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나엘라가 놀란 것이 보이자 서튼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진짜 재밌는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러면 곤란했다.
“범죄 조직이라니, 자세히 말해 봐.”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서튼은 들어가자마자 지령받은 당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 한두 곳에서 굴렀겠는가. 제 경험들을 바탕으로 눈치는 장담하는 바였으니 이리저리 끼워 맞춰 결론을 내렸다.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합니다.”
“뭐?”
정말 충격받은 듯 나엘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의 저런 모습은 흔치 않기에 서튼은 재밌다는 티를 감추지 않았다.
“밀수, 불법 거래, 사기 등등 온갖 범죄와 관련이 있죠.”
나엘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어째 말하는 내용이 납득 가지 않아 의심이 드는 얼굴이었다.
서튼도 오래 장난칠 생각은 없어서 바른대로 말했다.
“뭐라 해야 하나, 선을 넘는 범죄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범죄가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지만요.”
“똑바로 말해.”
“어린아이, 여자, 노약자 등 무고한 이들은 건들지 않습니다. 주 수입원은 귀족들인 것 같더군요.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들었던 말인데 무고한 이를 건들거나 피해를 주면 처벌을 내린다더군요.”
“그럼 불법 거래나 사기는 이해가 되는군.”
이제야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도 못된 놈들 돈 뺏는 것에 대해선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범죄는 지탄받아야 하며 악용될 수 있다는 사람들과 다르게 벌 받을 놈은 그렇게라도 처벌받아야 한다는 주의다.
“그럼 밀수는?”
“불법 거래로 얻은 걸 파는 거죠.”
나엘라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밀수와 불법 거래라는 범죄만큼 이용하기 좋은 것들이 없었다. 사병을 키우기 위해 들어가는 물자나 군수용품을 숨기기에 알맞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려면 회계가 깨끗해야 하는 상단보다 범죄 조직이 훨씬 유용할 것이다.
“불법 거래 상대가 보통 귀족들이라면 밀수는 무조건 제국 외일 텐데…… 주 거래국은?”
“그것까진 모르죠. 저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럼 거래 품목은?”
“모르는데요?”
조금 심각한 일일지도 몰랐다. 다른 것은 다 괜찮지만, 만약 제국의 물건들이 제스라 왕국이나 두칸에 흘러 들어가고 있다면 결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에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체드란은 왜 밀수까지 손을 댔을까.
“밀수라…….”
나엘라의 손가락이 톡톡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버릇들을 빤히 아는 서튼은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있나.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아직 하지도 않았습니다.”
“뭐지?”
서튼이 웃음기를 거두고 허리를 숙이며 분위기를 잡았다.
“제가 황후 만나러 간다는 거, 들으셨습니까?”
하일모라가 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나엘라가 갑작스럽게 날아온 급보를 무시할까 하다 움직인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황후와 만난다고 했던 서튼이 중요한 것을 알아낸 것 같아서.
“코더 우부라, 그자를 호위하는 임무에 저도 들어갔습니다. 수도 외곽에 있는 고급 별장으로 향하더군요.”
“코더…… 우부라 자작가의 차남이군.”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곳에서 누구를 봤는지 아십니까?”
“황후와 함께 다른 이가 있었나?”
“아니요.”
서튼이 점점 목소리를 죽이며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었다.
“황제, 황제를 만났습니다.”
나엘라의 눈동자가 전에 없을 정도로 커졌다.
“톨레로 상단이 황태자, 대공 전하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황제 때문이었습니다.”
“자세히, 자세히 말하도록.”
서튼은 그날 들은 것들을 세세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코더 측 인물들이 몰랐던 것이 있다. 서튼이 남들보다 훨씬 청력이 좋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서튼은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며 문 안쪽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황제가 마지막에 막내아들 어쩌고저쩌고했습니다. 그게 황태자 맞죠?”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심각한 사안이군.”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
“다음 날 황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무슨 거래였지?”
“모릅니다.”
“뭐?”
서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후 만날 때는 저 안 데려가던데요?”
그럼 애초부터 황후와 만난 일은 모르겠다고 했어야지.
나엘라는 눈을 감으며 울컥 올라오는 화를 삼켜 내었다.
괜히 하나 더 있다고 해서 기대해 버렸다. 저 밉살맞은 태도를 오래 봐 왔으니 망정이니 다른 이였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나엘라는 오랜만에 만난 서튼이 반갑고 할 이야기도 넘쳐 났지만 오래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당장 내일이 황실 파티이니 오래 집을 비우면 의심할 터였다.
“황제의 행동으로 보건대, 톨레로 상단이 황태자 전하와 체드란의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응을 보려 한 번 떠본 것일 수도 있어.”
“머리 아프네요.”
“이미 들켰다면 오히려 황태자 전하께 더 연락을 많이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왜요?”
“의심 많은 성격이니까 또 다른 의심을 하게 하는 거지. 갑자기 대놓고 톨레로 상단과 황태자의 연락이 많아진다면 어떨 것 같나?”
“잡았다 요놈?”
“…….”
더는 얘기가 하기 싫어졌으나 나엘라는 감정을 꾸욱 눌렀다. 서튼을 이해시켜야 말도 잘 전달할 테니까. 그녀는 질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무 대놓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다른 의심을 부르기 마련이지. ‘사실은 황태자가 진짜 주인인가’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안 들켰을지도 모르고, 저처럼 주인임을 확신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뭡니까, 그 무책임한 말은?”
“내 상단도 아닌데 뭘.”
나엘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뻔뻔한 얼굴을 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서튼이라고 어찌 모를까.
“그러니 이건 그저 도박이네. 판단은 어차피 상단주가 해야지.”
“음. 뭐 남편분께 알아서 잘 말해 보세요.”
“안 말할 거네.”
“아는 척 안 하시려고요?”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는 서튼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가만 보니 서튼도 애인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결혼도 안 한 것들이 뭘 알까.
“남편이 바깥일 좀 하겠다는데 그거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지.”
“뭡니까. 그 한심하다는 표정은?”
“그대는 대체 언제 결혼할 텐가?”
서튼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꾸역꾸역 내리눌렀다. 여기서 화내면 진짜 지는 것이다. 저는 자유로운 삶을 위해 결혼을 안 한 것뿐이었다.
왜 하필 가장 결혼을 안 할 것 같던 이가 해서는…….
“그래서 뭐 남편분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톨레로 상단은 건들지 않겠다. 이런 말씀입니까?”
“그래. 그러니 그대가 가서 내 말을 전하게. 이런 방법도 있다고.”
“그건 간섭 아닙니까? 몰래 하면 괜찮습니까?”
“조언일세.”
“말을 마시죠.”
“이하 동문이야.”
괜히 힘 빠진다며 고개를 저은 서튼이 자세를 편히 잡았다. 널려 있는 솜들과 드레스 사이에 늘어진 자세만 보면 한량이 따로 없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서튼이 한쪽 눈만 떠서 나엘라를 보았다.
“주저 없이 내 이름을 말하게.”
언제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 나엘라가 단장일 때부터 늘 말하던 것들이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걱정은 모두 주위 사람에게로 향함을 알아서 서튼은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죠. 온갖 이름을 다 팔 겁니다.”
서튼의 능청에 나엘라도 그제야 작게 웃었다. 어찌해도 결국 만나면 편한 이들이었다.
“예전처럼 다나한 오라버니는 팔지 말고.”
“거참, 돈도 많으신 분이 외상값 좀 갚아 주시지.”
그때 두들겨 맞은 허리가 아직도 아프다며 서튼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에 나엘라는 그저 웃고 말았다.
*
저택 정문에서 마차가 멈춰 서자 나엘라는 내릴 준비를 했다.
먼저 문을 열고 지안이 나가려는데 똑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에스코트를 해 주려고 왔네만.”
마차 앞에 선 체드란이 손을 내밀어 와 지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들의 시선이 모두 나엘라에게 고정되었다.
하지만 나엘라는 찬찬히 체드란을 살폈다. 체격이 큰 만큼 뼈가 두껍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정작 체드란의 얼굴은 선이 얇은 편이었다.
그래도 전쟁터를 전전한 것을 티 내듯 강인해 보이는 턱과 굳은 입매, 날카로운 콧대나 눈매를 보면 확실히 미인이었다.
나엘라가 한참을 그렇게 쳐다만 보자 어색해진 체드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사의 매너를 보여 주려 했네.”
신사의 매너?
나엘라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범죄 조직의 수장이면서 신사의 매너? 자신에게 일언반구도 없었으면서?
그걸 이때까지 감추고 있어?
거기다 저는 사피오에게 저택을 맡겼다. 물론 그때는 일반 상단이라 생각하여 넘어갔지만 범죄 조직이라면 말이 다르다.
더군다나 사피오의 뒷조사는 체드란의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았던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했다는 것에 나엘라는 왈칵 감정이 올라왔다.
“감. 사. 합. 니. 다.”
턱, 체드란의 손 위로 강한 힘과 함께 작은 손이 올라갔다. 별다르게 기대는 것 없이 마차에서 훌쩍 내린 나엘라는 척척 걸음을 내디뎠다.
아직 손을 잡고 있는지라 그녀의 빠른 걸음에 체드란이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지금 말하게.”
체드란이 속도를 높여 나엘라와 속도를 맞추며 물었다.
“뭘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잘못한 거 없습니다!”
“지금 사용인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네.”
그제야 살짝 움찔한 나엘라가 걸음을 멈췄다. 나엘라의 얼굴엔 짜증과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체드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봐도 당장 말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 죄다 집중되어 있으니 그는 퍽 곤란했다.
“소문은 더 큰 소문으로 덮는 거라 했던가?”
대공 부부의 불화설이 나오는 것보단 창피한 소문이 나았다.
“잠시 실례하지.”
체드란이 양팔로 나엘라를 번쩍 들어 올렸다. 뜻밖의 자세에 지안은 입을 쩌억 벌리기까지 했다.
정작 주인공인 나엘라는 하얗게 얼어붙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대가 그리 급하다면 어쩔 수 없지.”
모두가 들으라는 듯 조금 크게 말한 체드란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엘라는 무엇인가 엄청난 것을 보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전 처음 해 보는 자세로 안겨 방으로 향하던 중 나엘라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완 다르게 내일은 어쩔 수 없이 황제와 알현해야 하네.”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알고는 있지만, 더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걸까.
“내일 가장 최악인 악당을 만나러 가는데 인상을 써서야 되겠나. 그대의 무기 중 하나가 외모 아닌가.”
체드란이 원래 이렇게 능글맞은 사람이었던가. 아니, 원래 저렇게 사람을 살살 녹이는 사람이었나?
아무래도 제가 아는 체드란은 아주 일부분이었던 모양이다. 굉장히 억울한데 또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라 나엘라는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대체 이 감정의 정체는 뭘까, 그녀는 시험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