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황실 파티가 어느새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나엘라와 체드란의 단장을 위해 마지막까지 드레스와 예복을 점검하고 온갖 장신구들의 광을 내느라 하녀들은 정신없이 바빴다. 날이 날이니만큼 어떻게든 그날의 주인공은 대공 부부가 되어야 했다.
그런 하녀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엘라는 한가했다. 그녀의 패션 감각을 아는지라 어떤 이도 나엘라에게 일절 수정 사항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체드란이 준 목걸이를 걸겠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녀들이 척척 준비하는 사이 나엘라는 응접실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물론 나엘라가 느긋하다고 체드란도 느긋한 것은 아니었다.
겨우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체드란이 응접실 소파에서 평온하게 차를 즐기는 나엘라를 고깝게 바라보았다. 자신은 하얗게 질려 겨우 도망쳤는데 누군 티 타임을 챙길 만큼 한가하다니.
당연히 체드란의 말투가 좋게 나가지 않았다.
“그대의 하녀가 내 예복을 세 번째로 고치는 중이라는 걸 아나?”
“어머, 지안이요?”
수도 저택에선 보통 제니가 체드란의 시중을 들었다. 지안보다 성격이 유하단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수선 작업 같은 경우는 달랐다.
좀 더 꼼꼼한 제니가 나엘라의 드레스를 맡아야 해 자연스레 체드란의 예복은 지안이 맡게 되었다.
“그냥 재단사에게 맡기라니까 그러네. 아이들이 좀 예민해요.”
지안의 성격을 잘 알면서도 나엘라는 봐 달라는 듯 연하게 웃었다. 이미 몸도 마음도 지쳐 버린 체드란은 그저 털썩 소파에 앉았다.
“그대의 하녀들이 극성맞은 편이라는 걸 알고 있으리라 믿네.”
주인 닮아 아주 보통들이 아니라고 알고 있기를 바랐다.
“지안이 유독 그런 편이지 다른 이들도 그런 건 아닙니다.”
“프리야는?”
체드란은 무의식중에 내뱉어 놓고 아차 했다. 다나한에게 지안과 프리야에 대해 한마디 들었던 터라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다나한 오라버니께 이야기를 들으셨나 보네요.”
나엘라가 개의치 않은 듯 답했다.
“뭐…… 공작님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버지는 애들 똑같이 예뻐해요.”
듣고 보니 다나한인 걸 금세 알아챈 이유가 있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군.”
“이제 와서요?”
“지안은 아버지를 죽였고, 프리야는 아버지를 죽여 달라 했던가.”
“제대로 들었네요.”
과거를 떠올린 나엘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지안도 프리야도, 어렸을 적 벌인 모든 것들이 당시의 그들에겐 최선이었다.
“프리야는 제가 말하기가 조금 껄끄럽습니다.”
“그 이야기는 되었네. 공작님께 들었으니.”
“지안은…….”
나엘라는 타인의 깊숙한 이야기를 대신 해도 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운을 떼었다. 체드란이 지안을 좋게 봐주길 바랐다. 자신이 지안을 아끼는 것처럼 체드란도 같은 마음이길 원했다.
“지안과 제니는 마호세르디령의 중앙 시내에서도 가장 끝에서 살았습니다. 가장 집값이 싸고 허름해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죠.”
아무리 가난해도 보통은 그곳까지 내몰리진 않는다. 정상적으로 일을 구할 수 없는 이들이나 범죄를 저질러 내쫓긴 이들이 그곳까지 흘러 들어가곤 했다.
“아비는 도박꾼이었고 어미는 병을 얻어 하루하루 버티는 게 기적이었습니다. 제니와 지안은 좋지 못한 부모 밑에서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해야 했고, 아비에게 뺏기지 않으면 다행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죠. 그러다 어느 날, 그곳의 범죄율이 심각하단 보고를 듣고 저희 아버지가 시찰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나엘라가 말을 하기 시작하며 검을 배울 때였다. 공작은 나엘라에게 살기 좋은 마호세르디를 만들어 주겠노라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나중에 나엘라가 정말 집을 나갈지도 모른다나 뭐라나.
그렇게 가난하던 마을을 둘러보고 있을 때 제니와 지안을 발견했다. 용모가 꽤 예쁘장해 이대로 자란다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뻔히 보이는 아이들.
공작은 지금도 가끔 얘기하곤 했다.
지안의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동시에 그는 단번에 알아채었다. 잘 가르치고 절제시키면 제 주인에게 둘도 없는 충신이 되겠구나.
마침 공작은 나엘라의 놀이 하녀 겸 호위로 키울 아이들을 찾고 있었기에 지안을 택했다. 많은 사람을 봐 온 만큼 훗날 지안이 어떤 사람이 될지 한눈에 알아본 공작이었다.
부모가 있냐 묻자 지안은 없다고 대답했다. 제니가 유일한 가족이라고.
그래서 가족을 건사할 돈을 줄 테니 그길로 마호세르디로 오라 전했다고 했다.
지안과 제니를 두고 돌아서는데 그 눈빛이 두고두고 생각날 정도로 독했단다.
시간이 지난 후 지안의 앞에서 껄껄 웃으며 사내놈이었다면 바로 국경 부대에 던져 놨을 거란 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안은 제니의 손을 잡고 찾아와서 당당히 같이 일하겠다 말했습니다. 돈은 약속대로 줘도 좋으니 하녀 숙소에서 함께 지내겠다고요. 아버지로선 그편이 더 보안에 안전하기에 흔쾌히 허락하셨죠.”
“부모님은? 그때 돌아가셨나?”
“아니에요. 지안은 아버지께서 호기심을 보이자 기회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부모가 없다고 말했다고요. 제니와 함께 온 것도 아비가 찾아 돌아다닐까 봐 그랬다고 했었습니다. 마호세르디 저택 안에 있으면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렇게 둘은 한동안 잘 지냈다.
처음 지안과 나엘라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공작의 기대완 다르게 나엘라의 태도는 지안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범주였다.
편안하고 안전한 삶, 풍족한 먹거리, 자신을 위하는 많은 사람들.
지안은 허약하기만 한 공작 영애가 죽고 싶어 하는 모습이 용납이 안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부모가 왜 없는지 지안에게 물었습니다. 혹시나 저와 같을까 봐요.”
“사실을 얘기하던가?”
“예. 생각해 보면 지안이 얼마나 악에 받쳤을까도 싶어요. 그때 지안이 말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는 쓰레기라고요. 도박에서 돈을 잃은 날이면 아비는 어미를 밤새 때렸고, 맞은 어미는 아침이 되면 지안과 제니에게 그 화를 돌렸답니다. 어미가 병을 얻고 나서야 폭력이 멈췄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뭐라 그랬나?”
나엘라는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도와줘야겠다는 약간의 의협심과 어린아이의 어긋난 정의감이 합쳐져 있었다.
“한참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답이 나왔죠.”
“여덟 살의 나엘라는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군.”
“부끄러운 얘기지만 ‘공정’이란 단어를 처음 배웠을 때였어요.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굉장히 이상할 때라…….”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부모님을 죽이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안은 죽이고 싶다 했고 제니는 살아 있길 바란다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엘라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제가 했던 말임에도 말하기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제가 두 사람에게 서로 바라는 것이 다르니 공정하게 부모 중 한 명은 살리고 한 명은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아비와 어미 중 누구를 죽일까 물었죠.”
체드란은 잠시 침묵했다.
뭔가 잘못되어도 심히 잘못된 말이 아닌가.
사람 사이의 인륜이나 최소한의 지켜져야 할 권리 없이 ‘완전한 공정’만을 위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누구를 선택하던가?”
“지안이 또라이라고 욕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를 싫어하는 지안이라지만 이상하단 판단이 들었던 모양이다.
“소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갔고, 덕분에 제 교육 담당들은 줄줄이 끌려가 며칠에 걸쳐 얼차려를 받았습니다.”
그 뒤로도 그들은 바쁘게 생활했다.
나엘라와 다 같이 검술 연습을 하고 체력단련을 했으며 가끔가다 대련도 했다. 그때까지는 지안을 이긴 적이 없었다. 나엘라의 체력이 또래에 비해 한참 뒤처졌던 탓이다.
온갖 훈련 속에서 지안은 조금씩 독기가 사라졌고 몸가짐도 조금씩 변하던 때였다. 제니는 원래 얌전한 편이어서 행동이 그리 크게 변하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 시간이 됐는데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던 제니가 3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새하얗게 질린 지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엘라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제니가 갔을 법한 화장실을 뒤졌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른 이들까지 시켜 저택을 뒤져도 마찬가지였다.
나엘라의 입에서 한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말도 없이 사라질 아이가 아니니 제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후문.”
마호세르디 사람이 나엘라의 놀이 하녀인 제니를 건드렸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분명 외부인의 소행이었다.
외부인이 제니를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가고자 한다면 후문밖에 없었다. 득달같이 튀어 나간 지안을 따라 나엘라도 달렸다.
그리고 후문에 다다랐을 때 마주한 광경은 지안의 이성을 잃게 했다.
“놔주세요, 아버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어떤 남자에게 끌려가고 있는 제니가 그곳에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마호세르디의 보안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에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후문에는 단 두 명의 병사밖에 없었다. 게다가 병사조차 후문 밖을 지키고 있는 터라 안의 소란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손 놔!”
지안이 달려들자 남자는 발로 그녀를 걷어찼다. 뒤로 날아간 지안과 끌려가는 제니를 보며 나엘라는 벌벌 떨었다. 눈앞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나엘라는 허리춤에 걸린 단검을 꺼내 들었다. 오라버니가 챙겨 준 것이 이렇게 쓰일지 몰랐다.
“제, 제니를 놔줘.”
한눈에 보기에도 작은 체구와 벌벌 떨리는 손, 그로 인해 함께 떨리는 단검까지. 그 꼴을 본 남자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나엘라에게 걸어왔다.
“마호세르디의 자식인가 보네? 이거 납치하면 돈 좀 두둑이 받을 수 있으려나?”
남자는 나엘라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성인 남자의 주먹을 맞았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눈앞이 흐려진 그녀를 그대로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제니는 함께 끌려가는 와중에도 나엘라에게 정신 좀 차려 보라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때였다. ‘컥’ 하는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흐릿한 눈을 부릅떴으나 보이는 건 없었다. 느껴지는 건 제 몸을 붙든 남자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는 것.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서야 나엘라의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놓친 단검을 붙잡고 있는 지안과 배에 칼이 꽂힌 채 피를 흘리는 남자가 보였다.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후문을 나가는 순간 경비병들에게 붙잡혔을 텐데 말이에요.”
나엘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다나한 경이 지안이 아버지를 죽였다 했군.”
“아니에요.”
남자는 갑작스런 충격에 쓰러지긴 했지만 정신을 잃진 않았다.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지안을 죽일 것만 같았다.
“아니라니?”
“제가 죽였어요.”
나엘라는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제 의견에 따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무튼, 만약 지안의 행동이 과한 것 같다면 제게 얘기해 주세요.”
“누구 하나 평범한 이가 없군.”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만난 겁니다. 같은 결핍이 보이는 거죠. 보통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함께하기 마련이잖아요.”
이미 다 식어 버린 차를 마시려는데 체드란의 방에서 지안이 나왔다. 그러고는 응접실 테이블 위에 수선된 예복 상의를 올려놓았다.
“나엘라 님께선 바닥에 보이는 아무 돌을 집어서 머리를 내려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인 거라고 바득바득 우기고 계신 겁니다. 힘도 별로 없으셔서 오히려 그자를 더 날뛰게 만드셨었죠.”
남자를 죽인 건 사실 뒤늦게 달려온 호위병들이었지만 나엘라와 지안은 여전히 서로 자신이 했다고 우기는 중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못 살겠다는 지안을 보며 나엘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안이 찔렀을 때 치료했으면 살았어.”
“그럴 리가요. 제가 얼마나 정확히 찔렀는데요.”
작게 말다툼을 하는 둘을 보며 체드란은 두 사람의 유대를 이해했다. 나엘라의 그 행동이 지안을 변하게 했음이 분명했다.
“아주 똑같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둘을 보며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