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수도에 와서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체드란은 집무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덕분에 방 안에서만 뒹굴거리던 나엘라는 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실행했다.
“여기 있습니다.”
나엘라의 앞에 선 이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방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어떤 이는 침까지 꿀꺽 삼켰다.
“미리 얘기했지만, 이 일은 무조건 극비로 다뤄야 할 것이다.”
보라색 눈이 매섭게 변하자 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넙죽 엎드렸다.
“당연합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한번 소문이 들어오면 나가질 못한다고 해서 이야기 지옥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남자의 간곡한 말에도 나엘라는 의심의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소문이 못 나가서 이야기 지옥이 아니라, 말이 너무 많아서 이야기 지옥일 것 같은 남자였다.
“당연히 나를 만난 것 또한 비밀로 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죠! 저는 대공비 전하의 털끝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 대공비 전하라면 소문으로는 들은 적 있군요!”
남자는 처세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인지 심장이라도 걸겠다며 연신 호소했다. 그 덕에 기분이 조금 풀린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상자를 열어 보아라.”
전광석화로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전문가의 면모를 뽐내듯 주머니에서 흰색 면장갑을 꺼냈다. 그가 경건한 자세로 임하자 주변에 서 있던 이들도 눈을 반짝이며 시선을 집중했다.
“이제 열겠습니다.”
상자는 검은색 벨벳 위에 황금으로 조각된 장미가 부착되어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잠금을 풀기 시작했다.
“이 상자로 말할 것 같으면 저희 살롱에서 개발된 오중 잠금장치로서─.”
“그냥 열라.”
“옙.”
온갖 잠금을 푸는 속도에 맞춰 달칵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남자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상자의 뚜껑이 서서히 열리며 찬란한 황금빛이 사방을 밝히기 시작했다.
“여기, 요청하신 물건입니다.”
상자 안에는 황금으로 만든 골드 체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골드 체인은 커브형 샤이니 네잎 커팅 체인이라고 하여, 저희 장인들의 신기술이 모두 집약된 작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부심 가득한 남자의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골드 체인은 새로우면서도 고급스러움을 물씬 풍겼다.
먼저 체인은 굴곡진 형태를 가졌는데 각각의 고리마다 세세한 커팅이 들어가 있어 빛이 제각각 반사되었다.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 고리들을 다중으로 연결돼 체인을 만드니 어디서도 보지 못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남자분들은 망토 줄로, 여성분들은 목걸이로 사용하기에 좋습니다. 장담컨대 이 체인이 공개되는 순간 그 파티의 주인공이 되실 겁니다.”
너무 화려한 감이 있지만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체드란이 착용한다면 어떻겠는가?”
“대공 전하께서요?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체격이 크시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 금발이시니 옷을 단색으로 입으시면 딱일 겁니다.”
“단색?”
“예, 색이 너무 많으면 과하니까요. 체격이 좋으시다면 검은색 예복이 좋겠군요. 검은색 예복에 검은색 망토를 하시고 이 체인을 사용하신다면 차림새를 부각하기에 아주 좋을 겁니다. 망토 줄로 사용하실 생각이시라면 체인이 얇은 편이니 두 줄로 엮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디자인이나 색 조합 같은 것을 잘 모르는 나엘라는 지안과 제니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쁘지 않은지 두 사람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에 나엘라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상자에서 시선을 떼었다.
“비용은 넉넉하게 치러 주거라. 작품이 괜찮으니 그 값을 쳐줘야지.”
남자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초롱초롱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너무 과한 인사에 나엘라는 대충 손을 저어 말리고는 다시 상자를 바라보았다. 감각 없는 나엘라의 눈에도 퍽 만족스러운 것이 체드란의 선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번에 노헤스카에서 첩자들을 빌려준 일로 선물을 하고자 했던 것이 이리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이미 목걸이도 받았으니 보답이라기엔 늦은 감도 있었다.
“그런데 대공비 전하…… 혹시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꽤 흡족한 상태라 나엘라는 흔쾌히 허락했다.
“말하게.”
“이건 대공 전하의 선물인데 왜 극비로 하라는 말씀이신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을 질문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된 나엘라가 툭 뱉었다.
“부끄러우니까.”
“예……?”
당연한 것이 아닌가?
누가 부끄럽게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서 선물을 하나. 극비리에 진행해 쓱 건네면 그 뒤는 당사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지.
당당한 나엘라의 표정에 저것이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맞는지 남자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만 나가 보게.”
더 이야기하기 귀찮다는 듯 축객령이 떨어지자 남자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섰다.
남자가 나가자 나엘라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상자를 바라보았다. 왠지 체드란이 꽤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이들의 조언을 구해 제작한 선물이지만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체드란이 언제쯤 끝나는지 확인해 봐. 이곳으로 오라고도 전하고.”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 집무실에서 나올 때가 되었다. 재빠르게 확인하고 온 지안이 말했다.
“곧 오신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는 차분히 상자를 닫았다. 뚜껑을 닫았을 뿐인데 잠금장치들이 탁, 달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잠겼다. 자동이라니, 장인들이 꽤 공들였다는 생각에 더 만족스러워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체드란이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던 체드란은 방 안에 대기 중인 라르바 집사장과 하녀들을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엘라의 전속 하녀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자리를 잡고 있어 놀란 것이다.
“아, 이야기가 끝나면 체드란과 식당으로 갈 테니 그곳에 식사 준비를 해 놓게.”
다들 선물을 구경하러 온 것이지만 마치 식사 의사를 물으러 왔던 척, 눈치 빠르게 한 명씩 사라졌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체드란은 나엘라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식당이 아니라 방으로 오라더니 할 말이 있었나 보군.”
저녁 식사 때 말해도 좋을 것을 굳이 방으로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뭐, 이런저런 할 말이 있습니다.”
나엘라가 평상시와 다르게 다정한 말을 건네자 체드란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이유 없이 다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체드란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모든 이들이 자리를 비운 터라 이 사태에 대해 조언을 구할 자가 없었다.
혹시나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나 살피니 테이블에 놓인 상자만 눈에 띄었다. 황금색 장미꽃이 부착된 상자는 누가 봐도 보석함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나엘라가 장신구를 구매한 모양이었다.
설마 저것을 알아봐 주길 바랐나? 나엘라가 그런 섬세한 성격은 아닐 텐데. 혹시 모르는 일이니 살짝 운을 떼었다.
“목걸이를 샀나 보군.”
나엘라가 옅게 미소 지은 그대로 살짝 굳자 얼른 덧붙였다.
“귀걸이인가? 어떤 장신구도 잘 어울릴 걸세.”
점점 입꼬리가 내려가며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반지인가?”
나엘라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가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럼 역시 브로치군.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네.”
상자의 크기상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옷이나 신발이 들어갈 크기로는 보이지 않으니 자신이 모르는 액세서리가 나오지 않은 이상 브로치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닙니다.”
“그럼 뭔가?”
모를 때는 물어보는 게 답이다. 나엘라는 무언가 원하는 대답이 있어 보였지만 자신이 독심술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니 어찌 알까.
“선물입니다.”
“설마 내 선물인가?”
왜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인상을 쓴 채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체드란은 되레 어이가 없어졌다.
“그게 내 선물인지 어떻게 아나?”
“전 당연히 체드란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자가 그대의 앞에 있다는 건 아는가? 선물이라면 내 앞으로 밀어 주고 나서 그런 말을 하게.”
“아……!”
무엇을 깜박했는지 깨달은 나엘라는 얼른 체드란의 앞으로 상자를 밀었다.
설마 긴장이라도 했던 걸까. 주지도 않고 좋아하지 않았다고 뭐라 하다니.
요즘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선물입니다.”
제대로 선물을 전달하자 체드란이 상자를 들어 올렸다.
“갑작스럽긴 하군.”
상자 뚜껑을 열려다 잠금장치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체드란은 이리저리 확인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잠금장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안에 대체 뭐가 들었길래 보안을 이렇게 철저히 해 놨단 말인가. 보안 좋아하는 마호세르디 공작 영애의 성격이 나왔나?
“그런데 나엘라.”
“얼른 열어 보시지요.”
“이거 어떻게 여는지 아나?”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대충 열면…….”
“잠금장치가 다섯 개는 있는 것 같은데?”
나엘라는 결국 밖에 서 있던 다른 이들을 불러와야 했다.
제니가 들어와 잠금장치를 열고는 뚜껑을 여는 것만 남기고 체드란에게 넘겼다.
“열어 보시지요.”
체드란이 천천히 상자를 열자 안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줄이 나왔다. 그 정체를 한참 고민하던 체드란은 일단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잘 쓰겠네.”
체드란이 체인을 몇 번 훑어보고는 상자를 내려놓자 나엘라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설마 그게 끝입니까?”
“뭘 말인가?”
“할 말이 그게 끝이냐고요.”
번뜩이는 눈동자에 체드란은 등 뒤로 땀이 흐를 것 같았다.
“음…… 목에 걸면 아주 예쁠 것 같군.”
“체드란이 목걸이를 한다고요?”
“그럼, 팔에 걸면 아주…….”
“팔찌요?”
“그럼 대체 무슨 용도란 말인가?”
“망토 줄로 쓰시라 드린 겁니다.”
그제야 반짝이는 줄의 용도를 깨달은 체드란은 다시 상자 안을 보았다. 보면 볼수록 망토 줄로 쓰기엔 조금 얇지 않은가 싶다가도, 그런 투덜거림을 내뱉었다간 오늘 방에서 자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체드란은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표현을 잘 못하네.”
“이제부터 노력하시면 되겠네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만…….”
체드란은 괜히 상자 안의 줄을 검지로 만져 보았다.
이런 말이 늘 낯선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선물을 받아 본 경험 자체도 몇 없었다.
아, 생각해 보면 파르로시가 매번 선물을 보내긴 했었다. 죄다 거절했으니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대가 주는 첫 선물이니 잘 쓰겠네. 그리고…….”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다른 말은 잘 못해도 적어도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이걸 쓸 때마다 그대를 떠올리겠네.”
잠시 눈을 깜박이던 나엘라의 얼굴에 곧이어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엄청 비싼 겁니다. 마호세르디에서 지낼 때 모은 돈으로 산 거예요.”
체드란은 작게 웃음이 터졌다.
“부잣집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부자지 제가 부자인 건 아닙니다.”
하하─!
체드란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