신 거죠?”
나엘라가 쏘아 대는 질문에 공작은 허허 웃었다.
“일단 대공 전하께 인사 좀 하자꾸나.”
오랜만에 뵈어 반갑다는 간단한 인사가 공작과 체드란 사이를 오갔다. 안부 인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입을 열려는 나엘라를 공작이 겨우 막았다.
“황태자 전하와는 일시적인 동맹처럼 보이게 할 생각이다. 황후가 대놓고 움직였으니 눈을 가리기에 적당하다.”
“다들 황제를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에요?”
“그 양반은 안 움직여도 의심하고, 움직여도 의심할 양반이야. 그럴 바엔 움직이는 것이 낫지.”
“아버지!”
공작의 변명은 오는 길에 급히 짠 티가 여실히 났다. 뒷일을 생각하고 움직인 줄 알았더니 아무 생각 없이 지르고 본 모양이었다.
제 머리는 어머니를 닮은 게 분명하다고 나엘라는 생각했다.
몸은 아버지를 닮고 머리는 어머니를 닮고.
좋은 것만 닮아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나엘라.”
작정하고 잔소리하려는 나엘라를 체드란이 말렸다.
“지금은 반가워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체드란의 말에 나엘라는 순간 움찔하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소중한 사람 중 하나였는데 너무 다른 일에 급급했다. 잠시 공작의 얼굴을 훑은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다른 건 늘 빠르더니 이런 건 여전히 느리구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나엘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그리움과 애정을 어찌 다 표현할까. 많이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버지와 말없이도 나누는 감정들이 가득했다.
*
황후는 자신의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들고 있던 부채를 내팽개쳤다.
“채찍을 가져와라.”
“어머니!”
뒤에 서 있던 파르로시가 하얗게 질려 황후를 붙잡았다. 그녀의 찢어질 듯한 비명과 애원에도 방문은 가차 없이 열렸다. 황후가 따로 부리는 시종들이 소리 없이 들어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황녀님.”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선고와도 같았다.
황후의 침실 앞에는 기사들과 하녀들이 둘러싸 봉쇄했다.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서자 침실 안에서 애처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시종들이 파르로시를 붙잡고 옷을 벗겨 내었다. 외간 남자들이 감히 황녀의 옷을 벗기고 있음에도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만류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늘 있던 일인 양 반항하는 파르로시를 내리누르고 속옷만 남긴 채 침대에 묶었다.
파르로시가 하녀에게 내리던 체벌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오늘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느냐.”
“잘, 잘못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빌고자 한들 양손이 묶여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황후를 닮은 붉은 머리가 시종들의 손에 우악스럽게 묶이자 등이 훤히 드러났다.
“제대로 대공비에게 한마디를 했어야지. 이래서야 주변 이들이 너를 더욱 무시할 것이 아니냐.”
예법을 실수했다는 것도 아닌 제대로 패악을 부리지 못했음을 탓했다.
일반적인 교육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지만 그 방 안에, 아니 황후의 궁 안에선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자는 없었다.
“오늘 일을 반성하거라.”
황후가 채찍을 꽉 쥐고 크게 휘두르자 짜악─ 소리와 함께 파르로시의 등을 가르고 지나갔다. 선명한 붉은 줄이 그녀의 등에 새겨졌지만 그저 수많은 흉터 중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왜, 왜 이렇게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지.”
짜악─ 짜악─
채찍이 연달아 파르로시의 등을 할퀴곤 튕겨져 나왔다.
묶인 상태에서 한마디라도 대들거나 말대꾸를 하면 매질이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파르로시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랜 시절 맞아 왔음에도 다음 채찍질이 무서운 것은 변함이 없었다.
“너는 어찌 이리 모자라서 주변 사람들이 너를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냐. 그러니 내가 이리 가혹한 체벌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잘, 잘못……!”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용서를 구하려던 찰나 다시 한번 채찍이 살을 찢었다. 잘못 깨무는 바람에 파르로시의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도 황후는 멍청하다며 혀를 찼다.
“당장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오늘은 이쯤 하자꾸나.”
그 말과 동시에 시종들이 달려들어 파르로시의 손을 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평소보다 훨씬 유한 처사였으나 절대 그녀를 위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늘 대놓고 황후의 사람들을 수면 위로 올렸으니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 파르로시를 크게 체벌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은 혼절할 때까지 때리고, 그렇게 해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며칠을 방치한 채 식사 한 끼 주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조용히 지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양손을 전부 풀어 준 후 시종들이 방을 나서자 무표정한 시녀들이 방으로 들어와 파르로시에게 옷을 입혔다.
새롭게 남은 붉은 흉터가 쓰라리리란 걸 알 텐데도 그녀들의 손은 거침없었다. 오히려 빠르게 단장해 주는 것이 파르로시를 위한 길임을 알았다.
“그나저나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구나.”
교활한 늙은이라며 인상을 쓴 황후는 긴 손톱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살살 긁었다. 나무로 된 테이블인지라 까드득, 소리만 날 뿐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은 없었다.
보통 황후의 방에 있는 대부분의 가구는 유리로 만든 것이었다. 재력을 뽐내기에도 적당하지만, 무엇보다 황후가 좋아해 매번 제작 주문을 맡기는 편이다.
헌데 얼마 전 모종의 이유로 유리 테이블이 박살 나 새 제품이 도착하기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역시 황태자와 마호세르디는 손을 잡을 것 같구나.”
이미 손을 잡았음을 모르는 황후는 오늘 일로 황태자와 황제파가 손을 잡겠거니 생각했다. 부고장을 날려 자신의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알면서도 행했다. 감춰 왔던 마음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길 바라서.
황후는 그저 황제의 표정이 궁금했다.
“페트론을 죽였을 때처럼 나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황후는 그러길 바랐다.
허나 그 늙은이는 절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또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인질을 잡은 채 협박할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이용할 사람들도, 이용할 본인도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할 테니.
까드득─ 까드득─
테이블 모서리를 긁는 황후를 보며 파르로시는 그저 숨죽여 벌벌 떨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