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72)화 (72/220)

71화

황후가 말했던 대로 황실 파티 초대장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대부분이 참석해야 하는 파티라 나엘라나 체드란도 어쩔 수 없었다.

그사이에 나엘라는 공작과 식사도 하고 황제파의 사람들과 안면도 텄다. 대체로 체드란이 교류했지만, 나엘라도 함께 다녔으니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리 기다리던 줄리 부인 또한 수도로 올라왔다. 도이네 백작은 사정상 남부에서 올라올 수가 없기에 그녀의 에스코트는 아들인 백작 영식이 맡게 되었다.

아들의 팔을 잡고 나타난 줄리 부인을 본 나엘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오늘따라 대공비 전하의 눈빛이 이상하네요.”

줄리 부인이 부채를 살랑거리며 웃었지만, 나엘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정말 왜 그럴까?”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는 줄리 부인에게 이끌려 정원으로 향했다.

수도에 있는 마호세르디 저택은 황궁 다음으로 큰 저택이라 했던가. 정원조차 크고 화려해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걷고 있는데 줄리 부인이 먼저 물었다.

“나한테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히 말해요. 이런 성격 아니잖아요.”

“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머? 왜 갑자기 말을 높이고 그러시지?”

줄리 부인이 사르륵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저희 어머니와 친구셨다고…….”

“아, 그거 때문에 그랬구나.”

이제야 나엘라의 태도를 이해한 줄리 부인은 차르륵 탁, 부채를 접었다. 표정을 가릴 때나 사용하던 부채이니 지금은 필요 없었다.

나엘라 앞에서 그 어떤 표정을 가릴까. 누구보다 진심을 바라는 이에게 말이다.

“대공비 전하는 어머니를 많이 안 닮은 거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줄리 부인이 정원의 꽃들을 응시했다. 정원을 가득 채운 꽃들은 오래전 나엘라의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었다. 공작은 그 꽃 외에 어떤 꽃도 심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얘기하죠? 차가워 보이는 외모도,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도 전부 공작님을 닮았다고.”

“네.”

“하지만 내가 봤을 땐, 대공비 전하는 앨라이아를 많이 닮았어요.”

앨라이아는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애초에 ‘나엘라’라는 이름도 어머니의 것에서 따왔다.

“앨라도 엄청 차가운 외모인 건 알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님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잘 모르는 거예요. 공작님은 누가 봐도 한 성격 해 보이고, 앨라는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정도거든요. 적어도 건든다고 물릴 것 같지는 않죠.”

“그래서 제가 어머니를 더 닮았다는 건가요?”

“그럼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격이 닮았죠. 대공비 전하께서도 알죠? 공작님이 사실 엄청 소심하고 겁 많다는 거요.”

“편하게 나엘라라고 불러 주세요. 아버지 성격은 큰 오라버니가 많이 물려받았죠.”

“그럼 무례를 무릅쓰고 나엘라라고 부를게요. 지금은 그저 앨라의 친구니까.”

줄리 부인이 윙크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한없이 따뜻했다.

“단제 경이나 다나한 경에겐 소심한 면이 있는데 나엘라는 어려서부터 전혀 그렇지 않았죠. 대범하고 똑똑했어요.”

제 옛 모습을 떠올리는 나엘라에게 줄리 부인은 앨라와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런 성격이 앨라와 똑같다는 거예요. 솔직히 군사 경계 지역으로 시집보내기엔 앨라가 아까웠어요. 헌데 마호세르디가 워낙 돈이 많으니 편하겠다 싶어서 찬성한 거예요. 무엇보다 공작님이 엄청난 애처가였거든요. 결혼 전에도 예상하긴 했지만 이건 뭐…….”

줄리 부인은 험한 표현을 자제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 얼마나 웃겼는지 나엘라가 봐야 했다며 즐거워했다.

“앨라가 그렇게 사랑에 빠졌을 줄 몰랐어요. 앨라의 가문이 황제파가 아니었다는 건 알죠? 엄청 엄한 가문이었는데, 앨라가 그 반대를 다 뚫어 냈다니까요.”

“어머니의 가문이라면…….”

“지금은 사라졌죠. 앨라가 외동딸이기도 했고, 가주께서 작위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겠다고 선언하셨거든요. 그렇게 병으로 돌아가신 뒤로 가문은 마호세르디에 편입됐어요.”

나엘라도 들은 적이 있던 이야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앨라 때문에 외할아버님께서 몇 번을 쓰러지셨는지 모를 거예요. 가문의 비밀문서를 모두 훔쳐서 마호세르디로 도망친 적도 있어요. 결혼 허락 안 해 주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어찌나 협박하던지.”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엘라도 줄리 부인을 따라 미소 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젊을 적 이야기는 잘 듣지 못했었다. 어머니를 떠올리기만 해도 힘들어하는 아버지 때문에 물어볼 엄두도 못 내었다.

“나엘라 결혼 때 공작님이 쓰러졌었죠? 그대로 돌려받는 거라니까요.”

그 당시 난리가 났다. 왜 갑자기 결혼이냐고, 자신이 뭘 잘못했냐고 나엘라를 붙잡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모른다.

“둘이 그런 사랑을 했어요. 나는 그래서 마호세르디의 아이들이 내 자식처럼 느껴져요. 나엘라도 그랬죠.”

“그래서…… 그때 파티에서도 제 청을 단번에 받아 주신 건가요?”

“당연하죠. 다른 가문의 아이였으면 턱도 없어요.”

유난히 저에게 친절하던 줄리 부인이 떠올랐다. 그저 마호세르디와 인연이 있고 아버지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어머니 때문이었을 줄이야.

“음, 나엘라가 이걸 궁금해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어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연륜일까. 어느새 걸음을 멈춘 줄리 부인이 나엘라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감정이 차올라 나엘라는 줄리 부인과 당당히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잠시 방황하던 두 눈은 바닥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후회하셨을까요?”

“뭘요? 공작님과 결혼한걸요? 아니면 나엘라를 살린걸요?”

“저를 살린 거요.”

줄리 부인은 나엘라 속에 내재된 죄책감을 알아보았다. 그것이 마음 아프고 또 안쓰러웠다.

왜 앨리는 아이를 두고 그리 일찍 떠났을까.

그리 아꼈던 막내 아이가 상처를 안고 사는 걸 보고 있을까.

“만약 지금 앨라가 나엘라의 앞에 있었다면…….”

언제나 당당하고 대범했던 친구를 떠올렸다.

“엄청 화를 냈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냐고. 자신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냐고 말이에요.”

“저를 혼내셨을까요? 어머니는 한 번도 저를 혼내신 적 없는데…….”

“자신에게 화가 났겠죠. 어린아이를 혼자 뒀던 자신에게, 가장 슬픈 기억을 만들어 준 자신에게. 그리고 너무 커 버린 아이가 안쓰러워서.”

“저는…….”

“나엘라는 앨라에게 목숨을 빚진 게 아니에요. 앨라는─.”

줄리 부인도 목이 메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 줘야 할까.

나엘라가 실어증에 걸려 반년이나 말을 하지 못했고, 죽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한참이나 지나 알게 되었기에 나엘라의 곁을 지켜 주지 못한 시간을 후회하기도 했다.

“앨라가 만약 그날 나엘라를 구하지 못했다면…….”

앨라를 닮아 똑똑한 아이, 앨라의 가장 아픈 손가락, 그 아이가 나엘라였다.

“앨라도 나엘라처럼 죽으려고 했을 거예요. 물론 그 전에 전쟁이 일어났겠지만.”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려 줄리 부인은 더 장난스럽게 말했다.

“앨라와 나엘라는 서로 사랑한 거예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깊게요.”

제발 이 말이 나엘라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보듬어 줄 수 있길 바랐다.

“나엘라 또한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앨라와 같은 선택을 하겠죠. 앨라를 많이 닮았으니까. 하지만…….”

줄리 부인이 나엘라의 뺨을 감싸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어진 눈가는 흘러넘치는 감정을 힘주어 참는 듯했다.

“나도 공작님도, 다른 많은 이들도 과거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할 거예요. 나엘라만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은 게 아님을 알아줘요.”

나엘라는 그렇게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 내었다. 아직은…… 아직은 울 때가 아니었다.

복수는 아직도 산재했다. 명심해야 할 건 지키고자 행동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한 놈도 남겨 놓지 않을 겁니다.”

줄리 부인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정말…… 앨라를 많이 닮았다니까.”

미소 짓는 줄리 부인과 달리 나엘라는 웃을 수 없었다. 같은 마음을 갖기엔 자신은 아직 어리고 성숙하지 못했다. 그들에 대한 분노가 내면에 가득 차 있다.

그런 나엘라를 이해한다는 듯 줄리 부인은 긴 검은 머리를 쓸어 주었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님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대신 나엘라가 반가워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그녀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며.

“조만간 지엘라 황녀님께서 돌아오실 거예요.”

나엘라의 눈동자가 빠르게 깜박였다.

“공작님에게 들었어요. 둘이 친했다면서요?”

“저랑…… 지엘라 황녀님이요?”

도대체 아버지는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시냐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게 어딜 봐서 친한 모습이었나. 자신이 지엘라를 불편해하던 모습이 보이지 않았나?

그것보다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지엘라 황녀님께서 타국의 왕족과 결혼하신 건 알고 있죠?”

“알고 있습니다.”

줄리 부인은 황녀님 배우자의 나이가 매우 많았다는 점을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제국의 황녀가 팔려 가듯 시집을 갔으니 어찌 좋은 얘기일까.

“얼마 전에 그 왕족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노쇠하여 병사했다. 그만큼 나이가 많아 오늘내일하던 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요양차 제국으로 돌아온다고 하네요.”

황궁에 지엘라가 돌아온다.

나엘라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체드란과 데테로아, 그리고 지엘라까지 서로 사이가 좋았다고 했나.

마냥 불편해하기엔 지엘라의 사정을 많이 알아 버려 당황스러웠다.

“혹시 지엘라 님과 사이가 안 좋은가요?”

지엘라가 자신을 좋아했던가? 나엘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틈만 나면 마호세르디로 찾아와 자신에게 말을 걸고 다나한 오라버니를 따라다니던 지엘라.

과연 그녀는 자신을 좋아했을까.

“아니요.”

그녀가 가졌던 감정이 뭐였는지, 그녀의 심정에 대해 그땐 이해하지 못했었다. 물론 나엘라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지엘라는 마호세르디를 좋아했다.

“사이좋았습니다.”

들려온 대답에 줄리 부인은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는 그간 봐 왔던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던 지엘라를 떠올렸다.

여전히 그때와 같은지 궁금하고, 아주 조금은 보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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