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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76)화 (76/220)

75화

나엘라는 새벽같이 눈을 떴다. 아직 하녀들도 일어나지 않은, 채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부터 잠이 깬 나엘라는 방 입구에 찰싹 붙어 체드란의 방을 살폈다. 어제 갑작스러운 공주님 안기 이후 체드란을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누워 체드란에게 내일 파티를 위해 굶겠다 했는지 밥이 먹고 싶지 않다고 했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났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 못 할 만큼 당황했다는 말이다.

특히나 기억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기에 이리 혼란에 빠졌다는 건 나엘라에겐 큰 문제였다.

독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심장이 뛰고 열이 올랐다. 진짜 독을 먹은 건 아닌지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때 기억이 갑작스레 몰아닥칠 때면 이불을 걷어차거나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기까지 했음에도 소용없었다.

밤이 깊어져도 잠은 멀리멀리 도망쳐 놀리기라도 하듯 기억이 제 존재를 알렸다.

아치형 입구 옆에 서서 안쪽을 슬쩍 훑은 나엘라는 아직 잠들어 있는 그를 확인하고서야 살며시 나왔다.

분명 아침 일찍부터 천연 팩에 꽃잎 목욕, 오일 마사지 등 온갖 것들을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다행인지 뭔지 시간이 남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소파에 앉은 나엘라는 고민에 빠졌다.

엄밀히 따지면 먼저 피해야 하는 쪽은 체드란이었다. 이런저런 비밀을 감추고 있는 건 체드란 아닌가.

제가 왜 체드란을 피해 다니는가.

문제의 시작은 역시 공주님 안기였다. 그깟 게 뭐라고 제가 이리 도망 다녀야 하는지.

자꾸 따라오는 어색함이 문제다. 심장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기도 하고 평소 알던 자신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잘못한 것 없는 스스로가 먼저 피한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도 나빠졌다. 제 기분이 어떻든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체드란이 얄미웠다. 별 게 아니다 다짐하고 나니 산더미처럼 쌓인 일정이 떠올랐다.

“체드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엘라는 척척 당당하게 걸었다.

“일어나요! 아침 일찍 준비해야죠!”

제 방인 양 거침없이 들어간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는 체드란을 보자 또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누군 잠도 설치며 이러고 있는데 정작 이 모든 일의 원흉은 편히 잠이나 자다니.

“일어나라고요!”

펄럭, 나엘라는 당장 일어나라며 이불을 빼앗았다. 하지만 번개 같은 속도로 일어난 체드란이 이불을 다시 가져갔다.

“으앗!”

이불을 너무 꽉 쥐고 있어 함께 끌려간 나엘라는 그대로 체드란의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토끼 눈을 떴다.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던 체드란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으며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른 아침엔 남자의 이불을 갑자기 가져가면 안 되는 거 모르나?”

엎어진 모양 그대로 눈만 말똥히 뜨고 있는 모습을 보자 체드란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표정만 봐도 영문을 모르는 티가 났다.

그러니 타박이나 설명을 하기에도 모호한 노릇이었다.

“위에서 나와 주지 않겠나?”

커다란 손이 나엘라의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지나갔다. 그 낯선 손길에 세상 가장 빠른 속도로 일어난 그녀는 어느새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어, 얼른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아직 해도 안 떴네.”

“체드란의 잘못입니다.”

말투가 다시 딱딱하게 바뀐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체드란의 잘못임을 강조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체드란은 조금 멍한 정신으로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저택에 오자마자 화를 내더니 방에 도착해서는 이불 속으로 도망가고, 지금은 새벽부터 사람을 깨워 댄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녀들도 안 일어난 것 같은데.”

“주인이 모범을 보여야지요. 당장 일어나세요.”

“그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이제부터 그렇게 살 겁니다. 저는 매우 모범적인 사람이니까요.”

“본인이 무슨 말 하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지금 네 번 말했습니다. 다음은 없어요.”

체드란은 결국 뭉그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란 말을 두 번밖에 못 들은 것 같은데 대체 언제 했단 말인가.

혼자 중얼거렸나?

어리둥절해하던 체드란은 나엘라가 어디까지 하는지 보기로 했다.

“이제 일어났으니 뭘 해야 하나?”

“씻어야죠?”

“그럼 하녀들을 깨워야겠군.”

“애들을 깨우기엔 너무 이른 시간 아닌가요?”

“그럼 그대가 시중을 들어 주겠다는 의미였나?”

“체드란 혼자 못 해요?”

체드란은 치밀어 오르는 어이없음을 그녀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다.

어련히 세숫물이나 욕실에 물을 채운 후 깨웠을 텐데 왜 이 시간부터 그 고생을 해야 하는 걸까.

잠도 얼마 못 자, 사소한 것도 스스로 해야 해, 의중을 알 수 없는 나엘라까지 감당하고 있었다. 이럴 땐 방을 함께 쓰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가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라던 조언이 이런 때를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다행히 노크와 함께 들어온 이들로 인해 체드란은 벗어날 수 있었다.

“말소리가 들리기에 들어왔더니 두 분 다 깨어계셨군요.”

다행이라며 웃는 제니의 품 안에는 무언가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마침 준비할 것들이 너무 많아 지금이라도 기침하시라 보채려 했답니다.”

온갖 종류의 향유, 화장품, 정체를 모르겠는 도구들까지.

“파티는 저녁인데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한다고?”

“당연하죠. 자, 가시죠, 나엘라 님!”

나엘라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아침부터 사람을 그리 괴롭히더니. 질색하는 표정이라 체드란은 괜히 통쾌해졌다. 잘 되었다 싶어 속으로 고소해할 때였다.

그때 제니의 등 뒤에서 지안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 전하께서도 일어나 계셨네요.”

지안의 품 안에도 물품들이 한가득 자리했다.

“다행히 두 분 다 일찍부터 준비할 수 있겠어요.”

금세 핼쑥해진 건 체드란도 다를 바 없었다.

*

종일 서로를 볼 수 없던 나엘라와 체드란은 파티 시간이 다 되어서야 저택 현관에서 마주했다.

“예쁘군.”

오늘 나엘라는 어깨를 드러낸 형태의 드레스를 입었다. 불빛 따라 반짝이는 재질의 남색 드레스 위로 체드란이 선물했던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반 묶음을 한 머리 사이사이에 손톱만 한 보석을 장식해 두었다. 반짝이는 것이 보석인지, 드레스인지, 그녀인지 모를 정도로 환하게 빛이 났다.

“체드란도 내가 선물해 준 거하고 왔네요.”

진한 남색 예복에 얇은 망토를 걸치고 액세서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망토를 고정한 체인만이 황금인 것을 과시하며 빛나고 있었다.

머리는 늘 하던 대로 정갈히 넘겨 그의 푸른 눈동자와 예쁜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체구가 큰 그는 날렵한 맹수처럼 보였다.

“체드란도 오늘 예뻐요.”

“잘생겼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받은 대로 갚아 주라는 말이 있잖아요.”

“적에게 쓰는 표현인 줄 알았는데.”

“진짜 적들에겐 이런 말 안 하죠.”

망사 장갑을 낀 손이 체드란 앞에서 멈추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기사님께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닌가.”

그 손을 맞잡으며 체드란이 씨익 웃었다.

“오늘은 체드란도 남색, 나도 남색이에요.”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부부가 있나.”

천천히 에스코트하는 체드란을 보며 나엘라는 생각했다. 확실히 예전 무뚝뚝하던 모습에 비해 아주 능글맞아졌다.

혹시나 제가 정말 속은 것은 아닐까.

“되돌리기엔 늦었고…… 뭐, 어쩔 수 없네요.”

“독심술은 할 줄 모르네.”

체드란은 여전히 뜬금없이 튀어나온 나엘라 말의 일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한 선택이니 평생 책임지겠다는 말이었어요.”

“뭘 선택했길래.”

“체드란이요.”

갑작스러운 고백은 더더욱 적응이 안 되었다.

다만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혼미해지기보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일까. 왜인지 만족감이 차오르는 제 자신을 뒤로하고 그는 나엘라는 이끌었다.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하자 호위 기사가 문을 열었다. 나엘라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체드란이 뒤이어 탔다.

“그 선택, 후회하지 않도록 해 주지.”

자신들의 가는 목적지는 사방에 적이 가득한 진짜 전쟁터였다.

지금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어디 한두 명일까.

하지만 이상하게 나엘라와 체드란은 떨리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리란 이상한 확신을 주었다.

체드란을 선택한 것에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는 말을 속에 넣어 두고는 나엘라는 살며시 웃었다.

마차가 조금씩 움직이며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

누군가에게 수도의 사교계란 평생 넘을 수 없는 벽이며 평생을 갈망하고 사는 곳이다.

일원이 되길 바라도 첫발을 내딛기조차 쉽지 않았다. 애초에 권력, 계급, 재력까지 모두 평가받았으며 자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면 말도 섞지 않았다. 그곳에만 간다면 괜찮은 남편, 괜찮은 부인, 괜찮은 애인까지, 뭐 하나 부럽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숨을 옥죄는 듯 손가락 하나, 시선 하나까지 연기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곳에 속해 있던 이들은 말 한마디 속 시원하게 할 수 없었고 감정표현 한 번 마음껏 할 수 없었다.

소리 없는 전쟁터이자 제국을 흔들 정보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 이곳에서의 행동 하나가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는 그런 곳이었다.

황실의 권위를 보여 주듯 화려한 샹들리에가 불을 밝히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조각들이 그 빛을 반사해 홀 전체에 흩뿌렸다.

황후가 친히 초대한 악단과 소리를 풍성하게 해 줄 소프라노까지.

이 풍성한 소리로 홀을 채우는 그곳에서, 한 연인이 춤을 추고 있었다. 권력, 계급, 재력은 두말할 것 없고 심지어 군사력까지 모두 갖춘 부부였다.

남자들도, 여자들도 나이를 가리지 않고 은밀히 두 사람을 살폈으나 그들은 개의치 않는 듯싶었다.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엘라.”

오늘의 주인공 중 하나인 체드란은 시선들이 느껴짐에도 덤덤히 그녀를 불렀다.

“말해요.”

들떠 있어도 모자라 것만 둘의 음성은 한없이 담담하고 침착했다.

“황제를 알현할 준비는 되었나?”

“무슨 준비요? 마음의 준비 같은 거요?”

나엘라는 평소 무뚝뚝하기만 한 체드란이 새삼스러운 걱정을 하는 것이 웃겼다.

“의심 많고 편협하며 제 자식조차 죽일 정도로 누구보다 잔인하지.”

“그리고 당신의 원수이고요.”

“그대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의 시작이기도 하네.”

빙그르르─ 나엘라가 가볍게 한 바퀴를 돌고는 자연스레 체드란의 품에 안겼다. 그녀가 돌 때마다 하늘하늘 퍼지며 흩날리는 드레스에 귀부인들의 탄성이 퍼졌다.

“욕심 많은 늙은이가 그대를 협박할 수 있다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소중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그렇죠?”

“그래. 그대를 죽이려 들 테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려 하겠지.”

“당신에게 그랬듯이 말이죠?”

두 사람이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만났다. 동시에 주위를 맴돌며 함께 춤을 추던 젊은 커플이 멀어졌다.

“허나 잊지 말게.”

“무엇을요?”

“그대의 뒤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는 것을.”

나엘라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도 싱그러운 웃음이라 체드란은 두 사람이 무엇을 앞두고 있는지 잊어버릴 것 같았다.

“체드란, 오늘 정말 이상하네요. 체드란이야말로 잊은 거 아니에요?”

“무엇을?”

“내가 체드란도, 체드란의 집인 노헤스카 대공령도, 체드란의 아끼는 사람들도, 모두 지켜 주기로 했잖아요.”

“그랬지. 그대가 나를 지켜 주기로 했지.”

“그러니 걱정 말아요. 당신에게 평온하고 아름다운 일상을 선물할 테니까.”

음악이 끝나고 두 사람이 떨어져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체드란이 손을 내밀자 나엘라가 그 손을 틈 없이 맞잡았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커플을 향해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 시끄러움을 틈 타 체드란은 작은 진심을 전했다.

“내 아름다운 일상은 그대가 오며 시작되었네.”

나엘라는 그저 환하게 웃으며 소리 소문 없이 시작된 전쟁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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