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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67)화 (67/220)

66화

왜 황궁은 가장 화려해야 하는가.

체드란은 그런 의미 없는 생각들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어린 시절을 불행으로 물들여 놨던 황궁은 그 겉모습만큼은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웅장했다. 황제가 거처하는 중앙 본궁은 그중에서도 당연히 제일이었다.

하필 황태자의 집무실도 본궁에 있는 터라 체드란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있을 본궁으로 향해야 했다.

다행한 점이라면 데테로아의 집무실로 가는 내내 황제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군사경계 지역을 지키는 노헤스카의 가주로 한 번쯤 불러볼 만도 한데 일언반구 없는 것이 또 황제다웠다. 이를 비정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 체드란으로서는 마주 보기 껄끄러운 상대니 얼굴은 늦게 볼수록 좋았다. 황제를 한 번 보고 오면 정신이 몹시 피곤해지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황태자 집무실 앞에 도착한 체드란은 앞에 서 있던 시종에게 자신의 방문을 알리라 명했다.

“전하,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께서 오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작위가 낮은 이를 높여 부르지 않는 것이 법도이기에 ‘전하’라는 호칭은 생략되었다.

“들어오라 하게.”

곧이어 문이 열리고 데테로아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식품 하나 없이 깔끔한 방 안이 보였다.

데테로아의 손짓에 따라 체드란은 집무실 안 소파에 앉았다. 다과와 차를 차린 시종이 나가고 후 데테로아가 집무실 책상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떤 첩자가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 모르는데 데테로아는 존대를 사용하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살이 좀 빠졌군.”

“그렇습니까?”

데테로아는 얼굴을 한 번 쓸어 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체드란과 같은 백금발과 푸른 눈동자,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둘이었다.

같은 색을 갖고 태어난 것이 둘뿐이라서 그럴까. 데테로아가 훨씬 유한 인상이고 호리호리한 몸이라는 것만 뺀다면 누가 봐도 둘은 형제였다.

“형님은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런가?”

데테로아처럼 얼굴을 한 번 쓸어 본 체드란이 옅게 웃었다. 문득 스치고 지나간 이가 있어서 그랬다.

“걱정거리가 줄었다고 해야 할지, 늘었다고 해야 할지.”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면 나엘라 덕분에 조금 줄었다. 믿을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이리도 클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나엘라가 보통 대단한 사람이던가. 혼자 일당백은 할 터였다.

물론 걱정이 늘어난 이유도 나엘라 때문이니 아이러니했다.

“이래서 다들 결혼을 추천하는 모양입니다.”

능청맞게 말하는 데테로아를 보며 체드란은 어이없단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곧 죽어도 자신의 아내는 어머니처럼 만들지 않겠다며 황태자비를 들이지 않은 게 누구였나. 인제 와서 저런 말이다.

어떻게든 약점을 만들지 않으려는 마음은 알지만, 황태자가 이 나이에 약혼자조차 없는 것이 말이 되던가.

외척이 생길까 염려해 황제가 압박하지 않는 것이 그저 다행이었다.

“결혼이 나쁜 것만은 아니더군.”

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데테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지금 들은 것이 체드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형님이 그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막상 결혼식 날까지는 마호세르디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구셨잖습니까. 생활해 보니 생각이 바뀌셨나 봅니다.”

“뭐…… 지금도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많이 변했나 싶어 체드란은 멋쩍게 웃었다.

“나빠 보이지 않네요. 어쨌든 이리 오랜만에 형님도 보고, 좋습니다. 지엘라 누님도 계셨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요.”

“그렇군.”

지엘라의 모습이 체드란의 뇌리를 스쳤다.

문득 지엘라와 나엘라가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지엘라와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이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럼 자연스럽게 나엘라와도 접촉이 있지 않았을까?

지엘라도 보통이 아닌데 둘이 괜찮은 사이였을까 싶은 염려가 들었다. 나중에 나엘라를 만나면 물어봐야지 생각하며 체드란은 데테로아를 만난 본래 목적을 꺼냈다.

“황후에게 붙은 귀족들은 좀 어떻던가?”

“뭐…… 신났죠. 이제야 자신들의 세상이 올지 모른다는 헛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황제에게 꽉 잡혀 살았으니.”

“황후가 매우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더욱 그럴 테지.”

“덕분에 저는 좋죠. 이렇게 대놓고 형님도 만나고 말입니다.”

“잊지 마. 우리는 오늘, 갑자기 움직인 황후에 대비해 만난 거야. 잠깐의 화합이다.”

“사이 안 좋은 저희가 정치적인 이유로 손잡은 것처럼 연기해야 하는 뭐, 그런 상황인 거죠?”

“갑자기 피곤해지는군.”

괜히 말을 길게 늘이는 것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어 기분이 좋기는 체드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 길 때도 많았는데 유독 마음이 들떴다. 이 연극도 곧 끝나리라는 생각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왜 피곤하십니까? 설마 형수님 때문에요?”

“나엘라 때문이라니?”

의아해하는 체드란을 보며 데테로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밤마다 형수님께서 막……!”

“그만!”

체드란은 못 들을 것을 들어 버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엘라를 상대로 음담패설이라니, 그녀에게 들킨다면 황가의 핏줄이 모두 사라질지도 몰랐다. 어쩌면 테사 제국이 아니라 마호세르디 제국으로 이름이 바뀔지도.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기분에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털어 내면 생각도 털어질 것처럼 체드란은 진저리 쳤다.

“대체 형수님이 어떠시길래 그렇게 난리를 치십니까?”

“절대 나엘라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마.”

“결혼식 때는 조금 차가워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입니까?”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네 짐작과 매우 다를 것이다.”

“들어도 모르겠군요.”

“나중에 직접 보면 알겠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체드란이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웃던 데테로아는 아까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황후는 반란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체드란도 충분히 예상했던 바라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반란군의 본거지겠군.”

“분명 군사들을 키우고 있을 겁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손을 잡은 지금, 귀족들의 사병을 다 합쳐도 어려울 테니까요.”

“황후는 동부와 북부 귀족들과 손을 잡았다.”

“북부는 알고 있었지만…… 동부도 잡을 줄은 몰랐습니다. 루부스 후작도 얼마 전 동조한 것 같더군요. 그래도 해군과 육군의 차이는 있지 않겠습니까?”

“루부스 후작은 우리 쪽 사람이다.”

“첩자입니까?”

“정확힌 베르에티 후작 영애가 나엘라와 손을 잡았다는 말이 맞겠군.”

“형수님과요?”

속사정이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더 물어볼까 하던 데테로아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함께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황후의 밑으로 젊은 신진 귀족들도 많이 모이고 있습니다. 황실과 크게 거래하는 북부의 세레노피 백작가가 황후 밑으로 들어갔죠.”

“거기도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네. 세레노피 백작 부인이 나엘라의 친구네.”

“거기도요? 형수님은…… 굉장히 발이 넓으시네요.”

발이 넓다고?

체드란은 차마 나엘라의 친구는 둘밖에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나엘라가 어떤 성격인지는 직접 보면 될 테니 사소한 오해들은 그냥 두는 것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유의해야 하는 귀족들의 이름이 나왔다. 거기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누던 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침묵했다.

“우리가 준비한 것들은?”

문득 생각난 것을 묻자 데테로아는 얼마 전 받았던 보고서를 떠올렸다.

“유능한 이들을 뽑아 놨으니 어련히 잘하겠습니까. 저도 잘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러 번 검토해야 한다.”

“형님, 저 이제 형님 없이 아무것도 못 하던 막냇동생 아닙니다.”

“파르로시가 막내 아니었나?”

“파르로시는 제 형제가 아닙니다.”

어릴 적 데테로아는 순하기 그지없어 파르로시에게 무시당하고 페트론에게는 직접 얻어맞기까지 했었다.

지켜 줄 어머니도 없고 외가도 없어 버텨야 했던 데테로아가 얼마나 눈에 밟혔는지 모른다.

결국, 지엘라와 체드란이 뒤에서 한참을 도와줬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데테로아도 이 지독한 곳에서 참 오래도 버텼다.

“잘 자라 줘서 고맙다는 말은 네가 들어야 했는데.”

“예? 그런 말을 들으셨습니까?”

나엘라를 감당하지 못해 벅차하고 당황한 채로 자신에게 달려오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데테로아의 반응이 예상되었다.

“그리고 네가 막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프리야라고 한 명 더 있다. 생김새를 보면 너보다 어릴 것이다.”

“하, 황제가 정말 미쳤군요. 숨겨진 아들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황제가 숨겨 둔 것은 아닐 거다. 제 아비를 죽여 달라 했다더군.”

자식들이 하나같이 황제가가 죽기를 바라니 그게 참 아이러니였다.

“누구한테요?”

“나엘라에게.”

“형수님께요?”

“수도에서 도망친 프리야를 마호세르디에서 숨겨 준 모양이다.”

데테로아는 미간을 좁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도 안 왔다. 그렇게 따지면 저는 살려 줬으니 황제에게 감사하다 해야 할까.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제 아비를 죽여 달라 말했을 정도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뻔하네요. 어머니가 누구길래요?”

“황제의 시녀장.”

“미친, 그녀는 가문도 괜찮지 않습니까?”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짐작은 간다. 우리 꼴을 본 시녀장이 일부러 말을 안 한 듯싶다. 몸이 아프단 핑계로 몇 달 휴가를 내고 비밀리에 키웠겠지. 우연히 알게 된 황제가 인제 와서 황녀로 입적시키긴 귀찮으니 제거하려 했을 테고.”

“정말…… 여러 사람에게 사람 같지 않은 짓을 했네요.”

데테로아는 치를 떨었다. 그리 많은 이들에게 못 할 짓을 해 놓고도 모자란지 황제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알고 싶지도 않지만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익숙하다 여겼거늘 늘 새삼스러운 것이 놀랍구나.”

그들에겐 이미 익숙한 참극이지 않나. 체드란은 매번 상처받는 데테로아의 여린 심성을 걱정했다.

“형님…….”

황제의 이야기로 피곤해진 듯 눈가를 문지르는 데테로아는 많이 지쳐 보였다.

지금 나눈 이야기로 인해 지친 것이 아니라 황실이,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개미 보듯 하는 황제와 황후에게 지쳤겠지.

“이번 일이 끝나면 말입니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진 데테로아는 너무 멀어서 흐릿하기만 한 미래를 생각했다. 코 앞인 줄 알았는데 하나하나 짚어 보다 보니 가야 할 길이 한참 멀게 느껴졌다.

“이번 일이 끝나면 수도로 올라오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지엘라 누님도 모셔 오고요.”

데테로아는 단둘뿐인 형제들을 떠올렸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버티게 해 준 사람들이었다.

“나엘라와 지엘라의 사이가 어떨지 모르겠군.”

“좋을 겁니다. 예전에 지엘라 누님에게 들은 적 있습니다. 공작 영애가 무척 귀엽다고요.”

“귀엽다고?”

나엘라를 귀여워했다고?

지엘라의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은 알았지만 나엘라를 그리 볼 정도인지는 몰랐다.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둘만의 이야기가 있는 걸까. 둘 사이가 정말 좋을 수도.

“그런데 나엘라가 수도를 안 좋아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과연 나엘라 성격에 답답한 수도에서 살 수 있을까?

체드란도 수도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 혼자 이 삭막한 황궁에 있으란 말입니까?”

“결혼해.”

데테로아가 괜히 울상을 짓자 체드란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막냇동생의 어리광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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