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황실 파티
70화
코더 우부라.
옛날부터 똑똑하다고 이름 높던 형과 다르게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던 이였다.
수학을 좋아하는 형과 달리 그는 밖으로 놀러 다니며 사람을 궁금해했다. 역사학으로 형이 부모님께 칭찬을 받고 있을 때 그는 밖에서 개구리를 잡아 와 어머니를 기겁하게 했다.
물론, 사고를 많이 친다고 해서 코더가 똑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머리를 코더는 공부 대신 다른 쪽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가장 큰 예로 황실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
늘 다정하던 형이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며 많이 변했다는 것.
그래서 그는 형처럼, 황실에 충성하던 우부라 가문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장난기도 많고 사고도 많이 치던 그는 조용히 몸을 낮춘 채 존재감을 지우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뚜벅뚜벅.
코더의 구두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수도 외곽에서도 숲으로 둘러싸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지키고 있는 별장.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철저히 몸수색과 신원확인을 끝내고서야 코더는 문을 지나갈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한 안내인을 따라 어느 방문 앞에 섰다.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마치 그 안에 있는 이가 내뿜은 독기가 허공에 퍼진 기분이었다. 얼마나 음침하고 오싹한지 코더는 절로 어깨를 떨었다.
“뒤에 있는 인원은 데려갈 수 없습니다.”
뒤를 따르던 호위들이 안내인에게 가로막혔으나 코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급박한 상황을 위해 고르고 골라 데려온 인원이지만 함께 들어가겠다며 우길 순 없었다.
안에 있는 이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조심스레 문이 열리자 촛불 몇 개만 켜 놓아 어두운 실내가 보였다. 방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을 뿐인데 코더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오늘 이 만남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얼마 없는 불빛에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걷자 방 끝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어둠 속에 잠긴 한 실루엣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후 마마.”
코더가 씨익 웃으며 앞으로 다가가자, 점점 어둠이 걷히고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다짐해 왔다. 형이나 다른 우부라 가문 사람들처럼 이용당하고 버려지지 않으리라.
황실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은 그걸 이용하리라.
오늘이 제 다짐을 위한 첫 발자국임을 알기에 코더는 거침이 없었다.
테이블 앞에 당도하자 흐릿하던 실루엣이 정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코더는 점점 얼어붙었다.
“황후가 아니라 실망했나?”
이리저리 갈라져 목을 긁어 내는 듯한 낮은 목소리, 여자의 체격과 엄연히 다른 체구가 그곳에 있었다.
“무,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황제 폐하!”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옥죄는 푸른 눈동자와 타고난 지배자임을 증명하는 거만한 자세까지.
체드란의 체격이 누구를 닮았는지 증명하듯 확연히 큰 체구와 주름졌으나 눈빛만은 형형한 얼굴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코더는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 숙인 채 용서를 빌면서도 그는 떨리는 눈동자를 주체하지 못했다.
황제라니, 황후를 만나기로 한 이곳에 왜 황제가 있단 말인가.
“실망이 컸겠군.”
“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황제는 코더에게 일어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무릎 꿇고 있는 그곳이 그의 자리임을 명시하는 듯했다.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코더는 혼란한 기색을 감추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설마 황후와 황제가 손을 잡은 것인가. 아니라면 대체 왜 황제가 여기 있을까.
“황후와 손을 잡은 것은 아니지.”
코더의 생각이 빤히 보인다는 듯 황제의 얼굴에 조소가 걸렸다.
“다만 황후의 편지를 내가 조금 바꾸어 두었네. 그대는 내일 이곳에 다시 오면 돼.”
그 말은 곧 황후의 행동이 모두 황제에게 노출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황후와 나누던 비밀스런 서신을 중간에 가로채였음에도 아무도 몰랐다니.
코더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는 황후와 손을 잡으려 했다. 아직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목적은 단 하나일 것일 뻔했다.
황제를 죽이는 것.
코더는 지금 황후와 반란을 꾸미려다 발각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밖의 호위들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어떤 자인가.
코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목숨을 구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살, 살려 주시옵소서.”
일말의 자비를 구하는 코더를 보며 황제가 혀를 찼다.
“설마 그대를 죽이려 이 귀찮은 걸음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대 따위가 뭐라고.”
생각보다 어리석다며 실망이라는 황제에게 코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 나가려면 코더 본인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황제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필시 필요한 것이 있거나 시킬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황후와 손을 잡은 것은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그렇다면…….
“소인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하여 주십시오.”
코더는 더욱 납작 엎드렸다. 그제야 황제는 만족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나는 말일세.”
황제의 손에 들린 와인병이 기울어지며 보라색 액체가 잔에 쪼르륵 담기기 시작했다.
“개들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을 좋아하지 않네.”
황제가 얘기하는 개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왠지 황후를 말한다는 직감이 코더의 뇌리를 스쳤다.
“내 기른 개도 주기적으로 매타작을 해야 말을 듣는 법이지. 사냥개들의 습성이 그렇네.”
황제는 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넘겼다.
“그런데 집이나 지키라고 들였던 잡종개가 주제도 모르고 이리저리 날뛰니 고민일세.”
코더는 꿀꺽 침을 삼켰다. 잡종개란 단어는 하녀 소생인 황후를 말하는 것이 확실했다.
그래도 제 자식을 낳은 여자에게 잡종개라니.
“자기 위치를 다시 알려 주든, 사냥개들 먹이로 던져 주든 둘 중 결정하려고 했는데…….”
황제는 아무래도 황후의 손발을 자르거나 마호세르디가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려 했었나 보다.
“헌데 주인을 물려고 하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나. 겨우 개 따위가─.”
코더는 떨리는 몸을 갈무리한 채 침착하게 말했다.
“실망치 않으시도록 수행하겠나이다.”
황제가 다시 와인병을 들어 천천히 기울였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와인은 코더의 머리 위로 떨어져 얼굴을 가로질렀다.
와인 중 몇 방울이 눈에 들어가 지독히 따끔거렸다. 하지만 코더는 눈을 감지 못한 채 그저 순종했다.
“이것이 그대의 피 대신 흘렀다고 생각하게.”
“성은에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폐하.”
자비를 내려 목숨을 한 번 살려 줬음을, 황제는 그렇게 경고했다.
“황후에게 반란군을 내어 준다 전하고 그녀가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계획을 세우는지 파악할 정도로 친분을 만들게.”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체격의 그를 올려다보니 독사와 같은 눈이 유난히 번뜩였다.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는 내내 코더는 자리에서 미동 없이 붙박힌 채로 있었다.
발걸음에 맞춰 스르륵 문이 열렸을 때 황제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우리 막내아들 말이네.”
코더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얼어붙어 있었다.
한 편의 촌극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형인 우부라 자작에게 목숨을 한 번 빚졌다지.”
그의 형이 망가지기 시작한 계기이자 코더의 속에 내재된 분노의 근원.
페트론에게 맞아 죽기 직전인 황태자를 한 번 구해 준 일로 형은 다리 하나를 내놓았다. 단지 페트론 황자를 말렸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대는 데테로아를 원망하는가.”
코더의 눈에서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눈빛이 살아났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뱉었다.
“황태자도, 황후도…… 제 손으로 끝장낼 겁니다.”
“이런……. 자식을 더 낳던가 해야겠군.”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천천히 방을 빠져나갔다. 황제와 함께 안내인으로 왔던 남자, 정체 모를 호위병들까지 떠나고서야 코더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식은땀인지 와인 때문인지 옷이 액체로 흥건했으나 코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데려왔던 이들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괜찮으십니까?”
코더는 조금 전의 상황을 되새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황제는 의심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절대 믿을 리 없었다. 당분간 감시받을 것은 뻔했다.
어쩌면 훨씬 그 전부터 말이다.
“황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께 당분간 모든 연락을 하지 않겠다 전하거라.”
코더는 단 몇 분의 만남으로 10년은 흐른 기분이었다. 지금 제 행동 하나가 그동안 준비해 온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노헤스카에 사람을 보내 사피오를 지켜라.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사피오만은 구해야 한다.”
사피오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똑똑한 아이니 상단에서 내보내도 잘 지낼 것이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 온대도 그 아이만은 구할 것이다.
체드란이 국경을 넘었던 사피오를 구해 코더에게 맡긴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자식처럼 키웠던 아이다.
코더가 눈을 감자 옛날 일들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황실로 뛰쳐 가려던 자신을 체드란이 만류했다. 오래 걸리겠지만 꼭 복수해 주겠노라고.
데테로아가 제게 무릎을 꿇고 울었다. 힘이 없어 미안하다고.
어떻게든 그 사람들을 지켜야 했다.
그래야 이 제국에도 희망이 있을 테니.
*
수도에 마련된 톨레로 상단 건물.
그곳으로 복귀한 호위 인원들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어떤 이가 덮치며 목을 눌러 왔다.
“큭.”
남자를 위협하는 이는 상단 호위 인원 중에서도 대장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눈을 가로지른 칼자국이 선명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늘 일을 모두 함구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오랜 기간 호위 대장과 함께해 왔지만, 이 남자만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쉬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크흑.”
남자의 몸이 바닥에 뭉개지며 잡힌 목이 더욱 옥죄어 왔다.
“코더 님이 정신이 없어 말하긴 했지만, 만약 이 일이 새어 나간다면…….”
실력이 출중하여 데리고 갔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코더가 그리 정신없이 중요한 정보들을 말할 줄 몰랐다.
지금이라도 후환을 위해 없앨까 싶었지만, 이자를 보증했던 인물이 믿을 만하기에 참는 것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입을 굳게 다물어야 할 것이다.”
대장은 세차게 손을 풀어 남자의 숨통을 놓아 주었다. 콜록대는 남자를 노려보던 대장은 몸을 휙 돌린 후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한참 기침을 쏟아 내던 남자는 발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침을 닦아 내며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생명의 위협을 당했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거…… 루엔 단장이 들으면 기겁하겠는걸?”
벌써 이런저런 자랑을 할 생각에 남자는 기분 좋다는 듯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