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체드란은 평소보다 분주한 소리에 눈을 떴다. 가만히 누워 귀를 기울이니 나엘라의 단장 소리가 들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왜 소란을 피우는지 알기에 체드란은 그저 웃었다.
어젯밤, 나엘라와 저녁 산책을 끝내고 실내로 들어가자 라르바가 다가와 서신을 건넸다. 하일모라와 베르에티가 점심 이후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본 나엘라의 표정이 한순간에 환해져 체드란이 라르바의 눈치를 살필 지경이었다.
나엘라가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속내를 들킬 뻔했다. 라르바조차 믿을 수 없는 이곳에서 격한 감정 표현을 할 정도로 서신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나엘라는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얼마나 들떠 있는 걸까.
처음 보는 모습에 체드란은 일어난 것을 티 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나엘라의 하녀들이 제 시중까지 들고 있다. 그들이 알게 되는 순간 그녀를 단장하기에 일손이 부족해질 것이다.
“체드란이 준 목걸이를 할게. 이것도 보여 줘야겠어.”
“집 안에서 하기엔 과하지 않을까요?”
“뭐, 다른 이들이 보기엔 적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기를 누르려 힘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요.”
도란도란 들려오는 말소리가 낯설었다. 평소엔 제가 먼저 일어나기에 들을 일이 없는 것들이었다.
“남편이 준 선물 자랑은 원래 하일모라가 하던 일인데 이번엔 내가 하겠네.”
“하일모라 님이라면 목걸이를 네 개씩 하고 오실지도 몰라요.”
“받은 순서대로? 진짜 그럴까 봐 무섭네.”
가만히 듣던 체드란은 문득 깨달았다. 하녀들과 나엘라가 주고받는 대화는 그 어느 날보다 평화롭고 잔잔했다.
자신의 삶에 이렇게 평화로운 순간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저 낯설던 것이 이제는 반가워졌다. 누군가의 감정에 동화되는 것임에도 오히려 기꺼웠다.
“어? 일어나셨네요?”
대화 소리가 너무 커 혹시나 수면에 방해가 됐을까 체드란의 방을 살펴보던 나엘라는 깜짝 놀랐다.
더 자는 척도 더 못 하게 된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바라보던 나엘라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가 까치집이 됐어요.”
머리를 만져 보던 체드란은 황당해졌다. 평상시에는 뻗치지도 않던 머리가 오늘따라 뻗쳐 있다니.
하필 이런 날, 어이가 없었다.
“제니, 체드란의 시중 좀 들어 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숫물과 수건이 침대 옆 협탁에 놓였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 재빠른 속도였다,
“직접 하지.”
수건을 받아 들어 간단히 세수를 마친 체드란은 머리에도 물을 묻혀 정돈했다.
“거기 아닌데.”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내내 지켜보던 나엘라가 다가왔다. 직접 머리에 물을 묻혀 빗질까지 해 주려 하기에 체드란은 어색함을 못 이기고 몸을 조금씩 비틀었다.
“가만히 좀 있어요.”
한소리 하고 나서야 나엘라는 본격적으로 정리해 주었다. 역시나 빗질을 얼마 안 해 본 건지 솜씨가 어색하기만 했다.
점점 한쪽으로 쏠리는 머리카락에 당황한 나엘라가 제니를 바라보았다. 체드란의 눈치를 살살 보던 제니는 눈빛으로 방향을 슬쩍 안내해 주었다.
훤히 보이는 장면에 괜찮은 거냐고 한마디 물으려던 체드란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했다간 아침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만 같았다.
“머리 내린 체드란은 좀 어려 보이네요.”
나엘라도 어색했는지 괜한 소리를 덧붙였다.
머리를 내리고 있는 것뿐이니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체드란은 괜히 앞머리를 만져 보았다.
“자꾸 만지니까 다시 망가지잖아요.”
어설프게 빗질을 해 봤자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얘기해 줄까.
그래도 닿는 손길이 나쁘지 않아 체드란은 묵묵히 있었다.
“자, 끝이에요.”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머리는 나름 단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아침을 먹을 건가?”
머리 때문에 신경 쓰지 못했지만 인제 보니 나엘라의 복장은 아침 식사 차림이라기엔 과했다.
어디 만찬 장소라도 데리고 가서 음식을 대접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요즘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하늘하늘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나엘라는 이미 머리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반 묶음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묶어 고정한 머리는 따여 있었다. 중간중간 진주까지 장식해 놓아 방 안에서 먹는 아침 식사가 초라해질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드레스는 갈아입으려고요.”
“식사 한번 하고 나면 그 소매는 더 못 쓰겠군.”
길게 늘어져 치렁치렁한 소매는 조금이라도 손을 뻗는 순간 수프에 담길 것 같았다.
“체드란이 준 목걸이랑 어울리려면 이 드레스는 좀 그렇죠?”
자신이 준 목걸이는 보석이 가득 달린 목걸이였다. 대체 그 목걸이를 하려면 어떤 드레스를 입어야 하며, 그 드레스를 입고 아침 식사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약속은 점심 이후로 알고 있는데, 아침은 편히 먹지 그러나. 이왕이면 점심도 편히 먹고.”
“그 목걸이를 돋보이게 하려면 머리는 묶는 편이 낫겠죠? 다른 장신구는 하지 않으려고요.”
“내 말이 안 들리나?”
“드레스는 흰색이나 검은색으로 하는 게 낫겠죠?”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나?”
“자, 아침 먹으러 가죠. 체드란이 일어나자마자 지안이 아침을 차리기 시작했답니다.”
체드란을 잡아끈 나엘라는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옷도 안 갈아입었네.”
“식사 자리에 옷이 뭐가 중요한가요.”
“그대의 옷차림이나 보고 얘기하지.”
“식사 자리에 제 옷차림이 뭐가 중요하죠?”
말이 안 통한다. 더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싶어진 체드란은 얌전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방을 나오니 어느새 식탁 가득 차려 놓은 음식들이 보였다. 체드란도, 나엘라도 먹성이 좋은 탓에 아침이라고 간소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름진 음식들은 제외한, 해산물 위주의 식탁이었다. 나엘라가 해산물을 꽤 잘 먹기에 양은 많지만 말이다.
“어제 품질 좋은 게가 들어왔다고 라르바가 좋아하더니…… 수프도 게살 수프네요.”
“찜과 샐러드에도 게살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좋네요.”
적당한 것이 없다는 의미였지만, 나엘라가 좋아하니 더 따지진 않았다.
식단이 이렇게 짜인 데에는 나엘라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들어간 듯했다. 아니면 주방장이 이 저택에서 가장 잘 보여야 하는 상대를 눈치챘거나.
“혹시 게 못 먹어요?”
“잘 먹네.”
“다행이에요. 전 많이 좋아해요.”
나엘라가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자 체드란도 따라 쥐었다. 수프부터 한입 떠먹어 보니 무척 맛이 좋았다. 수프 맛만으로도 주방장의 영혼이 담긴 것이 느껴졌다.
나엘라는 입에 딱 맞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해산물은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게를 좋아하나 보군.”
“다 잘 먹어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네요?”
“포도도 좋아하지.”
“어떻게 알았어요?”
“포도 두 상자를 이틀 만에 다 먹었다고 하던데. 바닷가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달고 짭짜름한 그 포도.”
“마든이 말했군요. 다들 원래 그 정도로 먹지 않나요?”
“마든이 다음 포도가 나올 때는 마차 세 대 분량으로 시키겠다고 하던데.”
“그렇게 먹으면 누구든 질립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두 상자만 먹어도 질리네.”
“나약하군요.”
수프를 떠먹던 체드란은 웃음이 터져 얼른 입을 가렸다. 하마터면 먹던 수프를 뱉을 뻔했다.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모든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웃음을 삼킨 그가 다시 음식에 손을 대려다 결국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 뻔뻔함에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아침 안 먹을 거예요?”
자꾸만 웃어 대는 체드란에게 나엘라는 샐쭉 눈을 흘겼다. 아무래도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서 저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군.”
“뭐가요?”
“이 일상이.”
나엘라와 함께 방을 쓰며 함께 먹는 아침이.
다가올 미래는 뒤로한 채 진솔하게 웃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나엘라가 오고 변해 버린 자신의 일상이.
“대공령으로 돌아가도 방을 같이 쓰면 좋겠군.”
나엘라는 잠시 놀라 수저를 들고 멈췄다.
체드란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을까.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식사를 이어 나가는 모습에 나엘라도 식사에 집중했다.
고개 숙인 얼굴을 조금 붉힌 채로.
*
나엘라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거렸다. 하일모라와 잡은 약속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심 식사 이후에 방문한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2시쯤 도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티 타임에 방문한다고 하면 오전 11시, 또는 오후 4시라 볼 수 있지만 서신에는 그런 말이 없었으니 2시가 맞을 터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때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들어왔다. 방문을 노크한 라르바가 손님들을 저택 응접실에 모셨음을 알렸다.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는 침착하게 옷을 정돈했다. 체드란의 추천대로 딱 붙고 넥 라인이 깊게 파인 흰색 드레스에 목걸이를 착용했다.
이리저리 살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나엘라가 걸음을 옮겼다.
“이곳입니다.”
응접실까지 안내한 라르바가 문을 두드렸다.
“대공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천천히 방문이 열리고,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황색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연두색의 드레스를 입은 베르에티,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리고 머리카락 색과 같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하일모라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엘라도 그들과 같은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소파 상석에 앉았다.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와 차와 쿠키들을 놓고 한쪽 벽에 대기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엘라는 잠시 잊었던 귀족 간의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네, 세레노피 부인. 루부스 영애는 저번 파티 때 본 것 같은데.”
나엘라의 인사에 하일모라와 베르에티도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대공비 전하.”
“그때는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만나서 영광입니다, 대공비 전하.”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는 떨리는 손을 감추고 조심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다른 이들을 물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낱 후작 영애가 대공비에게 청하기엔 되바라진 표정과 말투였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나엘라는 누구나 볼 수 있게 피식 웃었다.
“모두 나가 있게.”
“대공비 전하.”
예의에 어긋난 것이 보이는데 사람을 물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라르바가 한 걸음 나서며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나엘라는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손님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하는군.”
차갑고 단호한 그 말에 라르바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모든 이들이 응접실을 나가고 문이 탁, 닫혔다. 문 앞에 인기척이 잠잠해지자 응접실 안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하일모라.”
“나엘라.”
둘은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마주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듯 감정이 흘러넘쳤다.
“정말 보고 싶었어.”
하일모라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나엘라를 끌어안았다.
“베르에티 영애에게 보고 싶단 말을 전해 달라 했다던 네 말을 들었을 때 한마디 해 주려 했어. 그런 것쯤은 나도 말 안 해도 안다고. 그런데 결국 내가 하네.”
작게 웃는 하일모라에게 안긴 채 나엘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그곳에 녹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