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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70)화 (70/220)

69화

“일단 너에게 해 줄 말이 많아.”

하일모라가 다시 자리에 앉자 나엘라는 천천히 얘기하라는 듯 찻잔을 밀어 주었다.

“황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알지?”

두 사람이 황후의 속셈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노헤스카 저택의 방문 이야기가 나왔던 이후였다.

그날 파티가 끝나고, 은밀한 접촉이 있었다. 어느 시종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니 휴게실에 앉아 있는 황후가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황후 마마.”

“부탁할 것이 있네. 노헤스카 저택에 가게 되면…….”

그날의 이야기를 떠올리던 하일모라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후는 널 노리고 있어.”

무슨 이야기인지 계속 말하라는 듯 나엘라의 시선이 하일모라에게 향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생각을 가다듬은 하일모라는 말을 이었다.

“너도 예상했을 테지만, 황후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동시에 잡고자 해. 두 가문이 움직이지 못해야 황제의 전력이 확 줄 테니까.”

“두 가문을 잡는 데 날 이용하겠다?”

“마호세르디의 아끼는 막내딸이자 노헤스카의 사랑받는 대공비니까. 심지어 네 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결혼한 후임에도 공작님께서 황실에까지 강력히 주장하고 나서셨잖아. 대공 전하께서 너에게 목맨다는 소문은 말할 것도 없고.”

나엘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너만 잡으면 둘 다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왠지 익숙한 수법인데.”

“황제와 똑같은 수법이지.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더니 그런 것만 배웠나 봐.”

그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이 있을까. 황후가 가장 증오하는 황제를 닮아 간다니. 나엘라는 찻잔을 들어 차향을 음미했다.

“대놓고 방문 요청을 했다는 건 황후의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겠네.”

나엘라의 말에 베르에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 님께서 시키신 대로 행동했습니다.”

“내가 봤을 때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어.”

평상시에도 꽤 연습했다며 하일모라가 베르에티의 고생을 말해 주었다.

“황후가 따로 뭐라 언질 준 건 없어?”

“그것 때문에 황후의 생각을 알게 된 거야.”

“뭐라 그랬는데?”

“베르에티의 성격을 이용해 너와 친해질 것.”

몰랐던 이야기인지 베르에티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날 파티 끝나고 황후가 나만 따로 불렀어. 베르에티는 황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너에게 공격적으로 행동할 테니 그를 이용해 너와 친분을 다지라고 했어.”

“베르에티를 말리고, 나를 두둔하는 식으로?”

“응, 우리의 친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지. 마지막에 살아남고 싶다면 눈치껏 잘하라더라. 적어도 베르에티에겐 루부스 후작가가 있지만, 세레노피는 힘들지 않겠냐고.”

“하.”

나엘라는 어이가 없어 절로 비소가 나왔다.

황후는 대놓고 하일모라를 긁은 것이다. 신진 귀족 가문인 세레노피가 가진 힘의 한계를. 동시에 힘없는 귀족의 서러움을 이용하겠다 공표한 것이기도 했다.

그 어이없는 작태에 하일모라가 얼마나 분노했을지 예상이 갔다.

“진짜 그 붉은 머리를 휘어잡고 두 갈래로 찢어 버릴까 하다가 참았어.”

황후만 아니었다면 하일모라는 진짜 행동으로 옮겼을 터다.

“저,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황후와 하일모라 사이에 갑자기 끼어 버린 베르에티만 발을 동동 굴렀다. 제 가문 때문에 하일모라가 무시당했을 줄은 몰랐다.

“베르에티 영애,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 그래도…….”

“진짜인데? 비밀로 해서 그렇지, 까고 보면 내가 더 대단할 수도 있어요? 마호세르디 공작님이 나도 딸처럼 대우하는 거 몰랐죠? 거기다 친구는 대공비라고요?”

하일모라는 당당히 마호세르디도, 노헤스카도 제 편이 되어 줄 거라며 큰소리를 쳤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 데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먼저 쳐부술 생각만 가득한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하일모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호세르디 공작은 그녀를 굉장히 예뻐했다. 다나한의 짝으로 맺어 주고 싶어 했을 만큼.

“아무튼, 황후는 내가 너와 친해지길 바라고 있어.”

“최후의 수단으로 납치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건가?”

“납치? 그럴 수도 있겠네. 진짜 최악의 상황일 때 말이야.”

“어떻게 친해지라고는 안 해?”

“글쎄, 그냥 베르에티 영애가 너한테 막 대할 때마다 편이 되어 주라던데? 그런 세세한 것까지 요구하진 않았어.”

“웃기네.”

“뭐가?”

“남을 이용해서 다정하고 착한 척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거. 그거 살라만 부인이 했던 행동 아니야?”

“그것도 황후에게 말이지.”

“지금은 파르로시 황녀를 이용해서 본인이 하고 있고.”

“황후, 진짜 웃긴 사람이네. 가장 싫어했던 살라만 부인과 황제의 행동을 답습하고 있잖아?”

“그러니 똑같은 사람이지.”

하일모라는 생각만 해도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어떻게 미워하던 사람들을 닮아 갈 수 있나.

잠시 소파에 등을 기댔던 하일모라가 벌떡 자세를 고쳤다.

“아, 그리고…… 매우 잘 있으니까 너나 똑바로 하라고 전해 달래.”

주어가 없는 말에도 나엘라는 단숨에 알아들었다. 저 불경한 어조라니.

지칭은 필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추정하기엔 충분했다.

베르에티가 손뼉을 치며 그간 느꼈던 감상을 꺼냈다.

“저도 그분들을 봤는데 정말 뭐랄까…….”

“개차반이지.”

나엘라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지내리라는 걱정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그분들…… 기사는 맞는 거죠?”

그들의 태도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베르에티가 되물었다.

처음 만나는 이들은 충분히 의구심을 가질 만했다. 전쟁터나 임무 중에 그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를 테니까.

“기사도 있고 아닌 자도 있지.”

시간이 한참 흘렀음에도 여전한 그들의 태도를 떠올리며 하일모라도 작게 웃었다.

“나엘라가 죽으라 그러면 칼을 빼 들고 덤빌걸?”

“진짜요?”

가능성 높은 추정이다. 그들이 나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절대 가만히 있을 성미들이 아니다.

그들이 나엘라의 밑에 있던 이유는 단지 그들의 신념과 나엘라의 신념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그 신념.

“그래도 뭐, 나엘라의 말을 가장 잘 듣긴 해.”

하일모라는 다나한과 그들의 싸움이 정말 장관이었다며 웃었다.

“어쩔 수 없지. 오라버니를 무서워하기엔 너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들이니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엘라 때문에 제 위치가 바닥이라며 절규하던 다나한의 모습이 말이다.

자신이 귀족이나 기사단장으로 보이긴 하냐고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대던지. 처음엔 안쓰러웠으나, 그 감정은 결국 터질 것 같던 고막과 맞바꾸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일모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들은 뭐랄까…… 나엘라에게 반한 사람들의 모임? 하지만 언제든 탈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해하는 베르에티를 보며 나엘라는 웃음을 삼켰다.

“어쨌든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

“네가 시킨 일도 잘하고 있어. 위험 수당 쳐 달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아버지께 청구하라고 해. 난 단장 관뒀으니까.”

“음…… 그들이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건 상상이 안 되는데.”

“조만간 한번 보긴 해야겠네.”

“보는 눈이 너무 많지 않겠어? 아, 한 명은 무슨 범죄 조직에 스카우트 됐다던데?”

“잘 어울려서 오히려 놀랍네.”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뭔데?”

“조만간 황후를 만나러 간대.”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나엘라는 하일모라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스카우트길래 바로 그런 대어를 만나러 가?”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어. 후기 알려 준다고 너한테 딱 기다리래.”

나엘라는 혹시나 밖에 소리가 들릴까 손으로 입을 막고 숨죽였다.

그래도 몸이 들썩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한참을 웃었더니 눈에 물기가 맺힐 지경이었다.

“수도에 대기하면서 귀족들이나 파 보라고 했더니 황후를 만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네.”

“아무튼, 베르에티 영애도 하일모라 너도 정말 고마워.”

“그리고 이건 황후에게 붙은 귀족파의 명단이야. 티 파티에 유독 자주 참석하는 사람들도 적었어.”

하일모라가 드레스를 뒤적거리더니 치마 아래서 종이를 꺼내 전해 주었다.

얼마나 열심히 숨겨 온 것일까. 왜 저런 장소에서 종이가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긴장하게 되더라고. 몸수색하는 것도 아닌데.”

하일모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 꼭 전해 줘야 하는 말들은 끝났고…… 이제 근황이나 얘기하자. 남편은 어때?”

받은 종이를 소중하게 접은 나엘라는 작게 웃었다. 역시 하일모라는 제일 먼저 체드란을 궁금해할 줄 알았다.

“나랑 잘 맞는 것 같아. 성격도 다정하고.”

나엘라의 말에 김이 팍 샌다는 듯 하일모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거 말고.”

“그럼 뭐?”

“밤에 말이야! 밤에!”

순식간에 베르에티도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미안하지만 그건 모르겠네.”

“설마 한 번도……?”

“이때까지 침실도 함께 안 썼어.”

“맙소사! 이 언니가 좋은 교육 좀 해 줘야겠구나?”

진짜 사랑이 뭔지 알려 주겠다며 하일모라가 엄청난 용어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무슨 지식이든 쌓는 것을 좋아하는 나엘라도,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인 베르에티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하일모라와 베르에티를 태운 마차가 막 노헤스카 저택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나엘라와 얼마나 수다를 떨었는지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참 좋은 분위기가 가득해야 할 마차 안은 의외로 차분하고 어두웠다.

“정말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베르에티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하일모라는 자신의 손톱을 잘근거렸다.

둘은, 아니 하일모라는 황후의 티 파티에 나타난 어떤 이를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나엘라를 만나면 당장 전하리라 생각했지만, 오늘 아침 협탁에 놓인 쪽지 때문에 결국 말을 삼켰다.

『나엘라를 만나면 ***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함구해 주길 바란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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