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74)화 (74/220)

73화

황실 파티가 열리기 하루 전날.

한동안 귀부인과 영애들의 엄청난 주문량을 감당해야 했던 드레스 살롱은 파티 전날이 되어서야 한산해졌다. 매우 급했던 치수들이나 장식 수선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겨우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한가함도 잠시, 한숨 돌리고 있던 직원들은 살롱 마담까지 불러오며 대물급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대공비 전하.”

챙이 커다란 모자에 가려져 제대로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살롱 바로 앞에 대공가의 문장을 단 마차가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거기다 보기 드문 흑발에 언뜻 보이는 자수정 눈동자가 그녀의 신분을 알게 했다.

요즘 가장 화젯거리인 유명인사다 보니 마담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였다.

한미한 자작가에서 수도 대형 살롱으로 세를 키우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을 해 왔던가. 마담은 자신의 능력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기분에 눈물까지 맺힐 지경이었다.

그런 마담 앞으로 하녀 하나가 나와 말을 전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잠시 쉬며 드레스를 좀 보고 싶다 하십니다.”

대공비 정도의 작위면 보통 시녀를 대동하는지라 들려온 높임말에 마담은 살짝 놀랐다.

시녀들은 대게 주인보다 작위 하나 정도 낮은 가문에서 뽑기 마련이라 대공비 정도면 공‧후작가의 자제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귀부인들을 상대해 온 그녀답게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길을 안내했다.

“지금 바로 귀빈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일이 마무리돼 모든 귀빈실이 비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 소란 떨 것 없네. 다른 이들이 쓰는 휴게실을 쓸 테니 그리 알게.”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마담은 잠시 눈을 굴렸다. 아무래도 대공비는 눈에 띄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손님이 없는 지금, 귀빈실을 사용하나 일반 휴게실을 사용하나 그게 그거였다. 마담은 잠시 갈등했으나 결국 일반 귀부인들이 사용하는 휴게실로 안내했다.

“오늘은 손님이 한 분밖에 안 계시니 조용히 차를 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마담이 뒤에 서 있는 직원들에게 남몰래 신호를 보냈다. 지금 당장 휴게실로 달려가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라는 행동이었다.

알아들은 직원 몇이 조용히 사라지고서야 마담은 생글생글 웃었다.

“이리로 오시면 됩니다.”

나엘라를 휴게실로 안내하는 내내 마담은 입을 쉬지 않았다.

“저희 드레스 살롱으로 말할 것 같으면 3층과 4층은 일반 드레스 가게와 같지만, 1층과 2층은 살롱으로 되어 있습니다. 드레스를 보러 온 귀부인들께서 휴게실에서 만난 다른 분들과 교류하며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자신의 드레스가 얼마나 특별한지, 2층에 있는 귀빈실에는 어떤 장비들을 해 놨는지 마담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어느새 2층에 있다는 일반 휴게실의 문이 열리자 깔끔하게 정리된 휴게실이 보였다. 반짝이는 조명들과 여러 향수 냄새, 화려한 색감의 장식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놓인 자주색 벨벳 소파에 선객이 있었다. 낡고 추레해 보이는 드레스와 애써 가렸으나 체구가 티가 나는 체형, 덕지덕지 칠해져 있는 화장, 온갖 화려한 보석들과 깃털이 알록달록 부착된 모자까지 쓴 손님이었다.

내내 4층 사무실에 있던 탓에 손님의 행색까지는 보지 못했던 마담은 기겁하고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그…… 이곳이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마담이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 할 때 나엘라가 단박에 쓴소리를 했다.

“다른 손님께 무례하군. 여기는 손님을 이렇게 대하는가?”

손님이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좋지 못한 소리를 한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마담은 무마하려다 더 안 좋은 이미지를 쌓았다는 생각에 땀이 더욱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경력이 얼마인가. 금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마담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짧았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잠시 앉아서 쉬고 계시면 금세 차를 내오겠습니다.”

“차는 되었네. 내 하녀가 직접 차를 가져왔으니 충분히 쉰 다음 부르도록 하지.”

마담의 시야에 두 명의 하녀 중 한 명이 품 안에 보따리를 들고 있는 것이 걸렸다. 고위 귀족은 대부분 늘 먹던 것이 아니면 입을 대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마담은 주저 없이 물러났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마담과 직원들이 휴게실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휴게실 문 앞에 대기한 지안을 빼고 나엘라와 가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먼저 와 있던 손님의 반대편에 앉고는 삐딱하게 기대어 소파 손잡이에 팔을 걸쳤다.

“한참 뒤에나 찾으려고 했더니.”

모자를 벗어 소파 옆에 내려놓은 나엘라가 잔뜩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뭐가 그리 급해서 연락했나.”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타박부터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당분간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연락도 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있으라 했건만. 늘 망아지 같던 상대가 고새를 못 참고 나엘라에게 급보를 전해 온 것이다.

화려한 깃털 모자를 쓰고 있던 상대는 몸을 떨며 낄낄 웃었다. 그러자 생김새와 다른, 누가 들어도 남자 목소리가 분명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아, 진짜 이건 특종이라니까요. 단장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확실한 거 아니면 이렇게 안 움직이는 거.”

“네가 내게 보고했던 것 중 7할이 잘못된 보고였다.”

“이번 건 진짜입니다.”

“매번 그렇게 말했다.”

타박을 받고 있음에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낄낄 웃어 대던 이가 갑자기 살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잘 먹은 티를 내던 살결들이 남자의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뜯어져 나갔다.

찌직, 소리와 함께 살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자 자잘한 흉터가 가득한 까만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모자와 쓰고 있던 가발까지 벗자 짧게 자른 머리도 보였다.

“나갈 때는 어떻게 나가려고 그러나?”

“창문으로 뛰어내릴 겁니다.”

늘 뒤가 없는 남자 때문에 나엘라는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희한한 복장으로 살롱을 방문해 놓고 갑자기 사라지면 대신 뭐라 변명한단 말인가.

변장하느라 더웠는지 남자는 입고 있던 옷까지 훌렁훌렁 벗었다. 꽉 조인 드레스 사이로 뭉쳐 있던 솜들까지 빼내자 가벼운 셔츠와 바지만 남았다.

“나갈 때 그 옷과 솜들 다 챙겨 가게.”

“당연하죠. 이 정도로 큰 사이즈 드레스들은 구하기 힘들단 말입니다.”

체격과 정체를 가리려 남자가 큰 드레스를 입고 체구가 큰 여성인 척한다는 걸 알았다.

드레스 하나에 얼마인 줄 아느냐며, 한 번 사 주시기라도 해 봤냐고 투덜거리던 남자는 나엘라의 매서운 눈길에 입을 다물었다.

어마어마한 수당을 매번 챙겨 가는 주제에 드레스 하나에 징징거리다니. 봐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거참, 안부 인사 정도는 하셔야죠.”

“매우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하일모라 님한테요? 옛날보다 훨씬 예뻐지셨던데. 그 옆에 있던 귀족 아가씨도 예쁘고.”

다 좋은데 저 가벼운 말투가 문제였다. 다나한에게 걸려 한 번 된통 당했음에도 남자는 고칠 생각을 안 했다.

“다른 이들은?”

“다 똑같죠. 아, 클로에는 지금 황실 하녀로 취직했습니다. 워낙 감시가 심한 곳이라 연락이 안 되고 있고, 미아는 여기 말고 더 유명한 살롱에 들어가 있고요.”

“오언이나 말리는?”

“두 놈은 기사였던 경력이 있으니 황후와 관련된 귀족파에 들어갔죠.”

“그대는? 대체 뭘 했길래 황후를 만났나.”

남자는 아주 대단한 경험을 했다며 들먹이기 시작했다.

“이 서튼, 한번 하겠다 하면 하는 남자라 이겁니다.”

“세상 남자 다 죽었군.”

“거참,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그래서 뭘 했는데?”

“톨레로 상단에 호위로 들어갔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 용병 때 이름 좀 날렸던 거.”

“톨레로 상단?”

나엘라는 문득 대공령에 두고 왔던 사피오가 떠올랐다.

처음 사피오 이야기를 들었을 때 톨레로 상단에 대한 감이 왔었다. 웬만하면 나엘라의 선에서 절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는 프리야에게 부탁해 톨레로 상단이 황후와 연관이 있는지까지 확인했다.

황실과 관련된 것은 프리야를 통하는 것이 가장 빨랐기 때문이다.

“톨레로 상단에 대해 좀 아십니까?”

“대충은 알지.”

“어느 정도요?”

나엘라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실실 웃고 있는 서튼이 꼴 보기 싫어 그녀는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체 뭘 알고 있길래 저렇게 거드름을 피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톨레로 상단의 사피오라는 자를 만났었지. 두칸과 혼혈 출신이더군.”

“그리고요?”

“상단주라 알려진 우부라 자작가는 돈을 벌어들임에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없는 곳에 돈을 쓰고 있다는 의미겠지. 대대로 황실 행정 관리를 맡았으면 황실과도 인연이 있을 테고. 그래서 뒤로 빠지는 돈은 반란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럼 황후나 황태자 아니겠나.”

황후 쪽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동시에 우부라 자작가와 황태자 사이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도 확인했다.

프리야의 대답은 우부라 자작과 황후 쪽은 서로 연관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답은 얻으셨습니까?”

“현재 사피오가 노헤스카 대공령에 있네.”

황태자의 사람이라면 체드란의 사람일 테니 어차피 노는 거 잠시 써먹으려 했을 뿐이었다. 능력이 있으니 금상첨화였고.

“와.”

짝짝짝─ 서튼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며 손뼉을 쳤다. 그에게 감탄을 받아도 기분이 좋지는 않아 나엘라는 떨떠름하기만 했다.

“중간에 뭐 하나는 크게 빼먹으셨는데 답은 맞으셨습니다.”

단장님은 여전하다며 서튼은 연신 엄지를 들었다.

“그대가 알고 있는 걸 빨리 말하게.”

“흠흠, 그럼 제가 들은 것들을 말하죠. 톨레로 상단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하나는 돈을 벌기 위함이죠. 확실히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도 사병을 몰래 키우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어마어마한 돈이 들겠죠.”

“그리고 또 하나는?”

“범죄 조직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소파에 기대었던 등을 떼어 내며 나엘라가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놀랐는지 입도 벌어질 지경이었다.

“범죄 조직? 그 체드란이?”

“정확히 따지면 저는 톨레로 상단 호위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 범죄 조직에 입사한 거거든요.”

서튼이 윙크를 던지며 능청스럽게 굴었지만, 나엘라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그 체드란이 범죄 조직이라니.

범죄 조직의 수장이 체드란이라니!

나엘라의 머릿속에 혼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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