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60)화 (60/220)

59화

저택에 도착했을 때 체드란은 마호세르디 공작에게 에스코트를 양보했다. 나엘라가 공작의 손을 마주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그는 뒤늦게 내리며 부녀를 바라봤다.

“저는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부녀끼리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 주려는 그의 배려였다. 공작도 나엘라도 서로에게 할 말이 많은 터라 감사히 받아들였다.

“잠시 산책 좀 하다가 들어가죠. 저녁 식사 하고 가실 거죠?”

나엘라의 물음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온기가 가득한 공작의 시선을 보며 체드란은 새삼 피부로 느꼈다.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와닿았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용인들을 물릴 테니 편히 산책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체드란은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수도에 있는 노헤스카 저택은 정원이 나쁘지 않습니다.”

“대공령에 있는 정원은 별로더냐.”

나엘라는 공작을 이끌어 한쪽에 마련된 정원으로 향했다.

확실히 수도 내 노헤스카 저택은 대공령과 차이를 보였다. 어딘지 삭막한 대공령과는 달리 이곳에는 수심이 깊지 않은 연못도 함께 있어 경관이 나쁘지 않았다.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꽃들도 한가득했다.

“군사 경계 지역에 무슨 정원이에요. 거기는 기후도 뜨겁고 건조한 편이라 꽃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네가 지내는데도 좋은 환경은 아니겠구나.”

“제가 꽃도 아니고 기후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내 눈에는 꽃이다.”

나엘라는 웃음을 살짝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수많은 남자들에게 구애를 받았음에도 꿈쩍 않았다던 어머니가 왜 아버지와 결혼했는지 새삼 이해가 되었다.

“저 같은 꽃이 어디 있답니까. 손에 굳은살도 가득하고 피비린내도 맡으며 살아왔는데요.”

“어허, 가시 있는 꽃이라고, 작고 안 예쁘게 피는 꽃이라고 그게 어디 꽃이 아니더냐. 그것들 모두 꽃이다.”

“하긴, 제게 예쁜 꽃이라고는 안 하셨네요.”

“나엘라.”

공작은 나엘라가 괜스레 말대답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마디라도 더 해 주고 싶었다. 제 눈에 나엘라가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를 말이다.

공작은 한결같이 나엘라를 걱정하고 나엘라의 길을 안타까워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며 살아가길 바랐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살기를 바란 적 없었다.

그 마음을 알지만 나엘라는 해야 할 일을 잘 아는 사람이다.

“내게는 네가 가장 예쁜 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꽃처럼 살기를 바란다.”

그런 아버지의 대답에 나엘라도 꽃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유난히 스스로를 뽐내는 꽃이 있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었던, 그리고 아직도 가장 사랑하는 이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었다.

“원래 아버지의 가장 예쁜 꽃은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엘라가 어떤 꽃을 바라보고 하는 얘기인지, 누구를 얘기하는지 공작이라고 왜 모를까.

한가득 핀 꽃들 중에는 우연찮게 누군가 좋아했던 꽃이 있었다. 처녀 시절, 지금의 나엘라처럼 빛나던 사람이 가장 좋아했던 꽃 말이다.

평생을 가장 사랑했던 이를 잃었기에 쉬이 꺼낼 수 없는 주제였다.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말에서조차 가슴이 아려 오래도록 가슴이 묻어 두었다. 그래서 더더욱 모를 수 없었고, 간혹 언급이라도 되면 공작은 목이 멨다.

“가슴에 묻은 꽃이 아니겠느냐. 꽃은 묻혔어도 나는 아직도 그 꽃이 선명하니 여전히 그립다.”

묻어야만 했던 꽃.

나엘라의 어머니는 그렇게 묻어야 했던 꽃이 아니었다.

누가 그랬는지 나엘라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왜 묻지 않았는지 과연 공작은 알고 있을까.

“아버지.”

나엘라가 연못을 눈앞에 두고 저 멀리 저택 부지를 감싸고 있는 담, 그리고 함께 모여 있는 귀족들의 저택 너머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자마자 선택받은 일가,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 사람들이 태양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살고 있는 그곳. 그 어디보다 화려하고 거대한 황궁이 보였다.

“정보, 왜 통제하셨습니까.”

나엘라의 시선은 여전히 황궁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만히 나엘라를 바라보던 공작 역시 시선을 돌려 황궁을 바라보았다.

저 화려함 속에 스러져 간 목숨이 얼마나 되던가.

부녀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증오해 마지않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궁금하더냐.”

“네. 당연히 제게 들어와야 할 정보들이라고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전 이제 마호세르디가 아니니까요.”

“네가 왜 마호세르디가 아니냐. 너는 여전히 마호세르디다.”

“그럼 마호세르디의 일원으로 묻겠습니다. 왜 제게 정보를 통제하셨습니까.”

공작의 눈은 고요한 호수와도 같았다. 점점 어두워지는 보라색의 눈동자는 혈기왕성하던 그의 젊은 시절보다 깊고, 무언가에 사무쳐 있었다.

너무 많은 것들을 감당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던 한 가문의 수장. 그 삶의 깊이를 어찌 알 수 있을까.

“내게 너는 아직도 일곱 살의 어린아이다.”

“이러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도 어린아이 취급을 받겠습니다.”

“부모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게 정보를 통제한 것의 답입니까? 제가 아직 어린아이라서요?”

“겉모습을 말한 것이 아니다. 네 안에 자리한 일곱 살의 나엘라를 말하는 것이다.”

황궁을 바라보던 나엘라의 시선이 공작에게로 옮겨졌다. 도대체 아버지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보를 받고 싶거든 이겨 내 보거라.”

“무엇을요?”

“곧 알게 될 것이다. 네가 그것을 이겨 내고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면 나 또한 네게 정보를 제공해 주마.”

한쪽 눈썹이 올라가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는 나엘라에게 공작은 작게 웃어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이겨 내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이 많이 오락가락하신가 봅니다. 갱년기십니까?”

“내게 와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울고 탓해도 된다는 소리다.”

“뭔가 잘못하셨군요.”

“네게 정보를 공개할 수 없을 만큼.”

큰일이 벌어졌다 생각은 했지만 공작이 무언가를 잘못했으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수도에 올라온 지금도 공유하지 않는 건 미리 알아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 일에 관해서는 기다려야 할 듯했다. 조만간 알 수 있을 거라고도 했으니.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저 기다릴 수밖에.

말은 안 해도 서로를 믿고 있으니 할 수 있는 대처였다.

“그나저나 대공 전하는 어떻더냐?”

저 질문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이래저래 걱정이 많은 아버지니 부부간의 일도 내심 걱정이었을 터다.

“저를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대공 전하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언제는 가장 예쁜 꽃이라면서요?”

“가시가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진짜 갱년기십니까? 너무 오락가락하십니다.”

“네가 가만히 있으면 금방 고쳐질 것 같구나.”

나엘라는 말을 말자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는 일에 별반 터치하는 것도 없고, 의외로 날카로운 데다 똑똑합니다.”

“네 입에서 똑똑하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정말 의외로구나.”

“제가 고른 사람인데요, 뭘.”

문득 공작은 결혼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체드란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결혼도, 결혼 상대에 대한 결정도 모두 나엘라가 내린 결정이었다.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말렸다. 심지어는 수도에 있던 단제마저도 급히 휴가를 쓰고 달려왔을 정도였다. ‘결혼은 지옥이다!’라고 외치질 않나, 체드란이 너무 불쌍하다고 한탄을 하지 않나, 별의별 사건들이 다 있었다.

하지만 나엘라가 품속의 자식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제라도 솔직히 말해 보거라. 왜 대공 전하였느냐.”

요즘은 애처가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결혼 전 체드란의 소문은 그야말로 전쟁광, 피를 쫓는 악귀, 그 자체였다.

“아버지께서도 대공 전하 스스로 내신 소문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였다.

체드란은 황제에게 생길 위기감을 피하고 싶어했고, 명성이 깎일 만한 소문을 스스로 퍼트렸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여러 사람이 연기를 보았다고 하면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는 나는 법이지요.”

“그래서 대공 전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냐.”

공작도 체드란이 어떤 이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나 보았으니 몇 번의 대화로도 어떤 이인지 아는 법이었다.

거기다 마호세르디엔 유명한 첩보 기관이 있지 않은가.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사람의 본성이 가장 쉽게 드러나는 곳은 전쟁터라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솔직해지는 법이니까요. 체드란은 그런 곳에 반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보고서를 같이 보셨으면서 왜 이러십니까?”

결혼 전 체드란에 대해 알아볼 적에 공작도 함께 확인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자꾸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네 눈으로 본 그분은 어땠는지 묻는 것이다.”

“다정한 사람입니다.”

공작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 때 말 대신 사람을 압박하는 표정이었다.

나엘라의 표정이 누구에게서 시작됐는지 알 만했다. 체드란이 봤다면 부녀가 참으로 닮았다고 말했을 게 분명했다.

“결혼하기 전과 평가가 많이 다르구나.”

“제가 대체 뭐라 했었는데요?”

“마호세르디에 도움이 될 거라 했지.”

“다정하면 도움이 안 되는 겁니까?”

“다정한 사람을 찾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결혼하기 전, 나엘라는 다짜고짜 공작을 찾아가 책상 위에 보고서를 올려놓았다.

한동안 노헤스카 쪽으로 첩자들을 많이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결과가 결혼일 줄은 몰랐기에 공작은 골이 다 아팠다.

그런 공작에게 나엘라는 당당히 말했었다.

“결혼할 겁니다. 체드란 대공은 마호세르디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아무리 마호세르디가 대단하다고 한들 어디 결혼이 선언 하나로 실행할 수 있는 가벼운 것이던가. 하물며 상대는 대공이었다.

“적인 두칸의 야만인들이라도 모조리 척살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나 여자는 살려 주었고, 투항하던 이들에게도 쉬이 살수를 펼치는 사람도 아니었고요.”

“그 모습이 다정한 것은 아니지.”

“원래 전쟁에서 야만인들은 전원 척살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체드란이 나엘라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제 사람에겐 유독 평가가 후한 나엘라이니 그가 아무리 말해 봤자 소용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공작이 시선을 돌리자 나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줄리 부인이 그러더군요. 아버지께서 제가 이혼하고 마호세르디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있으셨다고.”

공작은 눈길이 슬며시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친구라도 속마음은 얘기하지 말 걸 그랬다. 고스란히 나엘라에게 들어갈 줄이야.

“크흠, 이혼 불가 조항이 있을 경우 양쪽의 동의하에만 이혼이 가능한 것을 모르더냐.”

“필요할 때까지 체드란의 이혼 신청을 거절하다가 일이 끝나면 돌아오라는 얘기셨습니까?”

“어허, 일을 끝내면 어차피 돌아올 생각이 아니었더냐?”

“체드란이 이혼을 원치 않으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리가.”

“아버지…….”

공작은 시선을 피하며 앞만 바라보았다.

“날씨가 아직 차구나. 그만 들어가자.”

공작은 저택 지리도 모르면서 휙 돌아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작의 바람과는 다르게 산책은 30분이나 더 이어졌다.

나엘라도 저택의 지리를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