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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62)화 (62/220)

61화

“그리고…….”

나엘라는 검은색 머리를 길게 쓸어 넘겼다.

“황제의 숨겨진 패는 어떻게, 누가 알아볼 건가요?”

날카로운 어조에도 공작은 침착하기만 했다. 나엘라의 태도는 늘 숨김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아는 아이였으니 은연중에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그렇기에 나엘라에겐 숨기지 않아 왔건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곧 알게 될 것이다.”

“이겨 내라고요? 그게 대체 무엇이길래요?”

“조만간일 것이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묻지 말거라.”

“혹시 황제의 숨겨진 패, 그것을 알아보는 이가 단제 오라버니입니까.”

황제의 측근이자, 가장 오래 붙어 있는 이가 누구일까. 마호세르디에선 두 명밖에 없었다.

“아니면 프리야의 어머니입니까.”

나엘라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자신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쓰이고 있음을, 목숨을 걸고 움직이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스스로 원한 것들이다.”

“아버지!”

나엘라의 날카로운 외침에 공작은 쾅, 식탁을 내리쳤다.

“대공 전하의 앞이다, 나엘라. 그리고 밖에서 다른 이들이 들을 수도 있지 않느냐.”

체드란의 앞인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참을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 너무 많은 이들이 스러졌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황제에게 소중한 것들을 잃었는지 뻔히 알면서 그럴 수가 있을까.

나엘라의 날카롭던 어조는 어느새 애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황제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는 너는? 너 또한 황제를 건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저는 다릅니다.”

“다른 목숨도 있다더냐? 한 명, 한 명의 목숨이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네 목숨은 헐값처럼 여기니 큰일이구나.”

“저는 자신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자신이 없다더냐? 그렇게 못 미더운 자들이냐.”

나엘라의 말문이 막히자 공작은 쐐기를 박았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만…… 나는 너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것은 나엘라가 대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오랜 시간 황제의 옆에 있으며 공작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 왔던가. 젊은 시절, 전쟁터를 누비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잃었던가.

시간의 양만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수이리라.

하지만 나엘라는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저는 그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엘라.”

“지킬 겁니다. 그러려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때론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나엘라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공작의 말은 나엘라의 신념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았다.

때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니, 누굴 포기하고 누굴 살린단 말인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진 나엘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두고 보세요.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마호세르디도, 노헤스카도 누구 하나 잃지 않을 테니.”

자리에서 일어난 나엘라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뒤돌아 식당을 나갔다. 보는 눈이 많아 표정은 풀었지만 냉랭한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소리 없는 분노는 식당 문이 내는 요란한 소리로 변모했다.

나엘라의 발소리가 멀어져 가자 공작은 힘이 빠지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꼿꼿하던 허리를 조금 숙이며 의자에 등을 기댄 그때 체드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때까지 부녀의 언쟁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드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허허, 가능한 선에서 대답하겠습니다.”

공작은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프리야라는 이름의 주인이 혹 나엘라의 전속 하녀입니까?”

“맞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공작은 뻑뻑해진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황제궁의 시녀장입니다.”

체드란은 다나한의 말을 떠올렸다.

“지안은 자신의 부모를 직접 죽였고, 프리야는 아버지를 죽여 주기로 약속받았죠.”

체드란이 알기론 프리야는 수도에 올라오지 않고 대공령에 남기로 했었다.

“그럼 그녀의 아버지는요?”

공작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프리야가 어머니를 닮아 갈색 눈인 것이 천만다행이지요. 머리는 염색할 수 있지만, 눈은 아니니까요.”

체드란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욕심도 많고 의심도 많은 양반이 무슨 속셈으로 자식을 여럿 두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또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죽여 달라 했던 그녀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황제가 거치적거리는 자식을 살려 두려 했을 리가 없다. 수도를 떠나기까지 수도 없는 위협을 받았겠지. 그렇게 남몰래 죽인 자식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체드란의 질문에 공작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대공 전하, 나엘라와 말투가 아주 비슷해지셨습니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소리에 체드란이 의아해하자 공작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나엘라와 말투가 비슷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것 같진 않았는데 공작은 무언가 느낀 모양이었다.

“말씀하시지요.”

“황후가 감춘 패, 왜 알아보지 않으십니까?”

“나엘라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것을 어찌 말씀드리겠습니까?”

“조만간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엘라가 알게 되는 순간, 그 옆에 누가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수도에서 나엘라와 체드란이 함께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혹여 사정상 떨어져 행동하더라도 돌아올 곳은 같다. 나엘라가 몸을 뉘일 곳은 결국 노헤스카 저택이다.

그러니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공작이 감출 만큼 큰일이라면 자신이 나엘라의 위로가 돼야 할 테니.

잠시 고민하던 공작은 체드란의 말이 옳다 여겼는지 입을 열었다.

“제가 때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는 말을 왜 했는지 아십니까.”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조언이라기엔 나엘라가 진심으로 공작에게 실망한 모습을 보였으니 평소 같지 않은 태도라는 걸 눈치챘다.

수도는 위험한 곳이니 만큼 조바심에 그리 말했다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엘라는 곧 포기해야 할 겁니다.”

“어떤 것을 말입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것 중 하나를요.”

체드란의 눈도, 공작의 눈도 점차 깊어지고 있었다.

*

제게 온 전언에 제니는 고민에 휩싸였다. 마호세르디 공작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으면 공작은 늘 제니나 다른 이들을 불러다 나엘라의 일상을 묻곤 했다. 나엘라가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는 성격이 아니니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만남이었다.

평소였으면 공작을 만나 나엘라가 대공저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일들을 벌였는지 신나게 말했을 테지만 문제는 지금 제 주인의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식사 후 돌아온 나엘라는 소파에 앉아 손잡이만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가린은 쉬는 중이고, 나엘라의 곁에 지안이 있긴 하지만 자리를 비울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생각보다 고민이 깊었던 건지 체드란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던 제니는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께서 부르시는데 자리를 비우기가 힘들어서 말입니다.”

체드란도 하녀들을 불러 이야기나 들어야겠다는 공작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워도 된다.”

그 말을 들은 제니는 고개를 한 번 더 숙이고는 총총걸음을 옮겼다.

체드란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엘라는 응접실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발소리가 달라서였는지 금세 체드란임을 알아챈 나엘라가 입을 열었다.

“지안, 잠시 나가 있어.”

어지간히 심란한지 나엘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잠시 걱정스런 눈초리를 보낸 지안은 나엘라에게 고개를 숙이며 보이지도 않을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체드란에게는 잘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내곤 방을 빠져나갔다.

“아버지께 무슨 말을 들으셨습니까?”

아직 소파에 앉지도 않았는데 바로 본론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 당연하게 구는 통에 체드란은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나엘라의 손바닥 안이었던가. 자신의 행동 패턴이 그리 단순했나 헛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조만간 알게 될 걸세.”

번쩍 뜨인 나엘라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뿜어졌다. 저러다 보라색 빛이라도 뿜어지는 것은 아닌지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던 체드란은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진짜로 항복은 아니었다.

“함구하기로 약속했네.”

“아버지보다 저를 더 오래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평생 괴롭히겠다는 협박인가?

체드란은 아무렇지 않게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나를 좀 봐주지 않겠나.”

“봐줄 만한 행동을 해야 봐 드리죠. 제가 괜히 체드란을 두고 왔겠습니까.”

이런, 신음이 절로 나올 것 같았다. 혼자 화가 나서 뛰쳐나갔는 줄 알았더니 체드란에게 정보를 빼 오라는 의미였나 보다.

자신이 나엘라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 확실해진 체드란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정말 말해 주기 어렵겠군.”

계속 쏘아붙일 줄 알았던 그녀는 오히려 침착한 눈빛으로 체드란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입을 열게 할 줄 알았더니 되레 탐색하는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참 예측이 안 되는 여자였다.

“그때 했던 말의 대답,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체드란이 절 사랑하는지 안 사랑하는지요.”

“하하하─!”

체드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말해 주지 않으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닌가.

진지한 대답이 아니라 농담으로 하는 말임을 알기에 웃을 수 있었다.

“농담 같습니까?”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논리에는 오류가 있지.”

“뭐가요?”

“대답해 주지 않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똑같이 대답을 회피한 공작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 게 되지 않나?”

“그럼 뭐, 사랑하기 때문에 말해 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그렇다면 체드란이 절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그게 왜 그렇게 되나?”

“아버지가 절 사랑하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다면 체드란도 같은 이유로 답하지 않는 걸 테니까요?”

“희한한 논법이군.”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더더욱 입을 열 것 같지 않자 나엘라는 괜히 시비를 걸듯 따져 왔다. 그것이 마치 투정부리는 것처럼 느껴져 체드란은 기분 좋게 웃었다.

“나는 그대에게 말해 주려 들은 것이 아니네.”

“역시 들은 것이 맞군요.”

아무래도 나엘라에게 놀아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걸까. 체드란은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그대의 위로가 되고자 들은 것이네.”

마치 무슨 소리냐는 듯 뚱하니 바라보던 나엘라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그 모습이 언뜻 어린아이 같아서 체드란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만족스러워졌다. 나엘라의 새삼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았다.

“망할.”

갑작스러운 욕설에 체드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엘라는 시선만 슬쩍 그에게로 돌렸다.

“내가 정말 큰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다는 거군요.”

입술을 꾹 닫은 채 연신 불만스러운 얼굴을 해대는 나엘라를 보며 체드란은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일이 얼마나 큰일이 될 것인지.

체드란은 속으로 조용히 그녀를 응원했다. 머지않아 큰일을 맞닥뜨리게 될 나엘라가 안쓰러우면서도, 그녀가 잘 이겨 내기를 바랐다.

그녀가 늘 그랬던 것처럼 강한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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