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노헤스카 저택의 사용인들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대공 부부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그들에게 마호세르디 공작이라는 어마어마한 손님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에서 지내는 이들이기에 공작 한 명이 가진 무게를 모를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파의 수장이 아닌가.
더군다나 딸을 그리 끔찍이 아낀다지 않나. 만약 음식이 맛이 없기라도 해 ‘내 딸이 이런 음식들을 먹고 지낸단 말인가’란 뉘앙스라도 풍기면 큰일이었다.
절대 노헤스카의 명성을 깎을 수 없다며 주방 사람들은 영혼을 갈아 넣어 음식을 준비했다.
정작 공작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젊었을 때 전쟁터 한복판에서 군용 음식만 질리게 먹었던 터라 웬만한 것들은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었다.
매번 최고의 요리를 조리한다고 자부하는 마호세르디 주방장은 한탄할 일이지만 공작도, 마호세르디 사람들도 웬만하면 잘 먹었다.
그건 체드란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기사 출신이니 다를 바 없었다.
셋이 아무 생각 없이 무분별한 미각으로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나엘라가 문득 물었다.
“아버지, 혹시 살라만 부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교양 있는 귀족들의 식사 자리에서 남의 죽음을 쉽게 올리다니.
노헤스카의 사용인들이라지만 이곳은 수도였다. 전쟁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많기에 저택 주인들의 대화가 낯설어 다들 눈치를 보았다.
공작도 그들을 의식한 것인지 잠시 말을 고르다 대답했다.
“잘 모르겠구나. 사이가 안 좋은 이들과 잦은 만남을 가졌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심신이 많이 손상된 게 아니겠느냐.”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가 안 좋은 이들이라면 황후가 뻔했고, 그들과 자주 만났다면 결코 좋은 일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살라만 부인의 죽음에 황후가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나 여기서 더 파고들 주제는 아니어서 나엘라는 더 묻지 않았다. 체드란도 이해한 것인지 반문 없이 식사를 이어 갔다.
어느덧 식사가 끝난 후, 체드란은 집사 라르바를 불러 간단한 와인을 내오라 말했다. 그러고는 편한 자리를 위해 사람을 물러 달라 전하니, 곧이어 식기들이 치워지고 간단한 요깃거리와 함께 상이 준비되었다.
왜 하필 식당에서 대화하려는 것인지 나엘라가 의문을 갖자 마치 독심술이라도 한 듯 체드란이 설명을 이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대화하는 것이 다른 이들의 의심을 덜 살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밀폐된 곳에서 대화해 봤자 의심만 키운다는 말에 공작은 개의치 않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들이 모두 나가고 식당 문이 닫히자, 체드란은 손수 딴 와인을 공작에게 따라 주었다. 그 동작이 무척 군더더기가 없어 누가 보면 와인 애호가라 말할 정도였다.
“식당이나 침실, 개인적인 공간의 방음에 신경 썼으니 편히 얘기하셔도 됩니다.”
곧장 공작이 병을 받으려 했으나 체드란은 거절했다. 그는 술 자체를 마시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앞에는 잔조차 없었다.
새로운 면모를 본 것 같아 나엘라가 신기해할 쯤 그녀의 잔에도 와인이 가득 찼다. 한입 맛보자 당도도 별로 없고 깔끔한 것이 그녀의 입에 딱 맞았다.
“그래서 살라만 부인은 왜 죽였답니까?”
나엘라의 질문에 공작은 와인을 맛볼 시간 좀 달라며 잔을 기울였다. 평소엔 맛이 없다며 와인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점잖을 빼고 있다. 체드란에게는 아직 다 드러내지 않을 모양이었다.
나엘라가 팔불출이라며 실컷 까발린 줄도 모르고.
“황후가 제 성격에 이때까지 살려 뒀으면 오래 살려 두었지.”
와인 맛도 모르는 것을 나엘라가 뻔히 아는데 공작은 뻔뻔하게 좋은 품종이라며 칭찬을 했다.
“그럼 이때까지 왜 살려 두었답니까?”
“황후가 보통 독한 인물이더냐. 말려 죽이려 했던 것이지. 어린 시절의 설움을 다 풀고 나서야 성에 찬 것이 아니겠느냐.”
“얼마나 풀었길래요?”
“살라만 부인이 하루하루 눈에 띄게 메말라 갔다 하더구나. 무슨 짓을 했는지 마지막에는 다리까지 절고 난리도 아니었다 들었다.”
이야기를 듣던 체드란도 궁금해졌는지 공작에게 물었다.
“저는 황후와 살라만 부인의 사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혹시 예전 일에 대해 좀 아십니까.”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은 공작은 잠시 예전을 생각하는 듯 테이블로 시선을 두었다.
황후와 살라만 부인이 젊었을 적, 한참 사교계 활동을 할 때 공작 또한 나엘라의 어머니와 수도에서 연애 중이었으니 소문이야 자자하게 들었었다.
“황후가 독을 품은 계기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시작은 살라만 부인이었지요.”
마호세르디 공작부인은 그 당시 사교계의 유명인사 중 하나여서 듣기 싫은 이야기들도 많이 들었다.
황후를 꽤 안타까워했었는데 지금은 그 감정만 아까웠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동정하지 말라고 만류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고난 속에서 악독한 선택을 하진 않으니 말이다.
“황후는 누가 보아도 미인이었으니 살라만 부인이 많은 시샘을 했다고 합니다. 파티에서 황후의 드레스가 찢어져 속치마까지 다 보인 적이 있었는데, 그것조차 살라만 부인의 짓이었다더군요.”
결혼 전 황후는 높은 곳에 올라가고자 바랐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신분 상승을 하여 복수하고자 함이 눈에 보였더란다.
그 독한 모습에 피할 만도 한데 미모에 눈이 먼 남자들이 그녀와 한 번쯤 자 보고자 달려들었다.
의미 없는 잠자리, 의미 없는 사랑의 속삭임이란 것을 왜 몰랐을까.
황후는 그런 방법밖에 모르는 것처럼 피폐해져 갔고, 살라만 부인은 안쓰러워하며 걱정 많은 언니인 척 흉내 냈다고 한다. 겉으로는 다정한 언니인 척, 한없이 자애로운 척, 속으론 황후를 비웃으며 말이다.
그리고 둘 사이가 변하게 된 것은 황제가 황후에게 손을 내밀면서부터였다.
악질적이다, 그 말 말고 황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뻔히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황후의 사정을 이용한 것이다. 다루기 쉬운 사람일 것 같아서, 그녀의 욕망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용하려 함을 알면서도 황제의 손을 잡았으니 그녀는 점점 망가져 갔다.
바보처럼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기에, 상황을 한순간에 바꿔 주었기에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황제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황후도 한때는 한 명의 여성처럼 보였다고 하니까.
복수하고자 했던 살라만 부인은 도망치듯 결혼해 타국으로 갔고 황후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악에 받친 황후는 임신을 했고, 악행은 시작되었다.
“황후에게 아픈 사정이 있다고 편드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고난 속에서 나쁜 선택을 하지는 않으니까.”
“편을 들어주기엔 너무 많은 악행을 저질렀죠.”
결코 그녀의 편을 들고자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분노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페트론 황자가 죽고 한풀 꺾였다곤 하지만 그 성격이 어디 가겠습니까. 속으로 삭이며 이를 갈았을 테니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겁니다.”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나엘라는 황후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수를 말했다.
“황후가 황제를 죽이고자 움직이겠군요.”
“황제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테니 말이다.”
수면 위로 제 사람들을 드러낸 것은 곧 황제와 전면전을 택한 것과 같았다.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황제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체드란의 질문에 공작은 수십 년간 보았던 황제를 떠올렸다.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냥 둘 겁니다.”
“이유는요?”
비록 체드란이 황가 사람이었다고 한들 황제를 자주 만난 건 아니다. 공작이 더 오랜 시간 황제를 겪었고, 첫째 아들인 단제는 황제의 칼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공작의 판단이 더 정확할 것이다.
“황후가 귀족들을 끌어모아 전면으로 나서면 당연히 황태자와 황태자를 따르는 귀족들도 뭉치겠지요. 하지만 황태자는 힘이 없으니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겠습니까.”
“황후를 보고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의 수족들도 황태자와 손을 잡을 테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귀족들도 둘로 나뉘게 될 테고, 서로 물어뜯기 시작하겠지요.”
“황제도 황후가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 겁니다.”
“그러니 당분간 황태자에게 힘을 실어 줄 겁니다. 제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도 묵인할 테고요. 서로 싸우다 어느 쪽이 손해를 보든 황제는 방관하겠지요.”
“그것 또한 황제가 힘이 있어야 서로 물어뜯도록 내버려 둘 수 있지 않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황제의 힘이 뭐라고 보십니까?”
잠시 턱을 문지르던 체드란은 공작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이 황제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은 뻔했다.
“마호세르디 공작가죠.”
“황제 직속 기사단, 황제의 세력,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마호세르디 가문이겠죠.”
체드란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황제는 과연 가장 날카로운 칼, 마호세르디를 완전히 믿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믿을 수 없는 칼인 마호세르디를 어떻게 믿고 황제가 가만히 있을까.
이유가 두 가지로 좁혀졌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마호세르디 외에 다른 믿을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
다른 하나로는 마호세르디가 저를 베지 못하리라 확신하는 태도다. 그렇다면…….
“이미 마호세르디에 무언가를 했군요.”
생각과 동시에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도 놀라 체드란은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마호세르디의 정보 통제. 이유를 알 수 없어 속을 태우던 나엘라. 지금 자신이 생각한 것을 나엘라가 과연 계산하지 못했을까.
체드란의 시선 속 나엘라는 침착하기만 했다. 이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린 것을 알자 나엘라는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제게 감출 만큼 정보 통제가 이루어졌다면 황제 아니면 황후겠죠. 그리 보실 것 없습니다.”
담담한 말에 체드란은 멋쩍게 웃었다. 공작은 평생 키운 자식이라선지 조금 더 태연한 모습이었다.
“황후가 전면에 나서기도 전에 그녀가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가문의 일임에도 공작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마호세르디의 정보 통제가 일어난 시기와 황후가 전면으로 나선 시기가 맞지 않았다. 황제는 그녀가 움직일 것까지 계산하여 미리 마호세르디를 단속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아마 마호세르디 외의 또 다른 패가 있을 겁니다. 다만 마호세르디가 무너지거나 적대하지 않는 이상 드러내지 않겠죠.”
“숨길 수 있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나엘라의 맞장구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숨겨진 패를 알아내야 합니다.”
체드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
쉬이 듣기 힘든 나엘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작에게로 향했다.
“황후의 숨겨진 패는 알아보지 않으시나요?”
황후가 무엇을 믿고 그리 구는지, 그것에 관해 공작은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나엘라의 날카로운 보라색 눈과 노장의 깊은 시선이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