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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63)화 (63/220)

Chapter 8. 그리운 이들

62화

사피오는 천천히 숨을 죽였다.

이곳은 대공저의 담벼락 앞, 자신은 뜻밖의 도주극을 벌이는 중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자신은 몇 번의 걸쳐 휴가 신청을 내었다. 그날은 꼭 쉬어야 하니 하루만 비워 달라 그리 사정했건만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이렇게 악랄한 인간들이 다 있나!

대공령의 전반적인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을 끝냈다. 대공 부부가 수도로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본 서류로도 충분했다. 반은 호기심 삼아, 반은 일하는 티를 내려고 했던 건데 금세 익숙해진 것이다.

제 탈출이 요원해진 건 거기서부터였다. 시작은 행정을 담당하던 이부터다. 그는 자신만큼 산수에 능한 이를 처음 봤다며 내내 사피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행정관만 자신을 괴롭혔으면 말도 하지 않는다. 가장 악랄한 사람 중에 독보적인 집착을 보이는 이는 따로 있었다.

바로 마든 집사장이었다. 분명 예전에 기사였다고 그에게 직접 들었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기사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대공비 전하께 잘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다며 문득문득 갑자기 나타나거나 화장실까지 따라온다. 정말 신경 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자신이 낸 휴가서도 바빠서 안 된다며 번번이 거절하기 일쑤였다.

도대체 자신은 언제 쉬라는 말인가. 일주일에 두 번은 휴일을 보장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정말 빠져나가야 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주군께 정기 보고를 드리는 날이었다.

주군과의 독대는 늘 떨리는 법이지만 힘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문과의 허약 체질인 자신이 담을 넘으려 하는 것이다.

“어디다 숨겼더라…….”

수풀 속에 잘 숨겨 놨던 나무 상자들을 모아 사피오는 담벼락 앞에 차곡차곡 쌓았다. 아쉽게도 다른 무예인들처럼 훌쩍 뛰어올라 담을 넘는 일은 무리였다.

돌아오면 악랄한 마든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잠깐 일하는 일터가 중요하랴, 평생 일할 직장이 더 중요하지.

상자들을 밟고 오른 사피오가 낑낑대며 담 위에 올라탔을 때였다. 갑자기 수풀 속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얼어붙은 채 고개를 돌리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회색 머리카락이 살며시 보였다.

“허, 거 참.”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으나 상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피오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사피오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라 저절로 고개가 떨어졌다.

“하도 휴가를 달라 하기에 다녀오라 말하려 했는데 마침 나가는 중이었군.”

어차피 줄 거였으면 빨리 말해 줬어야지!

목구멍까지 욕이 차올랐지만 어쩌겠는가. 대공 부부가 없는 동안 저택의 총 책임자는 마든이나 마찬가지였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사피오는 애써 억지웃음을 지었다.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 뭐…… 굳이 담을 넘을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잘 다녀오게.”

사피오는 욕이 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아하니 분명 자신이 담을 넘을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내버려 둔 것이다.

나이도 얼마 차이 안 날 것 같은데 확 들이받아?

온갖 대거리가 올라왔지만 대공이 아끼는 이라 하니 꾸역꾸역 참아 내었다.

스물셋에 비명횡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올 때는 대문으로 들어오게.”

끝까지 얄미운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려 걸어 나가는 마든이 보였다. 사피오는 담벼락에서 떨어지듯 쿵─ 소리를 내며 간신히 착지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마든의 욕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사피오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시내로 향했다. 아까 담벼락에서 잘못 떨어진 것인지 허리가 욱신거렸다.

대공저에 들어가면 또 온종일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할 텐데 이리 허리가 아프니 큰일이었다.

허리 치료를 위해 병가를 낼 수 있을까. 나올 때 보았던 마든을 생각하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사피오는 마차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가장 큰 중앙 시내까지 나가면 도시를 오가는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힘겨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데 누군가 사피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사피오는 또 마든일까 의심하며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모르는 이였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보통은 친절한 편이라는데 대체 자신에겐 왜 그리 대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뭡니까?”

“사피오 님이십니까?”

평민인 자신에게 ‘님’이라고 존칭할 이들은 상단 사람들밖에 없었다. 직접 관리하는 이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자는 처음 보는 자였다. 노헤스카나 남부 쪽 상단 사람들은 대부분 다 외우고 있는데?

“누구십니까?”

바로 날카로워지는 사피오를 보며 남자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코더 님께서 찾으십니다.”

본단 소속이라는 말에 사피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코더는 우부라 자작가의 차남이었다. 톨레로 상단의 본 상단이 있는 곳이자 상단주라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도 근처 중부에 있는 코더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분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코더의 이름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본단 소속인 것 같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슬쩍 떠보듯 물으며 사피오는 그의 표정을 날카롭게 살폈다.

“주군의 말씀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단번에 사피오의 표정이 풀렸다. 납치하려거나 꾀어내려는 자는 아닌 듯했다. 코더 우부라가 진짜 상단주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내부 상황을 아는 자다.

게다가 상단주를 주군이라 표현하는 이는 최측근들밖에 없었다.

“가죠.”

남자의 안내를 따라 사피오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절뚝거리며 걷는 것을 보았는지 남자의 걸음도 느려졌다.

다행히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시내에서도 사람이 가장 많고 북적이는 고급 브런치 가게였다.

모습을 잘 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코더 우부라 님이 이렇게 트인 곳으로 날 불러 냈다고?

사피오의 눈동자가 금세 가라앉았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예감한 것이다.

남자를 따라 가게의 2층으로 향했다. 올라선 곳에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브런치 가게라서 그런지 아침 시간임에도 북적였다.

그중 가장 환하고 눈에 잘 띄는 창가 자리에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르고 침착한 눈매 속에 굳건한 심지를 담은 남자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코더 님.”

사피오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밖을 바라보던 코더가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군. 앉게나.”

안내를 도와준 남자는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모른 척 주위를 경계했다. 사피오는 한 번 더 주변을 쓱 훑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때가 되었나 봅니다. 코더 님께서 나선 것을 보니.”

이제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나서겠다는 태도를 드러낸 것과 같았다.

“주군께서 상단을 수도로 진출시키겠다 하셨네.”

그 말은 곧 상단 아래에 숨겨진 암흑 조직도 수도에서 활동시키겠다는 말과 같았다. 드디어 오랜 시간 염원하던 때가 된 것이다.

“곧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수도에 바람이 불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준비는 다 되었네.”

코더의 눈이 번뜩였다. 그 모습을 보며 사피오는 휴가를 걱정할 게 아니라 사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마든의 모습도 볼 필요가 없을 테니 마지막으로 한마디 쏴붙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식으로 굴면 어떤 여자도 못 만날 거라는 악담을 꼭 해 주리라.

“자네는 제외일세.”

사피오의 다짐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예?”

어벙한 그의 모습에도 코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주군께서 직접 연락을 주실 것이네.”

사피오를 이곳에 남기려는 것 자체가 주군의 뜻이란 말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어떤 것들을 해낼 수 있는지 말해야 아는 것일까. 그간 사업을 확장한 것으로 능력은 충분히 증명했다.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

혹시 자신이 노헤스카 대공저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런가?

그것은 자신의 자의가 아니었다!

“코더 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있으면 분명……!”

“사피오.”

코더의 단호한 눈빛이 사피오의 입을 막았다.

“그대에게 노헤스카의 첩자들이 붙었다는 걸 알고 있나?”

사피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첩자들이 붙었다니, 대체 왜? 설마 무언가 들킨 것일까? 아니, 그나저나 노헤스카의 첩자라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수도에서 일을 해 줘야 할 때가 따로 있을 것이다.”

“왜 지금이 아닙니까?”

“그대를 지금 공개할 수는 없으니까.”

사피오는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졌다. 자신은 이미 상단주의 대리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코더가 전면으로 나서는 것보다 저가 나서야 더 잃을 것이 없을 텐데? 왜 이런 결정이 내려졌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놓고 만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노헤스카에 있는 것이 알려진다고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혼란에 빠진 사피오의 태도에도 코더는 한결같았다.

“주군을 믿고 조금만 기다리게.”

사피오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코더가 이리 말하는데 토를 다는 것은 주군에 대한 반발과 같았다. 그저 쓸모를 다할 순간이 있겠거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혼란과 침울함으로 사피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주군의 뜻이 있을 테니.”

제 어깨를 다독이는 코더의 손길을 느끼며 사피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직 사람들을 수도에 머물게 할 방법은 찾으셨습니까?”

비록 이곳에 있게 되었다고 해도 상단을 팽개칠 순 없었다. 조직 중에서도 필요한 이들만 보내려면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정보에 능한 이들은 기본일 테고 무력이 될 만한 이들도 추려야겠지. 가장 중요한 군사는 비밀리에 움직여 만일에 대비해 우부라 자작령에서 계속 머무를 것이다.

“그대가 대공비 전하와 톨레로 상단의 연을 만들어 주었으니 황제 측과는 쉽게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쪽도 접촉해야겠지.”

돈이 되는 것은 범죄와 연관이 깊다. 정보 또한 마찬가지인 법. 사람의 추악한 면을 파면 정보의 양은 배가 된다.

“겉으로는 황제에게, 밑으로는 예정대로 황후 쪽과 접촉하시겠군요.”

“그게 애당초 계획이지 않았나. 이미 거래를 하고 있고 말이야.”

사피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톨레로 상단 휘하 범죄 조직은 암살 같은 범법 행위도 의뢰받는다.

거기다 현재 황후 쪽에 다량의 현금이 움직이고 있으니 접촉을 해 두는 것이 유리했다.

“주군께서는 그에 대해 뭐라고 하십니까?”

“뭐, 우스갯소리로 그러시더군. 돈이 되는 곳과 손 꼭 붙잡고 있으라고 말이야.”

그래야 돈 좀 만지지 않겠는가, 코더의 웃음기 가득한 말에 사피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의 돈, 그것이 문제였다.

사피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간 정리한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상단이 수도에 진출하는 날, 자신의 손으로 하나씩 이뤄 갈 목표였지만 당분간은 요원해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주군께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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