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황태자 알현을 끝낸 후 체드란이 황궁을 나섰을 땐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나 있었다.
웬만하면 나엘라와 저녁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나간 김에 처리할 일이 많아 어쩔 수가 없었다.
저택에 도착한 체드란이 방 안에 없는 나엘라를 찾자 라르바는 정원에 있음을 알렸다.
수도 저택에 있는 정원이 마음에 들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함께할 겸 체드란도 정원으로 나섰다.
밤하늘은 깊고 어두운데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어 연못과 꽃들이 제 존재를 뽐내는 중이었다. 그 앞에 연한 보랏빛이 감도는 가벼운 원피스 위에 숄 하나만 걸친 나엘라가 서 있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체드란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엘라가 돌아보았다.
나엘라의 표정이 오늘따라 부드러웠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휘어진 눈매만으로도 그녀의 인상이 확 바뀌었다. 아직 찬 기운이 섞인 바람에 따라 검은 머리가 조금씩 휘날렸다.
그 모습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색다른지.
체드란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었다.
“오늘 새삼 알았군.”
“무엇을요?”
“그대가 아름답다는 것을.”
체드란의 입에서 칭찬이 나왔음에도 나엘라는 부끄럽다는 기색이 없었다. 되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달빛이 색다르고 분위기가 이리 낯선데 저 반응이라니. 나엘라는 나엘라였다.
“그대는 본인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군. 혹시 그 아름다움이 성격에 의해 자주 가려진다는 것도 알고 있나?”
체드란은 지금 자신의 농담이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었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처럼 가벼운 어조와 어투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속내는 사뭇 복잡했다. 평상시와 다른 그녀의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아니면 평상시와 다른 자신의 감정에 휩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달빛처럼 빛나는 그녀의 얼굴과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도톰한 입술을 두 눈에 오롯이 담았다.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체드란의 머릿속에 오래 담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겨 있는 곳이 그저 기억 속인지, 아니면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자신의 가슴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체드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엘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눈매를 휘었다.
“그 성격 덕에 많은 이들이 그저 아름다운 영애가 아니라 뒤를 맡길 전우, 믿고 따를 주인, 등을 보며 따라갈 상관으로 봤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체드란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뜨렸다. 조용하던 연못에 웃음소리가 가득 울렸다.
아무래도 말로 나엘라를 이길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틀린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넘치니 도저히 평범한 여인처럼 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멋있으니 내 기사단이 나보다 그대를 더 좋아하는군.”
수도로 올라가던 날, 자신에겐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없던 기사들이 나엘라에게는 우르르 몰려가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 냈다.
나엘라를 어려워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주 충성심이 넘쳐흘렀다.
“노헤스카 기사들은 이미 제 기사들입니다.”
체드란이 자꾸만 장난치는 티를 내자 나엘라도 유쾌하게 넘겼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호의를 보낸다 한들 노헤스카의 기사들은 체드란과 오랜 기간 생사를 함께해 온 이들이었다.
그런 유대감에 자신이 어떻게 끼어들까.
“눈 뜨고 기사단을 뺏겼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군. 이래서야 그대의 말 중 틀린 것이 하나 없음을 증명한 셈 아닌가.”
“무슨 말 말입니까?”
“사랑에 빠진 남자는 분별력을 잃는다는 말 말일세.”
어쩌면 예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엘라가 대공령을 휘젓고 다니며 기사단과 저택을 갈아엎어도 그리 화가 나지 않았던 그때부터.
“그때 했던 말을 아직도 생각 중이십니까?”
커다란 오해를 한 탓에 아무렇게나 뱉었던 말들이 나엘라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체드란의 탓도 있었다. 부정을 안 해 계속 오해하게끔 만들었지 않은가.
탓할 생각은 없지만, 괜스레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것도 많지 않았나. 예를 들면…… 후계를 낳아야 한다는 것?”
대체 언제까지 놀릴 셈인지. 체드란의 장난은 끝없이 나왔다. 원래 이렇게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나?
나엘라도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 기억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하시면 낳아야죠.”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그대를 닮았으면 좋겠군.”
“아이라…….”
아이라는 말에 나엘라는 잠시 옛날 기억들을 떠올렸다.
어머니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배 속의 아이가 누구를 닮았으면 좋겠는지, 어떻게 컸으면 좋겠는지 같은 바람들 말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살아계셨다면 얼마든 물어봤을 텐데. 무척 아쉬워졌다.
“저희 어머니는 제 눈앞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나엘라가 연못 너머 어두운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이미 다나한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체드란은 잠자코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암살자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저를 지키려고 하셨던 것이 생생합니다. 제 생에 처음으로 본 피가 어머니의 것이었습니다.”
일곱 살의 나엘라.
어머니를 잃고 말을 하지 않았던 나엘라.
죽고자 했던 나엘라.
체드란의 눈앞에 작고 어린 나엘라가 서 있는 듯했다.
“그래서 늘 궁금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포기한 걸까. 저는 절대 못 할 것 같았거든요.”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다. 나엘라가 죽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책이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과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까?
어머니는 비록 검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분이셨지만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모를 수 없었다.
나엘라를 보호하느라 어머니는 바로 도망치지 못하고 발이 묶이셨다.
나엘라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마호세르디와 어울리지 않게 어머니는 너무 연약한지라 일곱 살의 아이를 안아 들 수가 없어서, 본인이 혼자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과감히 포기해 버려서.
당시 나엘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냥 알 것 같았다. 제 존재로 인해 어머니가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놓쳤음을, 어머니가 피했다면 자신은 무조건 죽었음을.
그래서 죽음을 택했다.
스스로에게 벌을 주려고.
“답은 찾았던가.”
달을 응시하던 눈을 돌려 체드란을 바라보았다.
흑발이라 어둠 속에선 잘 보이지 않는 저완 달리 체드란은 마치 혼자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의 환한 백금발도, 맑은 날의 바다 같은 푸른 눈도, 나엘라에겐 낯선 것들이었다.
아, 머리카락이 너무 밝아서 검은 옷들만 입나?
피를 많이 보는 지역인지라 검은 옷을 입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엘라는 괜히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지킬 것이 많아지니 알 것 같았습니다. 목숨을 내어 주는 의미를 말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됐나 보군.”
“소중한 이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는 것이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년 만에 나엘라가 입을 열었던 날,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보다 소중한 존재들을 만들어 주겠다고.
아직 어머니보다 소중한 이는 없었다. 어머니만큼 소중한 이들만 있을 뿐.
그래도 소중한 이들이 많아지니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다행이군.”
갑작스러운 말에 나엘라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나는 그대보다 강하니 그대가 대신 목숨을 걸 일은 없을 것이다.”
보라색 눈동자가 천천히 깜박이자 체드란은 정말 진지하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만약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전에 이미 그대가 죽었겠지.”
“아…… 그것도 그렇네요?”
뜬금없는 말이지만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체드란 대신 목숨을 거는 것과 체드란보다 약해서 먼저 죽는 것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이 체드란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 아닌가?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테니 그대는 내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진지한 체드란의 말을 들으며 나엘라는 납득했다. 목숨을 내어 주는 것보단 약해서 먼저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체드란이 강한 만큼 적어도 위험한 상황은 줄어들 테니까.
“그건 마음에 드네요. 만약 아이가 태어난다면 체드란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내 아이도 나보다 강하길 바라요.”
이왕 강할 거면 아이도 자신보다 강했으면 좋겠다. 아이가 먼저 죽길 바라지 않으니까.
이제야 어머니가 완전히 이해되었다.
“나는 반대일세.”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겠군. 대련하자고 달려드는 이가 그대 하나만이 아닐 테니.”
“무슨…….”
나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아이가 강한 것을 좋아하진 못할망정 대련이나 걱정하고 있다니.
“오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는가.”
체드란이 장난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아무래도 그대가 모르는 것 같아서 만나자마자 말해 주려 했는데, 깜박 잊었군.”
“무엇을요?”
“그대의 어머니가 혼인 전,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인 중 하나였다더군. 다른 하나는 황후였고.”
“예?”
“차갑고 도도하기로 유명해서 공작도 세 번이나 차였다고 하던데?”
“아버지가요?”
나엘라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 따뜻하고 다정한 어머니가 차갑고 도도하기로 유명했다고? 아버지가 세 번이나 차였다고?
“차이고 울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맙소사.”
나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 마호세르디 공작이, 그 아버지가 차이다니. 냉정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부끄러웠다. 물론 자신에게 하는 걸 보면 어머니에게 차이고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오늘따라 체드란의 미소가 왜 이리 장난스러운지 모르겠다.
“도이네 백작 부인, 그러니까 줄리 부인 말이네.”
“줄리 부인도 유명했답니까?”
“유명하긴 했지. 다섯 명을 한 번에 만났다고 하니.”
“예에?”
나엘라는 부모님의 얘기보다 이 소문이 더 놀라웠다.
줄리 부인이 보통은 아니다 싶긴 했지만 내심 예상했던 것보다 정도를 상회했다. 대단하다는 말도 그녀에게는 부족했다.
대체 도이네 백작과는 어떻게 결혼한 것일까. 그녀의 말을 들어 보면 사랑 없이 결혼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다섯 명을 만난 것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까.”
“줄리 부인이 그대 어머니의 단짝 친구였다더군.”
나엘라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마호세르디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 전까지 갓난아기인 그대를 보러 자주 놀러 갔었다더군.”
그제야 아버지와 허물없어 보이던 줄리 부인의 말들이 떠올랐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아서 생각도 못 했다.
지금이라도 찾아가 물어볼까. 답을 얻는다고 해결될 것은 없겠지만, 그냥 묻고 싶었다.
어머니의 친구니까 알지 않을까. 어머니가 그날 나엘라 대신 죽어 가며 후회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아버지에겐 도저히 꺼낼 수 없었던 온갖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눈두덩이가 서서히 뜨거워지고 눈썹이 팔랑였다. 어느새 다가온 체드란이 가만가만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이 따뜻해서 나엘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